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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놀이패 / 권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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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승부를 거는 동안

늘 우아한 자태를 뽐내려고 노력했지만

당신 앞에 추악한 내 모습을

들킨 적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꽃잎 띄운 술잔을 정중히 건넸으나

당신은 한 번도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낸 적 없었다

.

당신을 만나 당신의 터전 위에 뿌리내리고

집을 짓고 사는 동안

웃는 날보다 싸운 날들이 더 많았다

.

길 위에서 낭창대는 삶을 살았으니

그동안 당신 마음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감히 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긴 세월 돌아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이었으니

더는 사랑이라 부르지도 않겠다

.

고립무원의 꽃 진 자리는 항상 내 몫인지라

간밤에 우수수 떨어진 바둑돌 낭자하고

패를 뒤집듯 밤새도록 이불을 뒤척인다

.

하루를 천년같이 고뇌하며 살았으나

대마가 죽는 건 순간이라고

그때 당신을 꺾지 말아야 했다

좀 더 일찍 시드는 법을 배워야 했다

.

함께한 날들을 뒤돌아보면

과연 행복한 시절이 있었는가 싶다

.

다음 생에 다시 승부를 펼친다면

사활을 걸고 덤벼야 한다는 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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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놀이패 / 권수진(낭송 : 김명숙)

.

.

너에게 승부를 거는 동안

늘 우아한 자태를 뽐내려고 노력했지만

당신 앞에 추악한 내 모습을

들킨 적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꽃잎 띄운 술잔을 정중히 건넸으나

당신은 한 번도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낸 적 없었다

.

당신을 만나 당신의 터전 위에 뿌리내리고

집을 짓고 사는 동안

웃는 날보다 싸운 날들이 더 많았다

.

길 위에서 낭창대는 삶을 살았으니

그동안 당신 마음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감히 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

긴 세월 돌아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이었으니

더는 사랑이라 부르지도 않겠다

.

고립무원의 꽃 진 자리는 항상 내 몫인지라

간밤에 우수수 떨어진 바둑돌 낭자하고

패를 뒤집듯 밤새도록 이불을 뒤척인다

.

하루를 천년같이 고뇌하며 살았으나

대마가 죽는 건 순간이라고

그때 당신을 꺾지 말아야 했다

좀 더 일찍 시드는 법을 배워야 했다

.

함께한 날들을 뒤돌아보면

과연 행복한 시절이 있었는가 싶다

.

다음 생에 다시 승부를 펼친다면

사활을 걸고 덤벼야 한다는 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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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잠녀 / 김희숙

 

 

[우수상] 피랑 / 송용탁

저마다의 바다

 

너무 많은 집들이 바다를 향해 걷고 있었다

 

툴툴 내리막을, 

 

굴러떨어지는 말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 크게 숨을 참고 한숨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살다보면 숨쉴 수 없는 곳에서도 숨쉴 수 있게 된 말들이 있다. 수몰된 자리에서 이토록 따듯한 지붕들을 이해하기 위해 쉬운 감탄사보다 욱신거리는 종아리가 좋았다.

 

타지인을 안내하는

저마다의 골목이 생기고,

 

얼룩진 물안경도 없이 그저 물길따라 걸으면 저 바다도 늦잠을 잔다.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벽에 부딪쳤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 모두들 벽 속에 숨는다. 푸드득, 

 

계절이 바뀌면 나무도 새도 꽃도 

홑겹의 붓질로 새로 피겠지

 

천사가 버리고 간 젖은 날개를 입기 위해 줄 선 사람들

 

벽에 갇힌 날개는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 걸까. 두 손 가득 시를 쥐고 웃어보면 날개가 자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헤엄을 쳤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태우고 물질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파된 사람들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모래사장에 그립다라는 말을 써 볼 

조그만 담력도 사라지게 된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골목을 돌아 자꾸 벽에 부딪친다

 

수몰이 끝나면

수많은 골목도 유적이 될거야

그저 섬이 된 지붕뿐의 연속이었다고,

 

저마다의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다시 밀물이다. 하나의 표정만 허락된 석상처럼 우두커니,

 

골목의 연대를 선사했다

 

저 바다가 멈추지 않았다

저마다의 피랑을 안고 돌아가는 붉은 공중이 있었다

 

 

[우수상] 바다의 알고리즘 / 고훈실

바다가 생의 척추가 된 순간부터

저 둥근 해원을 빠져나갈 수 없다

아버지의 파도는 0과 1의 미로

이물에서 고물로 이어지는 포물선이

출항을 허하면 난바다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투망은 기호열이 복잡했다

물오른 바닷장어 뽈락 쏨펭

한 그물씩 올리면

어긋난 타이밍처럼 빈 햇살만 가득했다

바다는 갈수록 가난해져

열일곱 처음 배에 올랐던 기억과

수심을 읽은 아버지 등마저 홀쭉하다

촘촘한 그물로 아버지를 에워싼

생의 비린내가 무한 생성되고

못 박힌 손바닥에 성근 손금이 남은 건

짠내 나는 명령어가 한 생을 깎았다는 증거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천이고 만이라서

당신이 명명한 바다는 무한 복제된다

과부하로 충혈된 파도

컵라면 뚜껑에 노을이 미끄러지면

흰 포말의 데이터가 바다를 귀납하고

다시 출력하는 저녁이다

어창엔 펄떡이는 몇 마리의 기호들뿐

우주를 향해 팽창하다

섬의 뿌리로 되돌아간

오늘의 허선은 순서도로 풀 수 없다

흉어 메트릭스 몇 토막 잘라 내

알짜 프로그램으로 만선을 꿈꾸는

내일,

출항은 영원히 미지수다

아버지의 해문만이 닫힐 줄 모른다

[우수상] 등대 공작 시간 / 김맹선

제10회 등대문학상 시상식… 안경희 작가 대상

대상 1편·최우수상 3편·우수상 9편 등 총 13편 시상

 

해양수산부가 주최하고 울산지방해양수산청과 울산항만공사, 한국항로표지기술원이 공동주관한 ‘제10회 등대문학상 공모전’의 시상식이 8일 롯데호텔 울산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수상자 및 가족, 울산해수청장, 울산항만공사 사장, 한국항로표지기술원장, 울산문인협회장 등 약 50명이 참석했다.

 

제10회 등대문학상 공모전에는 총 800편의 작품이 접수돼 대상과 함께 최우수상이 각 분야별(소설, 시/시조, 수필)로 1편씩 총 3편, 우수상은 3편씩 총 9편이 선정돼 상장과 함께 총 상금 2천750만원이 수여됐다.

 

‘고래의 노래’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안경희 작가는 시상식에서 “쉽고 다양한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책이 지닌 유용성과 이로움의 가치 추구를 통해 어려운 시대 많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소설을 쓰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양진문 울산해수청장은 “등대문학상이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 내길 기대하며, 앞으로도 국내 최고의 해양문학상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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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제22회 고산문학대상에 현대시 부문 김명기 시인, 시조 부문에서 선안영 시인이 각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품집은 각각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와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이며 상금은 각 2000만원.

 

고산문학대상 운영위는 지난 1년 간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현대시와 시조 부문에서 각 100여 명의 시인, 평론가들의 추천을 받아 심사에 들어갔다.

 

현대시 심사를 맡은 김명인·이문재 시인, 문혜원 평론가는 “거듭 읽어낼수록 삶의 파장들이 깊은 감동까지 거느리며 가슴속으로 번져나가 그 파문에 흠뻑 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으며 “삶의 우여곡절과 신산고초를 통과해온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진정성의 언어’로 절묘한 표현이나 세련된 구성이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김명기 시인은 경북 울진 출신으로 2005년 시 전문지 ‘시평’ 겨울호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을 펴냈으며 2017년 대구경북작가회의가 주관하는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조 심사는 박기섭·박현덕 시인·황치복 평론가가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현실언어를 끊임없이 초월언어로 바꾸어놓고, 적확한 표현으로 말미암은 수사의 적중률이 높은 데다, 그 형식의 운용은 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닿아 있다”고 평했다.

 

보성 출신의 선안영 시인은 조선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초록 몽유’, ‘목이 긴 꽃병’ 등이 있으며 중앙일보 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올해의 시조집상 등을 수상했다.

 

아울러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에는 현대시 부문 윤계순 시인의 ‘실비집’이, 시조 부문에는 강영임의 ‘벚꽃, 천라지망’이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상금 각 300만원.

 

올해 6회째를 맞은 고산신인문학상은 미등단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제다. 올해는 신인상 응모에 시부문 700여 편, 시조 부문 500여 편이 접수됐다.

 

한편 시상식은 제22회 고산문학축전과 함께 오는 10월 14일 고산의 고택이 있는 해남읍 연동리 고산유적지 땅끝순례문학관 문학의 집 ‘백련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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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를 잃어버린 아이 / 이설야 

 

아이야.

너에게서 새를 꺼내줄게

너의 입에 갇힌 새를 꺼내줄게

 

마카우 앵무새를 기르는 집이었지

조흐라 샤는 가사도우미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지

 

새장 속 값 비싼 네 마리의 앵무새

그중에 한 마리가 날아간 건 실수였지

잠시 새장을 열고 먹이를 주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사라진 새

사라진 세계

 

파키스탄 소녀 조흐라 샤는 겨우 여덟 살

조그만 손으로 아기 기저귀를 갈고 마당을 빗질했지

몇 푼짜리 동전으로는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마카우 앵무새를 놓쳤다네

구름처럼 흩어진 새의 발자국

어디로 날아갔을까

 

주인에게 맞다가 뼈가 으깨어졌지

소녀는 새를 삼킨 하늘로 날아갔다네

날개를 펴서 구름다리 위로

커다란 새장 밖으로 날아갔다네

소녀가 살던 작은 마을에는

흰 깃털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었지

 

새는 천사의 호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나

새를 찾아 천국으로 간 아이

 

하지만 천국엔 새가 없지

죽은 새만 있지

신을 찾다가 눈이 먼 죽은 새들

오직 죽어서 가는 새들만 있지

 

아이야.

새에게서 너를 꺼내줄게

새의 입에 갇힌 너를 꺼내줄게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회장 서홍관)가 제8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자로 이설야 시인을 선정했다. 시상식은 2022년 5월 14일 오후 4시 인천 신트리 공원 박영근시비 앞에서 열릴 예정이다.

 

박영근작품상은 박영근 시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올곧은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정됐다. 박영근 시인의 시 정신을 잇는 작품에게 상을 수여하며,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만 원이 수여된다.

 

박영근 시인은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81년 《반시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노동자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가수 안치환 작곡의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제8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작으로는 이설야 시인의 <앵무새를 잃어버린 아이>가 선정되었다. 본심위원 박일환(시인), 박수연(문학평론가), 오창은(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수상작에 대해 “고통스러운 노동의 굴레가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지구촌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며, “최근의 젊은 시 문법과 현실의식을 고르게 펼쳐 보인 수작”이라며 선정 경위를 밝혔다.

 

이설야 시인은 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집을 준비하며 일제 식민시기 부평 조병창 등 국내의 노동 이슈에서 세계의 어린이 노동, 난민 문제로 시선이 확장되었다”며, “특히 파키스탄의 8살 소녀 가사도우미 조흐라 샤의 이야기를 접하고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창작 배경에 대해 밝혔다. 이어 “뜻밖에 상까지 받게 되어 영광이다”라며, “조흐라 샤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년, 소녀들에게 진 시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게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본심위원 오창은 문학평론가는 수상 작품에 대해 “사건의 묘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시적 표현에 있어 문학적 성취가 있었다”고 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번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한 이설야 시인은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데뷔했다.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을 썼으며,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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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뿔소똥구리 / 박봉철

- 예천곤충연구소에서 

온 천지가 뿔이었다가 똥입니다

앞발을 짚고 뒷발이 땀이 나도록 굴러야

빚어진 경단, 태양의 신 케프리의 화신인가

켜켜이 배설을 모아모아 치켜든 허공

덧대는 기울기마다

쇠뿔처럼 우직하게 밀어가는

경단 같은 멍울이 반질반질해집니다

벼랑을 기울이며 소 비린내를 당기자 낮은 것을 위해 지레 곤두세워 튼실해진 경단, 지레 공중을 흔들거리다 무너진다, 뿔소똥구리는 아무렴 괜찮다는 듯 연거푸 경단에 휘말려 들어가도 똥 한 움큼, 쟁여가듯 순한 출렁임으로 용케도 섞어 달구어지며 되새김질할 즈음

세 배나 되는 몸집

궤적을 내려놓은 자리에

삶이란 굴레처럼

굴리고 굴려야, 바닥을 추스르는 것

긴 장벽을 무너뜨리며

뿔을 내려놓고 그늘의 실타래를 감았을까

이리저리 출렁이는 삽날 사이

무작정 오체투지 하는 자가

사위를 들썩거립니다

태양과 달의 걸음걸이로

멱살의 향방을 가르고

어디쯤 궁굴려야 천 길을 낼 수 있을까,

둘레 두루두루 되감으며 키워가는, 부푸는 공감

지레 앞발을 견주는,

몇 바퀴의 뒷발

저기 먼 산을 굴려 한 클릭, 두 클릭

둘둘 말린 빛을 캐어갑니다

[최우수] 회룡포 명상 / 최동문

 

 

 

 

 

[우수상] 안녕, 러브레터 / 전정화 

 

 

[가작] 광음여전(光陰如箭) / 권수진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과녁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끝이 뾰족하였으므로

무엇이든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세상의 중심을 향해

표적을 겨냥한 화살촉

천천히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맴돌았다

우리네 인생은 화살 같아서

아무리 붙잡아도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다만 허공을 나는 화살이

과녁을 관통할 때마다

얼마만의 점수로 평가되고 있었다

때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비껴가는

빗나간 화살처럼 자연을 벗 삼아

세상을 등지고 살기도 했다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은 여긴데

정해진 방향은 운명처럼 

저 멀리 동심원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치닫는 세월 앞에서

내 인생은 과연 몇 점인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살아온 날들에 점수를 매기며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가작] 태평추를 먹다 / 허정진 

낯선 먼 길을 걷거나

거친 눈보라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은

고향이나 집밥 같은 거, 문득 생각나기도 하지

무거운 짐 홀로 짊어진 생이 외롭고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루가 또 힘들기만 해도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고달픈 영혼을 위로받는 날도 있지

날창날창한 메밀묵 한 지름 

돼지고기 한 토막을 묵은지에 올려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뜨거운 국물

설움도 울컥, 성엣장처럼 둥둥 떠내려가고

곁에 내 편이 생긴 것처럼

마음 든든해지는 일이어서

태평하지 못한 시름도 잊어버리곤 했지

칼칼하고 개운한 그 맛이 그리운 날은

가난하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그 시절

어렴풋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누군가의 어깨가 된다는 것에 대해

또 한 번쯤 생각하게 되지.

[가작] 주모들의 시간, 삼강주막 / 김민지 

[가작] 예천유정 / 권오철

[가작] 둥근마을 / 조영진 

[가작] 삼강주막 / 권오용 

[가작] 눈 내리는 회룡포 / 이용호 

[가작] 금당실 마을을 읽다 / 황영애 

[가작] 내성천을 짚고 일어선 나무 / 오지은 

[가작] 봉덕산 주인 / 안해경 

[가작] 초간정의 다른 시간 / 김은정 

[가작] 내성천 물안개 / 김현 

[가작] 태극나방의 날개에는 윤장대가 있어 / 김영욱 

[가작] 용문사 큰 보살 / 이인숙 

[가작] 삼강주막 / 박진옥 

[가작] 삼강체로 쓴 외상장부 / 홍영수 

[가작] 감천에 미소 날리다 / 강차남 

[가작] 예천아리랑 / 김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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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외 4편 / 오정국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 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 

 

무한에서 무한으로 연결된 밤의 터널

무궁한 밤의 아이로 나는 태어났어요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모두 다섯 개

 

불타는 산막의 거적때기 너머에

백발의 무사가 앉아 있어요

칼날 스친 얼굴에 불빛 어룽지면

나도 모르게 광대뼈를 쓰다듬죠

 

내가 만진 죽음 헤아릴 수 없고

나는 전생과 후생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죽음의 불사신이

저의 괴로움을 나에게 덧씌워

기담과 괴담, 로맨스가 끝이 없네요

 

죽은 자의 말소리와 그림자에 둘러싸여

밤의 피륙을 얽어 짜는데

 

어떤 유령은

요양병원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는 소식

침상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그 숨을 받아먹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단팥죽 몇 숟가락 얻어먹는다지요

 

결국 테두리만 남게 되는 이야기지만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수레바퀴가 멈춰지질 않네요

 

 

 

먼눈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 외지(外地)1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보면

번갯불의 거울 조각과

뽕나무 등결의 검붉은 나이테,

표지가 뜯겨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구나

 

먼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가는 담장의 꽃들

철 따라 익어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

** 미국 흑인 영가<Broken Promises>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전생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얼굴에 분칠하고 고개 드는 꽃들에게 

- 외지(外地)2

 

지나치는 것들마다 실성한 입이었다 미안하다 들꽃들아, 용서해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들을 껴안아 눈물 흘리게 하였다 간밤의 비바람을 어찌 견딘 것이냐 백지처럼 말갛게 고개 드는 꽃들아, 둑길도 저렇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얼굴에 분칠하고 하늘대는 꽃들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치 말아다오 내 얼굴을 뭉개 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의 입술을 핥고 깨물고 짓이겨놓았다

시전문지 현대시학은 제7회 '전봉건문학상'에 오정국 시인의 시집 '재의 얼굴을 지나가다'를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전봉건문학상'은 현대시학을 창립한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이번 수상자인 오정국 시인은 1956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등의 시집이 있다. 서라벌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아울러 올해 현대시학신인상에 유정, 박서영 시인을 당선자로 선정했다.

 

서강대 문학을 전공한 유정 시인은 시 '코프만 씨 아아아! 1' 외 4편,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박서영 시인은 시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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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묘사시의 계보를 이어가는 이윤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개정판 출간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묘사시의 계보를 이어온 이윤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7년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아 출간된 초판본에서 74편이던 시를 54편으로 선별해 다듬어 엮은 이번 개정판 시집은 한결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첫 시집 『먼지의 집』부터 열 번째 시집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에 이르기까지 묘사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망원경과 현미경의 장점을 살린 렌즈를 만들어 시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선명한 화소의 각기 다른 이미지를 배치해 절묘하게 조합해 내는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의 시는 대상과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세밀화해 독자의 선택에 맡기는 보여주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고 같은 독자라도 읽을 그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시는 말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많은 말을 숨기고 독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말을 찾아 위로를 삼기를 고대하고 있다.

 

 

시인의 말

 

살아가는 일은 바닥이 없는 갈증이다, 그래서

수시로 가까운 우물을 찾게 된다.

그 우물은 일찍이 누군가가

내 몸속에 파놓은 것이다.

어떤 때는 몸 전체가 우물로

변하기도 한다.

내 관심은 여전히 버려지고 잊히는 것에

닿아있다. 나는, 언제나, 그 우물을 바라보고

퍼먹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우물을 메우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개정판 시인의 말

 

쌍둥이를 낳아

하나를 남에게 준 부모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

면목은 없다만,

이제라도 데려와 살붙이고

정붙였음 원이 없겠다 싶었다.

 

 

 

목차

 

시인의 말

개정판 시인의 말

 

 

1부

 

잠긴 방문 11

사다리 12

목이 떨어진 석불들 13

화려한 유적 14

금장 가는 길 15

고목 속의 풍경 16

저녁의 공원 18

오락실 20

수영약국 22

옥상의 의자 24

난로 위의 주전자 26

암흑 속을, 불빛을 깜박거리며 28

진흙탕 속의 말뚝을 위하여 30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32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 34

처절한 연못 36

과수원길 3 38

 

2부

 

집 43

집 없는 길 44

봄밤 46

깊은 곳 48

둥근달 50

거꾸로 도는 환풍기 날개 52

밤나무 53

고사목 54

사진 속에 갇혀있는 연기 55

향연사(香蓮寺) 56

저수지 2 58

버려진 길 60

해청을 지나는 버스 62

한낮의 공원을 위하여 64

기울어진 전봇대 66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68

콘크리트에 찍힌 발자국 69

목련나무 아래 소파 70

금강휴게소 72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74

잠만 자는 방 76

 

3부

 

겨울에 지일에 갔다 1 79

겨울에 지일에 갔다 2 80

겨울에 지일에 갔다 6 82

겨울에 지일에 갔다 7 84

겨울에 지일에 갔다 9 86

겨울에 지일에 갔다 10 88

겨울에 지일에 갔다 8 90

구절리에서 91

벽 속의 관 92

깨어진 화분 94

화살 96

연못에 박힌 전봇대 98

벚꽃나무들의 거리 100

긴 점포의 한낮 102

녹슨 창살 사이로 104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비 106

 

에필로그 | 그곳으로부터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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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짙은 백야』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윤학 시인의 열 번째 시집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이 [간드레 시] 1번으로 출간되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31년간 뚜렷한 시의 궤적을 새겨온 이윤학의 시력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여준다. 10은 전체를 아우르는 완전수이지만 그는 자신의 시 세계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 열 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한층 농밀해진 그의 시 세계는 금광의 갱도를 뚫고 금맥을 찾아 전진하는 굴착기와 한 몸이 된 광부처럼 처절하고 필사적이다.

 

 

 

 

목차

 

1부

 

별들의 시간

보풀들

부레옥잠, 꽃피다

도라지꽃밭

저물녘

아궁이

폐등대

수레국화

디스크

저녁뜸

대파 술잔

눈보라

돌 의자

덧니

우리들이 잠든 자크 속 

소파베드와 함께 밤을

파라핀 오일램프

 

 

2부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우리는 봄 상추밭으로 걸었지

옛날 북문시장에 갔다

나리와 백합

때꼴

고야

마사토

층층나무 단풍들다

천변

불광동

진눈깨비

뜬눈으로 나를 기다리는 쪽창에 대하여

억새가 피어

쭈그려 앉은 그림자

쭈그려 앉은 그림자 2

개나리

 

 

3부

 

벼꽃이 피어

율피

소나무재선충(材線蟲) 감염지역

폐사지(廢寺址)

우산이끼

밤의 밀레

백합(百合)과 백합(白蛤)의 해변

영산홍

도전(盜電)

말코지집

캠핑

강변의 별장

힘줄이 드러난 전기장판

맹매기집

흙탕물 웅덩이

노적가리

들국화

 

 

4부

 

꽃샘추위

제라늄

마루기둥

송덕리(松德里)

메꽃들의 낮

첫말 막힘

휘파람

목공방집

첨밀밀(甛蜜蜜)

도꼬마리

가로림만(加露林灣)

안경을 쓰자 세 개로 흩어진

반달이 뭉쳤다

골목 끝 창

시한부

 

 

에필로그┃간드레

 

해설┃오래된 시간 의식과 구원의 언어 _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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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끓이다 /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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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힘들 때 찾아온 아버지의 선물"

 

치과 진료 중이었습니다. 손에 꼭 쥔 전화기 진동이 울려 잠깐만요 전화 좀 받아볼게요 하고 접한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윙윙거리는 기계음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귀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열흘 전 곁을 떠나신 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병간호 잘해줘서 고맙다고 등을 토닥여주시며 무슨 일이든 잘 될 거라던 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과 그 흐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같다고 하는데, 나는 종종 한 박자 느리고 생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꼭 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책들의 제목을 읽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제목들만큼 알맞은 문장이 있을까요. 또 책들은 그 맛이 제각각입니다. 짠맛 신맛은 물론 마음에 꼭 맞는 맛들도 있습니다. 새벽까지 읽던 책이 뜨겁게 졸아서 내 가슴속 지워지지 않는 맛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한라일보와 심사위원 김병택, 양영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문장의 흐름과 이미지를 선연하게 가르쳐주신 윤성택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클, 김산, 이종섶, 이수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과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애하는 엄마, 동생 현남, 옥희 그리고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남편 김병기, 민서, 민규, 주오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합니다.

 

 

 

 

[심사평] 현실 속 사물과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총 71편이다. '시적 산문'을 산문시로, '공상'을 '상상력'으로 오해하고 있는 소수의 작품을 빼면, 대부분의 작품은 보통 이상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미리 마련한 심사 기준에 유의하면서 모든 작품을 정독한 뒤, 토론 대상으로 삼을 4편의 작품을 선정했는데, '여름의 부피들', '발자국 상점', '구석구석의 힘', '책을 끓이다' 등이 그 작품들이다.

 

여름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엄마'를 시적 이야기로 다루고 있는 '여름의 부피들'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널려 있는 상투적 비유가 작품을 진부하고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점이 지적되었다.

 

상상력은 현실에 토대를 둘 때에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발휘한다. '발자국 상점'에서는 여과 장치 없이 생경한 모습으로 드러난 상상력이 독자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상의 전개가 치밀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의 힘'에서의 '구석구석'이라는 핵심어는 추상성에 의존하는 단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웠다.

 

'책을 끓이다'는 현실 속의 사물인 '책'과 그에 수반하는 작자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시어 운용의 능숙한 솜씨가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가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였다. 시적 화자의 스탠스가 분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와 함께 더 정진하기를 바라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 심사위원: 김병택(시인, 문학평론가), 양영길(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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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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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소화되지 않는 '선천적 슬픔', 그것들이 있어 펜을 듭니다

 

글을 쓰면서 이 순간이 오길 기대했는데, 막상 때가 되니 어떤 말도 서툴고 어색한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고민한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한글날에 태어났으며 돌잡이로는 연필을 잡았습니다. 그게 제가 시를 쓰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지웠다 쓴 문장들이 쌓여서 집을 세우고 가족을 만들고 사람이 되는 과정은 즐겁기도 괴롭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버둥대는 저와, 우리가 있었습니다.

 

나의 언니들 중 한 명은 저를 선천적 슬픔이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몸 안에 소화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펜을 잡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꿈에서도 시를 썼습니다. 일어나서 그 문장이 날아갈까 봐 비몽사몽 옮겼습니다. 그날 카페에 앉아 있는데 저만 멈춰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언젠가 현실에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습니다.

 

혼자서만 이 자리까지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될 때까지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오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름들이 생각나서 하나씩 호명해 봅니다. 저를 위해 적금도 들자고 약속한 두 언니, 재진과 미도, 김박예란과 친구들(다래 선주 길란) 지윤 나은 서영 유경 수많은 언니들이 있어서 지금의 선천적 슬픔을 견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쓰던 태의와 산하 세실, 든든한 나의 꼬맹이들 다윤 유현 현경 나연 채영 수은 그리고 니은 받침이 즐거운 여자들 은진 세륜 윤진 민선 은영 우리 오래도록 쓰자, 애정하는 호짜 식구들, 9월의 예버덩 식구들, 대학원 친구들과 9기 콩자반 아이들, 도운과 현영 하령 덕분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찬, 내가 너의 방공호가 되어줄게.

 

영원한 애제자가 되고 싶은 영미와 하린, 어렸던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조차도 저를 믿지 못할 때 끝까지 확신을 준 동생 현정이와 하정이. 너희들의 언니라서 기뻐, 계속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신 우숙과 재현에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박상수 선생님, 남진우 선생님, 편혜영 선생님, 신수정 선생님, 안주철 선생님, 김언 선생님, 양근애 선생님 이영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 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 심사위원 :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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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빙 / 윤계순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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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당선 통보 전화기에 귀를 대고 화분에 물을 주었습니다. 오후 2시 햇살이 창문을 넘으려다 반짝 멈춰 섭니다. 유리창 온도가 피워 낸 동백 한 송이가 마치 장미꽃 한 다발 같았습니다. 겨울 다음엔 봄이라지만 나의 좌절과 설렘은 늘 겨울에 있었습니다. 봄은 그 고배의 여파를 받아내느라 힘겨웠습니다. 시는 마치 한여름 나무 그늘 같았습니다만 늦게 출발한 시 쓰기는 치열했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졸음과 자책 사이에서 시는 늘 겉돌았지만, 그동안 몇 번의 최종심 탈락은 오히려 당선의 기쁨을 연습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어머니를 찾아 미로 정원을 헤매시던 아버지가 어머니 곁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이제 양친은 부모님이라는 호칭으로만 남았습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기쁘게 내려다 보고 계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시를 핑계 삼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제 시를 읽어주시고 소중한 기회를 주신 안도현, 손택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국불교신문사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별다른 표현 없이도 힘이 되어주는 내 가족들, 양성규씨, 종화, 종원, 박홍희, 준우, 선우 고맙고 사랑해! 작은아들 종원아, 너는 행운아야, 그동안 고생했어. 오래도록 같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일을 함께 헤쳐온 나의 형제자매들,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돈독히 뭉쳐보자.

끝으로 같이 기뻐해 주는 문우들, 친구들, ‘사랑하나 시 한 줄’ 동인, 맨 처음 출발 시점이었던 대전시민대학‘시삶’의 안현심 선생님과 동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성은주 시인, 대전 문학관 수강 동기들 모두 고맙습니다.

[심사평]

불교신문이라고 해서 불교 소재나 공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강박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두 해째를 맞은 한국불교신춘문예 시부문의 첫인상을 공유하면서 심사위원들은 200여 명의 1,100편이 넘는 작품 중 예심을 통과한 김동임의 ‘꽃’ 외 4편, 조현미의 시조 ‘분꽃, 누이’ 외 4편, 윤계순의 시 ‘결빙’ 외 4편을 중심으로 최종 심의에 들어갔다.

우선 ‘꽃’은 상징계의 제도 언어에 대한 부정의 어법이 소박한 가운데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소품이었으나 동봉한 단형 시편들의 편차가 극심하여 안정감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조 ‘분꽃, 누이’는 방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옮겨오면서도 은유의 동일화 욕망을 저만치 여의면서 리듬과 형상과 뜻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룬 가편이었다. 형상과 뜻이 경직되지 않도록 시조의 리듬을 조직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당선권을 다툴 만하였으나 역시 함께 읽은 ‘어떤 곡예’ 같은 작품의 기시감을 쉬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이미 기성의 시조들과 경쟁을 하고 있으리라 예측되는 이 시인이 돌파해나갈 세계의 기꺼운 파열을 기대하는 것으로 미련을 달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당선작 ‘결빙’은 불교 소재의 선입견을 극복하면서 재배치를 통해 오리려 낯설게 만드는 인식의 렌즈가 돋보였다. 결빙의 물리적 현상에서 손뼉 치는 논쟁과 합의의 동시성을 읽는 눈은 결빙과 해빙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손쉬운 진술이나 설명이 아니라 제시된 이미지에 의해 역설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집중적인 관찰력과 성실한 묘사력, 뜻의 과잉 전달과 일방통행을 유연하게 만드는 시적 이미지의 힘이 크다고 하겠다.

당선자와 참여해준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아울러 한국불교신문의 지극한 노고와 보람이 보다 드넓은 지평 위에서 지속할 수 있도록 문학장 안팎의 관심 또한 증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심사위원 안도현ㆍ손택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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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에서 / 신나리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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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멋부릴 줄 몰라 솔직하게 쓴 시…더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았으면

 

엄마랑 동생이랑 오빠들이랑 노래방 갔다가 돌아오는 길 동물 사체가 있고 폐우물이 있었다. 블로그 이름을 우물에 빠진 날로 짓고 폐우물 사진을 걸어 두었다. 아빠와의 싸움을 매일 적었다. 조그만 친구들이 우물을 보러 와 자주 앉았다 가곤 하였다. 우리에게 우물이 있어서.

 

점잖지 못하게 괜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이던 날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자연히 생겼다. 회복이 어렵다는 걸 잘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 가슴에 우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 번 누를 때마다 더 깊어지는. 그곳에 나를 내려 두고 오면 된다. 우리는 호흡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존재라고 느끼고 있다. 탐욕의 얼굴을 한 시를 본다. 이 세계를 이해해 보려다 피눈물을 흘리는 시를 본다. 얼마 전 이태원역에 갔다가 기도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마주하였다. 이 존재를 사람들 곁에 세워 현실을 살게 하겠다. 책임감을 가지고 쓰겠다. 외롭지 않은 문학을 만들겠다.

 

사랑으로 늘 꽉 껴안아 주는 나의 연인 슬, 채현, 아미, 진영, 혜인에게 고맙다. 언어를 통한 만남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 나의 벗 윤원, 지원, 선빈에게도 고맙다. 날 고독하고도 풍요로운 인간으로 길러 준 가족들에게, 또 하나의 집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선생님들께도 감사하다.

 

언제나 도망칠 궁리로 가득 차 있던 나를 계속 바라봐 주신 정끝별, 안미옥 선생님께, 혼자 걸어가던 나의 시를 불러 세워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여성…서사의 저력 육화한 수작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언어와 다른 시선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서들을 재배치하는 데서도 온다. 먼저 ‘새들의 주식회사’는 말과 이미지를 빚어내는 제작술이 돋보였다.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 또한 두루 균질한 편이어서 신뢰할 만했으나 완성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 공간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된 습관’ 외 네 편은 당대의 그늘진 삶을 다루면서도 활달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맥락 속에서 시상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함께 읽은 작품들에서 탈골하듯 드러나는 비유의 도식성은 숙고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당산에서’ 외 네 편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돌리는 시적 운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작은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저력을 육화한 수작이다. 독백이나 넋두리 수준의 사담에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 또한 상투화된 기우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꺼이 시인의 모험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부식토로 깔려 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길 바란다.

 

- 심사위원 : 김사인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진은영 시인·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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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엔딩 / 한상우

 

 

저녁을 덮고 누워 허공의 멱을 잡는 젓갈 냄새가 쓰다

어둠은 한낮을 낫질하던 허리를 펴 동족인 별을 음미하고

나는 잠이 무거워진다

꿈에 이끌려온 틀 떨어진 모서리 전쟁터

무기도 군량미도 없이

숨 쉬는 입들만 깊은 서쪽 어디쯤 되는 나라

맨몸으로 포격 맞는 판자촌 사이에서

주사기로 틀어막은 비명이 뜯겨 날아간다

막바지 전투라는 공이 울린 건

방어선을 넘어온 쓰레기 수거차의 반 박자 빠른 멜로디 때문

누전된 전쟁터로 다시 끌려간다

거미와 박쥐가 시시덕거리는 지붕 없는 흙색 창고

난민으로 탈바꿈하는 병사들은 군번줄 없이

녹슨 군번으로 정리된다

박쥐가 배급해준 빵이 딱딱하다

뱃속을 긁어대는 빗물에 불린다

팔다리 없는 물컹한 기억들이 벽 쪽으로 기울다 무너진다

꽃잎을 따듯 파편을 지우는 거미

틈을 보인 바닥에선 구더기가 팝콘처럼 튀어 오른다

허투루 빗자루를 찾다 그만두기로 한다

한창 뜨겁다는 아이돌 노래가

모스 부호 라디오에서 총성으로 빚는다

십이월을 막 지나는 오전 여섯 시가 실눈을 모로 뜬다

바람이 폭격하다 목이 꺽이는 소리가 창문까지 다가온다

모처럼 새우등이 펴진 아내

마침표를 찍지 않는 전사로 디자인된다

주머니 없는 소매 긴 전투복으로 강의 바깥 문을 열고 선

방아쇠 없는 뒷모습이 모서리를 가린 거울보다 간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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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중부광역신문 2023 신춘문예 1395편 접수…당선작 확정

 

“1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상당수 시 작품은 우열을 가리기 매우 까다로웠다. 특히, 결선에 넘어온 30편의 ‘시(詩)’들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뛰어났고 당선작 선정에 쉽지 않았다”

 

올곧은 창간 정신으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지난 2009년 3월 16일 창간한 중부광역신문이 2023년 창간 14주년을 맞아 제1회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한 결과, ‘시(詩)’ 1395편이 접수돼 대상의 당선작으로 한상우씨가 응모한 ‘모서리의 엔딩’ 이 확정됐다.

 

‘제1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공모’는 올해 창간 14주년을 맞은 ㈜중부광역신문과 (사)청주시문학협회 주최로 개최됐으며 충남일보 충북본사, 퍼블릭뉴스 충청광역사 등이 주관으로 진행돼 응모자 연령대는 물론 미국 등 외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다양하게 고모에 참여해 뜨거운 관심이 반영됐다.

 

지난해 12월 5일까지 응모 된 ‘시’ 작품들은 같은 달 17일 심사위원회의 1차 심사(예심), 2차 심사(본심) 과정을 통해 평가됐다.

 

심사위원은 정종진 문학평론가(전 청주대국문학교수, 문학박사)를 심사위원장으로, 성낙수 시인(신춘문예추진위원장, 중부광역신문 고문), 김이철?김나비 시인이 평가 진행했다.

 

심사 결과,‘제1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공모’대상의 당선작으로 한상우씨가 응모한 ‘모서리의 엔딩’ 작품이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선정됐다.

 

우수작으로는 △김숙영 ‘내게는 내가 너무 많아요’ △고영석 ‘겨울섬-별의 헤테로토피아에서’ △배종영 ‘납작한 힘’ △김건휘 ‘여자가 여자를 만나다’ △남상민 ‘어둠의 외곽에서’ 등 5개 작품이 수상 명단에 올랐다.

 

정종진 심사위원장은 “결선에 넘어온 30편의 시들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뛰어났고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며 “모든 장단점을 따져 심사위원들은 가슴에 와닿는 출품작으로‘모서리의 엔딩’를 당선작으로 뽑는 것에 의견을 일치했다”고 말했다.

 

신춘문예준비위원장 성낙수 시인은 “‘제1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공모’는 미국 등 외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1395편 응모작품이 출품됐다”며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작품이 많았다”고 밝혔다.

 

또, 성낙수 신춘문예추진위원장은 “시상금을 200만원으로 준비했지만 내년에는 시상금을 보다 현실화하고 시인들 신인 등용문 역할로 전환해 보는 것도 청주시문학협회 발전에 도움이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한, 그는 “충북 지역신문에서 유일하게 시부 신춘문예를 실시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청주시문학협회와 공동주최로 하고 있어 더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제1회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공모’에서 대상으로 당선된 한상우씨는 “마당을 다져준 시처럼문학회, 멍석을 마련해 준 청주시문학협회, 판을 키워 준 솜다리문학회, 차거운 머리를 가슴의 불로 옮겨주신 이상미 교수님과 전문수 교수님, 들꽃 같은 남혜란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아울러 그 외 지도해 주신 모든 분과 영광을 안게 해주신 관계자분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시상식은 중부광역신문 창립일인 오는 3월 16일 15시 상당구청 대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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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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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살갗이 있고 피가 도는 ‘살아있는 詩’ 써나갈 것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도 아니고 그것을 가장한 교만도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행운들을 지금 다 써버린 건 아닌지, 그래서 남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까지 합니다.

 

감사한 분들의 이름부터 불러 보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은 떠오르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가족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감정을 충만하게 해주는 Bassment167의 멤버 철하와 봉겸이, 지금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신 도원이 형과 종상이 형, 조금 많이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기를 바라는 지훈이, 그리고 제 부족한 시들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주신 유계영 시인, 서효인 시인, 박준 시인, 김기택 시인, 장석주 시인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 누구에게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고집부리던 아들을, 그 일을 하다 허리를 다친 아들을, 그래서 몇 달째 생활비조차 주지 못하는 아들을 항상 사랑해주는 엄마에게, 가장 큰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심사평] 당선자가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살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열세 분의 작품들이 취업 절벽, 사회 양극화, 저출산, 이주 노동, 기후 재난 같은 사회의 현안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분이란 미시적 영역에 천착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번 신춘문예의 공동 주제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메아리이고, 생의 사소한 기미를 머금은 감정 생활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기분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쏠림은 다소 염려스럽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오늘의 비정한 세태를 반영한 징후이고, 자기애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탓이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감정의 굴곡인 기분이 어떻게 시의 모티브가 되는가를 눈여겨볼 수밖에. 먼저 경험과 이미지 사이 표면 장력이 작동하는 힘이 느슨한 시, 얕은 경험과 조각난 이미지의 흩어짐으로 끝나는 시, 감각적 명증성을 견인하는 데 실패한 시를 걸러냈다. 최종으로 남은 ‘멜로 영화’ 외, ‘손자국’ 외, ‘연안’ 외 등등은 좋은 시는 “운명을 동봉한 선물”(파울 첼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변곡점일 수 있는 순간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명증성을 붙잡은 한 응모자의 ‘멜로 영화’ ‘홈커밍데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은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서점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 읽고 싶다는 게 우리 속마음이다. 당선 문턱에서 멈춘 두 예비 시인께도 아낌 없는 박수를 드린다.

 

- 심사위원 : 장석주 시인,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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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 / 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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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눈 내리는 ktx 안에서 등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책이 자꾸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흘러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6년 시를 처음 접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였지요. 제가 접한 시들은 예전에 알고 있던 시들이 아니었습니다. 시가 전해주는 의미와 감정의 결도 모른 채 수십 권의 시집을 필사했습니다. 그럴수록 시는 더욱더 혼미한 곳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불현듯 ‘시는 본래가 그런 것이다’라는 어디선가 본 글이 떠올랐습니다. 삶처럼 시도 그럴 수 있겠구나, 삶과 다를 바가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앞선 등단자분들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등단은 시작일 뿐이라고. 오직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산 아카데미 길상호 선생님, 시클 하린 선생님, 걷는 사람 김성규 선생님, 박형준 교수님을 비롯한 동국예술대학원 교수님들, 시로 좋은 예시를 보여주신 많은 시인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중대포엣, 블루버드 선생님들도 고맙습니다. 크리스티나, 필립보 네리, 너희들이 있어 엄마는 항상 웃을 수 있단다. 마지막으로 전북일보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심사평]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 시적 진정성 

 

이미지의 부조화와 언어표현의 부정교합으로 빚어내는 파격미 혹은 의외적 정서충격도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했을 때 유의미하다. 투고한 많은 작품들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강박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험적 언어표현을 과도하게 구사한다든지 열린 언어 구조로 너무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떠넘기는 경우를 본다. 의미맥락을 간추릴 수 없거나 일상적 의미맥락에서 너무 멀어진 경우가 많다.

 

주제의 치우침 현상 때문에 예심을 넘어서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회적인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었을 때 변별력을 잃고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개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투고된 많은 작품들에서 산문화 경향이 뚜렷했다. 압축과 생략 그리고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는 (혹은 감추어두는) 시의 언어적 속성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긴 시간 고립된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문장 특성도 자주 발견되었다. 고립된 시간을 견디며 혼자 읊조리는 독백형, 사변형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배출 혹은 배설과 다른 지점에서 씨 쓰기의 이유는 찾아져야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우려를 하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아보카도', '밀리터리룩의 이중성', '활어', '검은 고양이'다. 이 작품들과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도 참고하여 시인이 그의 시 세계를 계속하여 펼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도 가늠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아보카도'에서 견디기 힘든 폭염 속 시적화자는 “비닐하우스가 녹아내려 그 안에 자라고 있던 푸른 식물들이 다 타버릴지도 모를 날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밀리터리룩의 이중성'은 위선과 관능과 관음을 도덕으로 위장한 ‘이곳’(도시)에서 ‘그곳’으로의 이탈(혹은 일탈)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시의적절한 문제의식과 함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단순 서사에 머물거나 설명적 요소가 강하여 형상화가 미흡하다거나 정서 수준으로 용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검은 고양이'는 빚어내는 이미지가 발랄하고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이 흥미롭다는 점에서 눈이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상상이 과잉된 측면이 있고 그 어떤 메시지로 수렴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활어'는 바닷가의 삶에서 읽어낸 활력과 긍정의 힘을 그려낸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끌어가는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그가 펼치는 정서에 신뢰를 갖게 하는 노련함이 보인다. 서정성도 잃지 않고 있다. 그 어떤 섬광 같은 새로움이 아쉽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 역량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의 없이 「활어」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 심사위원 : 김사인(문학평론가)·복효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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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의 말言 / 함종대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무에 물오르듯 올라온다

머리를 낮게 숙여 두 손으로 발을 잡아본다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는지 볼까지 흠뻑 젖었다

개울이 발의 울음소리까지 보듬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산의 발등이나

나무들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개울도 울컥거릴 때가 있어 강에 발을 담근다

바다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하구를 보듬는다

장사가 어려워 가게를 폐업하던 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뭍의 등을 철썩철썩 쓸어내린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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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농작물을 해치는 유해조수 퇴치용 울타리 지원사업이 있어 읍사무소에 밭 울타리 신청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당선 전화를 받았다. 낙선한 줄 알았는데 늦게 받은 소식이라 더욱 기뻤다. 부족한 글에 손 내밀어 주신 심사위원님, 전북도민일보에 더욱 노력하는 참신한 글쟁이 모습으로 보답하고자 한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고 감동 받을 수 있는 눈높이 낮은 시에 큰 울림을 새기고 싶다. 

 

위에서 ‘유해조수有害鳥獸’ 라는 단어를 쓰기는 했지만 그 들은 내 글의 뿌리이며 줄기다. 지게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다닐 때나 7km 정도 산길을 걸어서 등하교하던 시절 보았던 산토끼 고라니 멧돼지들은 지금까지 내 습작 노트 속을 뛰어다닌다. 무엇엔가 쫓기던 고라니가 건너편 산등성이까지 치달아 문득 멈춰 서서 뒤돌아보듯 마흔을 넘기며 책을 다시 잡았다.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호사는 바라지도 않는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도매시장엘 다닌 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물건을 납품하고 4시에 우리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 현실 탓을 하며 주저앉고 싶기도 했다. 글을 포기한 날보다 한 줄 글이라고 쓴 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알게 된 때부터 글감을 마음에 품고 일했다. 그러다 보니 원가 이하로 물건을 팔아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부족한 남편을 반듯한 아비로 남편으로 포장해 준 아내 박경혜에게 당선의 공을 돌린다.

 

 

 

[심사평] “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

 

‘시인은 ‘시’를 매개로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준으로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 673편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행복하였다. 너무 많은 비유가 오히려 흠집을 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사물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역량껏 드러낸 좋은 작품들은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새겨읽고 싶었다.

 

여러 번 정성 들여 읽는 단계를 거쳐 1차로 선정한 일곱 작품은 「서폐」,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 「동백낭 아래」, 「회색 늑대」, 「유성」, 「마두금」이었다. 일곱 개의 시를 되풀이하여 읽고 난 후 「서폐」와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을 2차로 선정하였다. 

 

박승균 님의 「눈과 발」은 적절한 수사와 시적 장치들이 좋았고, 차분하게 주제를 끌고 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읽을 맛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그리고 어느 작품에선가 본 듯한 결말이 마음 한구석을 서운하게 했다. 

 

노수옥의 님의 「서폐」는 ‘책허파’라는 독특한 소재를 온전히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능숙한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작품의 분위기를 책임지는 시적 화자의 시선 처리와 묘사도 정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했으나 매우 아쉽게 되었다.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함종대 님의 「가장 낮은 곳의 말」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가장 낮은 곳의 말」은 시상을 무리하게 전개하지 않으면서,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매끄럽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도 시의적절하였다. ‘발톱’이라는 오브제에서 시작한 시적인 사유를 거침없이 확장해내는 활달함도 돋보였다. 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해내는 점도 작가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했다. 대한민국 시단에 무르익은 기량을 맘껏 펼치시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김영(시인, 전북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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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 김미경

 

 

요즘 뒤에 있는 것들이 좋아집니다

 

당신처럼, M에게도 빈티지 공간 하나 있었죠 그때 M은 무척 어렸고, M을 업었던 등은 순하고 따뜻한 조도를 갖고 있었어요 잠투정하던 M이 눈물 콧물 번진 얼굴로, 그곳에다 새근새근 잠을 기대놓으면, 달빛도 베이지색 커튼을 수직으로 드리웠죠

 

그거 아세요

이 세상 어린 잠들은 모두 수직이 키웠다는 거

 

비밀스런 달의 뒤뜰도, 사다리타고 내려오듯 위에서 아래로 점점 깨어나고, 이따금 놀다가던 천왕성도, 목련꽃 켜 둔 그녀의 뒤란까지 따라왔던 초록 이파리도, 명지바람이 업어 키웠죠 달이 지구 그림자를 컬러로 인화해 준다는 뉴스가 뛰어다니던 날, M은 쓰러진 그녀를 업고 응급실로 달리던 중이었다는데요

 

건초처럼 가벼워진 그녀 몸이

M의 등에서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렸다는데요

 

그동안, 들판과 벼랑마다 피는 꽃이 달랐던 것도 다 그 이유였을까요 늙은 수직은 어린 수직 위에서 온전히 잠들기 어려웠을까요 그 등에는, 당신의 위급한 잠조차 기대기 아까웠던 걸까요

 

의사선생님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응급실에 불안한 숨을 눕혀놓고서, 시든 파 같은 그녀 등이, 그믐달보다 어둡게 식어가는 걸 보았다는 M, 어떻게 알았는지 공중을 열고 문병 온 태양도, 가로보다는 세로의 언어로 토닥이다 가고, 달도 허공에 벽지처럼 서서 회복을 기다렸다는데요

 

M의 빈티지 침대는

꿈속에서, 울고 보채던 어린 벼랑을 등에 업은 채

신음하다 눈 감았고요 숨진 침대를 상여가 -어영차 수거해갔죠

 

우리는 따뜻한 수직의 잠을 기억하는 족속들,

M을 본 건 며칠 후였습니다

 

잔뜩 웅크린 어깨로, 사망진단서 팔랑이는 손을 데리고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그 앞을 스친 버스 안에는, 흔들리는 손잡이에 오늘 태어난 졸음을 기대놓은 사람들,

 

사람들이 저녁마다 집으로 향하는 것은, 자신의 등 어디쯤에 있는 벼랑 하나가, 어리거나 늙은 주인들을 애타게 부르기 때문, 당신이 퇴근하는 골목이 가끔씩 캄캄한 것도, 등에 업은 아기 깰까봐 가로등도 자는 척 눈 감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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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성경 말씀이 시와 저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전혀 생각 못했던 당선전화를 받고, 하얀 밥물이 끓어 넘치듯 내 속에서 사계절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초년시절과 청년시절, 성인이 되어서까지 평생 시를 동경했지만 통성명도 못한 채 헤어지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저는 필리핀에 살고 있습니다. 유년의 친구를 찾듯, 어느 날, 시가 저를 찾아와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새벽에도 저를 깨워 소재들을 툭툭 던져 주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매일 그것을 공부하며 쓰는, 시와의 즐거운 동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놀라운 시 창작 강의 채널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명희문학TV’는 제가 먼 타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며 어려움을 겪다가 만난 최고의 생수였고, 그 동안 모르고 써왔던 시 창작 기법에 대한 큰 배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시에서 몰랐던 것들을 무수히 깨우쳤습니다.

 

이제 돌아보건대,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내게 말을 걸어주는 우주만물에게도 고맙습니다.

 

때로 제가 가장 지쳤을 때 손 잡아주시고 응원해주신 존경하는 스승님,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뜨겁게 시를 발굴하고 있는 시시각각과 다락방, 다줌 문우들, 앞으로 꼭 문우님들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응원합니다.

 

교회 선교사님과 박시인님, 조시인님, 사랑하는 친구들 언니들 오빠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오래전 저의 어린울음과 칭얼댐을 포근하게 재워주시고 길러주신 하늘나라에 계시는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두 분의 등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음을 고백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제 시의 손을 잡아주신 전남매일 신문사 담당자분들과 심사위원님께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쉼 없이 더 정진하여 우주만물,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따뜻한 시인의 길을 열심히 걷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주저앉을 때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으로, 나와 시를 특별하게 묶어주셨던 나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 오늘의 영광을 돌립니다.

 

 

 

[심사평] 시적 사유의 깊이와 상상력에 중점

 

책상에 쌓인 원고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삶이 팍팍한 시대에도 문학을 향한 열기는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시적 사유의 깊이와 시적 구성, 상상력의 폭과 넓이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그중에 ‘광합성 야구’, ‘서부 우회도로’, ‘기억제본공장’, ‘등등’이 군계일학처럼 눈에 들어왔다.

 

‘광합성 야구’는 아버지의 서사를 ‘오렌지’와 연결한 참신성이, ‘서부우회도로’는 ‘누룽지 냄새’로 그려낸 그리움의 풍경이, ‘기억제본공장’은 책을 제본하듯 기억을 제본해 나가는 상상력이, ‘등등’은 “수직”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한 점이 참신했다. 엄마의 등도 햇살도 벽도 수직성으로 ‘어린 것’들을 키워낸다는 발상의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작품들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울림의 폭이 큰 ‘등등’에 손이 갔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에서도 사회적 현상과 문제를 바라보고 새롭게 표현하는 등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소통의 폭이 큰 점도 믿음이 갔다. 큰 축하를 보낸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당선되지 못한 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강대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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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 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꼬리 살짝, 올라간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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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작품, 삶과 같아 언제나 미완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아득하기엔 아린 나날이어서 먼 듯하지만 가깝고 가까운 듯하지만 먼 거리였다.

움켜쥐어도 끝내 잡히지 않는 햇살, 그럼에도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듯.

빛살을 엮어 만든 밧줄과 같은 인연의 힘으로 여기에 서 있다.

고마움과 미안함은 이따금 동의어로 쓰인다.

시를 쓰면서 그림을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시 쓰는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저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며 걸었다.

걷는 것은 견디는 것과 닮았다.

작품은 삶과 같아서 언제나 미완일 뿐, 오늘의 뿌듯함이 내일의 부끄럼이 되곤 한다.

하지만 등 뒤에 있는 시간처럼 이 또한 성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빛나는 밧줄을 길잡이 삼아 환한 저 너머로 다시 걷는다.

제 시의 맨 앞에 계신 이용헌 시인님, 박동기 작가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버지 어머니 큰모 삼촌 막모, 그리고 브라더 복문.

끝으로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뒷면에 감춘 저항의식…詩 본원적 매혹 느껴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

 

'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 이하석 시인·전동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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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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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부족함 많은 글 가능성 열어줘 감사합니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글을 쓰겠다는 건 그런 거울을 자꾸만 닦겠다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면 그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더는 그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을 썼다. 나와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인물만이 거기 있었다. 나의 글 속에서 나라고 우기는 인물들이 나 대신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내가 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 혼자만의 꿈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에 덜 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졸음이 한 번에 달아났는데도 도통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꿈에 있을 때보다도 실감이 안 났다. 축하해주시는 기자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족함 많은 글에 가능성을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나의 글이 혼자만 믿는 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기로만 남을 수 있던 글을 믿고 시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이희진 선생님과 시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 장석남 교수님, 권혁웅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나보다도 나의 글을 의심하지 않고 응원해주며 매주 스터디를 함께한 우리 학교 언니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당선 소식을 알고 “내가 된 것도 아닌데 손이 다 떨린다”면서 기쁨을 함께해준 친구들을 비롯해, 당선의 기쁨만큼이나 축하의 기쁨으로도 가득하게 해준 모든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매번 나의 선택을 믿고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심사평]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 심사위원 :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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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 /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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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

 

이 기쁨에 아득함이 있다. “‘볼트’는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었을까.”

 

당선 소식 후 잠시 자리를 피해 줬던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날짜를 확인한다. 겨울이 느리게 가는구나. 일상은 왠지 사소한 일에도 조금 더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무반주 첼로를 들으니 코끝에 저수지가 생기는 기분이다. 세계 안에서 파편인 나는 이제 새롭게 비행해야 한다. 상승과 하강의 난류(亂流)를 지나며 나는 시의 이름으로 호명될 것이다. 착빙하는 동체에 닿는 빛의 차가움은 문학의 신경인가.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시를 읽어 주고 싶다.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전에 내게 자꾸 다른 일이 생긴다. 그럴 줄 알았어. 편지는 또 다른 이에게 가 버릴 거야. 그러면 나는 읽지 못한 편지의 말을 대신 써 나가도 좋겠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립습니다. 존경하는 극작가이신 아내 김성민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늘 저를 보호하고 삶과 문학을 위한 수공업적 자세를 길러 주셨습니다. 저는 문학과 예술의 동료로서 당신에게 속합니다. 외롭고 높게 인문 연극하는 극단 피오르에 감사드립니다. 서현과 진서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나의 변증법입니다. 예선을 거쳐 최종심까지 질식의 시간을 견뎌 준 ‘볼트’에게 감사합니다. 당선의 영광을 주신 서울신문에 감사드립니다. 아름답고 절실하고 성스러운 모국어에 감사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는 오늘의 관습 앞에서 순결한 존재의 먼 얼굴을 회상한다.

 

 

[심사평] 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신해욱·오은·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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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벚 보살 / 이수진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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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 짓게 됐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돌이켜보면 ‘시인이 되거라’ 부모님 유언으로 인해, 경영학에서 문학의 길로 에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시를 시작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2016년, 그 심정을 모르는 남편과 아이들의 응원은 더 버겁기만 했다. 그때 지인이 박덕은 교수님을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늘 정체성에서의 물음표가 나를 괴롭혔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앞서곤 했다. 그때마다 교수님의 채찍이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방황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다잡아주려고 전국에 있는 사찰을 데리고 다녔다. 딸과 아들은 할 수 있다고 수시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 덕분에 마음 다잡고 새로운 시도를 꿈꿨다. 국어국문학과에서 기초부터 다지면서 학업과 동시에 시 창작에도 전념했다.

그러던 중 윤성택 시인이 비유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차근 차근 한 편 한 편 날선 자음 모음들이 둥글게 깎였고, 직관의 터를 고르고, 앙상한 언어에 살을 붙여갔다. 그러길 몇 년,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아들딸. 공부에 집중하라고 반찬마저 해서 보내준 언니들에게도 이 영광을 돌린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심과 신심에서 태어난 환희의 노래

불교신문 ‘2023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와 시조 작품들을 상세하게 읽었다. 시적 경향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작품들과 불자로서의 내면을 살피는 작품들이 많았다. 불교신문의 신춘문예가 불자 문인을 발굴하는 등용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 선정을 위해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탁발승’, ‘물의 집’, ‘청벚 보살’이었다. 시 ‘탁발승’은 “절 아래 마을”로 탁발을 떠나는 수행자의 여정을 순차적인 시간을 따라가며 노래했다. “염소의 부러진 뿔을 쓰다듬고/ 늙은 도요새의 남루를 여며주었네”라고 쓴 시행의 끝자락은 공양물을 받는 탁발의 일을 오히려 마을 대중에게 베푸는 일로 적음으로써 탁발의 궁극적 의미를 장엄하게 부각시켰다. 다만, 탁발을 나선 주체가 선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맹그로브 나무로 의인화함으로써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시 ‘물의 집’은 시상이 빛나는 대목이 많았다. “백무리 물고 웃는 함박꽃 환한 마당”이라고 쓴 시구에서는 흰색의 밝은 색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심우도 빛바랜 벽엔 홀로 깊어 부푸는 달”에서는 빛이 바랜, 시간이 쌓인 벽과 달이 내뿜는 그 신생의 빛이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쑥 들어가고 부드럽게 튀어나온 질감 또한 대조적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있는 시공간이 현실의 시공간인지 상상의 시공간인지가 불분명했고, 절의 공간과 세속의 공간 또한 뒤섞여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고심 끝에 시 ‘청벚 보살’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시심이 매우 맑았고, 또 무엇보다 깊은 신심을 시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청벚나무를 시적 주체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곧 구도 수행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벚나무)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라고 써서 청벚나무가 개화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고, 깨달음을 향한 희원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거리감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라고 쓴 결구에서도 귀의와 경배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신심을 바탕으로 웅숭깊은 찬불의 시편들을 계속 보여주길 당부드린다.

- 심사위원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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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추억 /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내려진 그 극장 간판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나 달아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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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의 멍석, 정다운 자리면 좋겠습니다

 

땡볕을 업고 이삭을 주울 때면 할머니는 되뇌셨습니다. 자갈밭이라도, 우리 땅에 농사 한번 짓겠다고. 꿈을 이루셨습니다. 철길 걷어낸 땅. 그야말로 자갈밭. 콩을 심어 콩이 떨어지면 자갈 속에 숨어 찾으려 자갈을 헤치면 더 밑으로 빠지고. 자갈을 거의 걷어내 땅이 제 모습을 보일 즈음...... 이후로 밭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밭에 뿌리지 못한 땀을 요행히 교단에 쏟게 되었습니다. 서른여섯 해. 창작과 감상보다 입시를 위한 수업. 점수를 얻으려고 쪼개고, 부풀리느라 스스로도 재미가 없는데 듣는 아이들은 오죽했을까요. 가끔 시를 써서 들려주었습니다. 밭에 못 뿌린 씨가 마음 밭 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적에서 벗어나면 착한 아이가 됩니다. 쓴소리, 흰소리 없는 애독자들의 환호성. 약이 독이 되었죠. 지루함을 모면하려는 아이들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론서에 인용된 작품은 경이로웠죠. 짚으로 비단옷을 짤 수 없었습니다. 멍석이나 짜야 했습니다. 멍석말이나 안 당한다면, 발에 밟히든 쥐가 갉아먹든, 도란도란 둘러앉는 정다운 자리라면 좋겠습니다. 자갈 속에 빠진 콩알 하나 주우려고 자갈을 골라내었듯 걷어내고 빼려 합니다. 모양 없고 거친 멍석 한 장 펼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끝물인 사람에게 이런 큰 영광과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주시다니. ‘이런 걸 누가 본다고!’ 촌철살인을 아끼지 않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심사평] 기억 저편의 사물 포획 솜씨 돋보여

 

515명이 투고한 2140편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위원들은 자기표현으로서의 시가 인간학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도록 매우 다양한 삶에 처한 이들이 다채로운 시적 발화를 선보였다.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적 수행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하는 일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과업. 이 어쩔 수 없는 역할을 위하여 걸러낸 시편은 김미선의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외 3편, 박봉철의 ‘만개꽃’ 외 2편, 이도화의 ‘무심코’ 외 2편, 김수현의 ‘무한동화’ 외 2편, 이상록의 ‘추억의 극장’ 외 3편 등이었다. 참신한 감각과 포착, 재치 있는 사변, 환상의 표출, 내면의 환기 등을 그에 어울리는 시적 언어로 건져낸 시편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어디 내어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우선 동의하였다. 하지만 단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과 삶을 지각하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발화의 양상에 더 주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상록의 시편들을 남겼고 그 가운데 ‘극장의 추억’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극장의 추억’은 흑백영화처럼 낯선 추억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서정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어 다소 낡은 느낌조차 없지 않다. 그러함에도 구체적인 시어와 비유를 통하여 기억 저편의 사물을 감응하고 포획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획득한 점도 높이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구체에 육박하려는 태도의 성실함이 뚜렷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이를 계기로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구모룡 문학평론가, 성선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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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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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보고자 마음먹으면 티끌에도 우주가 보여

 

오늘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집 앞을 쓸어야 하지만, 저는 여전히 눈은 좋은 소식이라 생각해요. 투고하던 날에는 할머니가 꿈에 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좋은 징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징조들에 배신당한 적이 너무 많아, 그냥 내리는 눈을 구경하며 일이나 하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선이 된다면 멋진 말들을 늘어놓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저와 거리가 먼 것 같아 그냥 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태연해지면 좋을 텐데, 저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조바심을 내고 전전긍긍하며 보냈습니다. 간절히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풀숲을 들여다보고, 밤이 될 때까지 공원의 오리들을 지켜보고, 낯선 도시의 낯선 역에 내려서 헤매도 보고.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너무 간절한 꿈이었는데, 꼭 내가 되고 싶었지만, 또 꼭 나일 이유는 없어서. 그저 쓰고 또 썼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도 꿈이라 생각하며, 꿈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사이에 또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시를 쓰고, 시를 아는 척도 해보고. 이해하는 척도 해보고.

 

그러니까 시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보고자 마음먹으면 작은 티끌 하나에서도 우주가 보이고, 보고자 마음먹지 않으면 드넓은 우주에서 작은 티끌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게 시는 한 번도 쉽게 다가온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 다가오는 무언가, 제가 보는 무언가가 시라고 믿으며 계속 쓰겠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쓰면 그게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앞으로 어떤 시들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백자를 굽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쓰겠습니다. 제게 다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나희덕 선생님, 박형준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조만간 눈처럼 좋은 소식과 함께 연락하겠습니다. 다만, 소식을 전할 수 없는. 할머니, 아버지. 당신들이 내게 준 이름이 여기에 있어요.

 

 

 

[심사평]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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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마을의 "다락쉼터" 옛 지명을 뜻한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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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무한 사랑 어머니 삶 새기며 시인 길 걸을 것"

 

초등학교 1학년 가을, 제주 시내에서 고내봉 오름 아래 낮게 펼쳐진 농어촌 마을로 전학 왔습니다. 매일 눈 뜨면 파도 소리에 마을은 분주히 움직이고 골목엔 어린 꼬마와 대문도 없는 집을 지켜내던 개들이 전부였던 시절. 그 사이를 빠져나온 나는 가끔 굽이진 해안 길을 걷다가 오래된 초등학교로 걸어가는 꿈을 꿉니다. 만지면 잡힐 듯한 선생님의 음성,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까르르 웃는 친구 얼굴, 하나하나가 그리운 연말입니다.

 

이 연말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걸 축하드립니다" 문자와 전화를 받고 떨리듯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의 직업은 항만 공사의 건설사업관리 기술인입니다. 지금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제주 섬을 빠져나왔지만, 여기에서도 바다는 나를 껴안고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 막연하고 꿈틀거리는 기억들이 어느 날, 내 안을 헤집어 놓습니다. 멋도 모르면서 SNS에 낙서하며 무미건조했던 삶이 2년 전 뭍으로 나오면서 "이제는 낙서가 아닌 시를 써봐라" 용기를 주신 조성국 선배님 덕분에 진솔한 삶의 성찰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왜?, 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무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 마음이 다 같은 시가 아닐까요?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신 삶, 그거 하나면 시인으로서 가는 길은 아름답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화상으로 '시와 문화' 시 창작 배움에서 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이고 명징한 이미지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정적인 관념의 틀에서 벗어난 시의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박몽구 선생님, 함축적 언어의 깊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선미 선생님, 그리고 시 창작 배움 여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미숙한 시를 뽑아주신 무등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께도 시인으로서 용기를 갖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끝으로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감수성을 키워준 나의 고향 '고내리'와 사랑하는 가족들, 애월 초등학교 친구들 덕에 감히 시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쁩니다.

 

 

 

 

[심사평] "상상력의 참신성 초점…당선작 시의 미덕 돋보여"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정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의식으로부터 제법 사이 띄기가 된 것인지, 몇 해 동안 보이던 어둡고 우울한 감상성이 어느 정도 걷혀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아 반가웠다. 좋은 시는 능란한 기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과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통찰하는 자기 성실성에 의해 산출된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시가 언어를 몸체로 하는 한, 언어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자기 감상에 먼저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시, 그러면서도 상상력의 참신성과 가능성을 갖춘 좋은 시에 주목하였음을 밝혀둔다.

 

응모작 중 심사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시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 작품만을 당선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미향의 '속도의 풍장'은 버려진 자동차를 통해 인간 삶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데,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박행신의 '지워질 줄 알았다'는 어머니와 목기에 얽힌 서사적 모티프를 산문시형으로 구성하면서도 끝까지 서정적 긴장을 놓치지 않은 뚝심이 돋보였다. 최서정의 '풍경사(寺)'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정경들을 풍경의 사찰로 응시하는 독특한 상상력과 성찰의 언어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의 자리에는 안시표의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는 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소(沼)와 소(牛)의 동음이의어로 교직하고 있는 상상력의 확장성, 장소 체험으로 환기하는 그리움의 서정성, 소환된 기억을 늪에 사는 생물들로 구체화시키는 예민한 감각, 한 편의 시를 마치 언어로 그린 수채화처럼 보여주는 이미지의 선명성 등이 그것이다. 표현이 난삽해지거나 의미에의 집착을 범할 수 있는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으로서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또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동근 문학평론가·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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