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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창문에 드러나는 것들 / 조정희

 

 

유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속살을 모두 보여준다

빛이 출렁일 때 유리는 자기를 자신있게 나타낸다

유리는 부끄러움이 없다

 

검정색 투명 스타킹을 신고

살이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의 그녀가 화이트 와인을 즐긴다

공원 귀퉁이의 수은등 불빛이 차갑다

보도블럭에는 깨지고 금이 간 것들이 더러 보인다

수레가 골목길 한가운데서

바퀴 하나를 수렁에 파묻고 길을 막고 있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바퀴만의 일이 아니다

 

커튼으로 차단되어 노래도 햇빛도 들어가지 못하는 방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지만 닿지 못하는 손잡이가 있다

안이 어지러운 서랍은 혼돈이 새나가는 것이 두려워

밖을 꽁꽁 닫아버릴 때 많았다

 

새벽안개는 가도 가도 흐릿해서 앞날을 만질 수가 없다

소통은 너무 깊어 손닿지 않는 곳에서도

내일과 악수를 청하는 일

일상을 열어 낯선 세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은

불안을 밀어올리며 언덕을 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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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수채 / 김현욱

 

 

여기 모였구나, 우리 네 식구

머리털과 거웃들이

참으로 사이좋게 뒤엉켜 있구나.

눈곱이며 코딱지며 온몸의 각질이

양수(羊水)처럼 끈적끈적 엉겨 붙었구나.

단칸방 한 이불 속에서 깔깔깔

옆구리 간지럽히던 그 모습이구나.

어버이날 처음 받은 손편지에

구불구불 지렁이 글씨 같구나.

코끝 거뭇거뭇해지더니 가슴 부풀어 오르더니

안방에서 작은방까지 이역만리(異域萬里)가 됐구나.

안으로 잠긴 문은 열쇠 구멍이 없구나.

같이 밥 먹는 게 식구라는데

몰랐구나, 저 녹슬지 않는 목구멍으로

다행히 한솥밥을 먹고 있었구나.

거머리처럼 징글징글 한 집에 산다는

은장(銀裝) 가족관계증명서였구나, 저 아득한 물구멍!

거룩한 구멍에서 태어나

세상에 숨구멍 하나 뚫으려고 아득바득 살아도

서로 마음구멍은 맞추고 살라고

그래야 콸콸콸 잘 흘러간다고

기어이 모여 역류(逆流)의 물감을 풀었구나.

수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냐.

여기밖에 또 어디 모일 데가 있었으랴.

붓질하듯 낡은 칫솔로 네 식구를 거둔다.

고여 있던 탁한 말들이 엉긴 마음들이

수채를 지나며 맑아진다.

후련해진다.

 

 

 

 

[은상] 해양조사연보의 빛깔 / 김관섭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제554호 해양조사연보, 해양조사요보에

햇살이 닿아 시간이 열린다.

백년의 말을 걸어 인사를 한다.

그날들의 기록은 쿨럭쿨럭 바람도 토닥이고

수산과학자들의 해양연구일지가 되살아난다.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시간을 넘어

교신을 한다. 여전한 해양강국의 꿈은

백년, 오십년 전에도 현재에도

무전처럼 온라인처럼.

 

눈인사를 한다.

너의 시대에도. 나였던 시대에도

대한민국 해양강국 우리는, 꿈의 기록을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바다를 밝힌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책임

기록을 햇살이 어루만지는 5월,

목시조사와 동물플랑크톤과 양식수산물들과

희생된 영혼을 위한 기도가 분주한 지금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해양조사연보와 해양조사요보가

늙은 옷가지로 오늘을 말한다.

햇살에 주름을 펼친다. 다독다독 인사를 전할 때

인사를 받는 우리는, 빛깔은. 푸른 빛 바다에서.

 

 

 

 

[은상] 배추적/ 이상재

 

 

함박눈이 내내 고양이 걸음으로 내렸다

감나무 줄기를 칭칭 감고 오르던 흰눈은

수북하게 쌓였다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장독대까지 묶여있던 발자국들과

가난도 스며들어 시들어갔을 골방 어디쯤

배추 한 포기, 어머니 손끝에서 푸르렀다

고쿠락 속 콩들이 가마솥을 두드려주는 저녁

어둠을 환하게 밀고 나온 밀가루 한 됫박이

눈처럼 부풀려져갔다 아버지 술 장단에 맞춰

가마솥엔 돼지비계가 솔잎사이로 녹아들었다

밀가루풀에 적셔진 배춧잎들은 부풀어 익어갔고

막걸리잔 부딪치는 틀니사이로 아버지, 환하다

칠남매의 입마다 배추적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은상] 보원사지 / 이준복

 

 

홍수 때 가슴에 둘러붙었던

검불들도 떼지 못하고

갈대는

곯은 배 허리띠 조여 버텨 세우던

작년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모습으로

서걱댄다. 밥 칭얼대는 아기를 구슬리던

풀벌레 소리를 다시 낸다.

메마른 등뼈 몸이 바래고 바래어서

백탑이다.

가쁘던 숨 고비가 마디마다 매듭 되어

고이고 밀어 올린 꽃이

보주쯤의 높이에서

아들 딸의 경전을 바람으로 읊는다.

둘레바람 천지 들판일 때

넘어지지 마라! 서라, 서라! 빌어주는

두 손 비빔이 당간지주 공명하는

보원사지 갈밭머리.

갈꽃 씨앗 하나가 노을 미립자 하나 데리고

빈 큰 석조 바닥에 이슬로 앉는다.

 

 

 

 

 

[은상] 물 잡은 논 / 이용심

 

 

모내기 하려고 곱게 써레질 해놓은 논마다

물이 가득 잡혀 있다

물 잡은 논은 하늘을 한껏 담고 있고

땅에 내려온 그 하늘 안에도 구름이 흐른다

하늘의 하늘은 하나인데

논에 담긴 하늘은 조각보처럼 나눠 있다

달리는 열차에서 본 물 잡은 논은

파노라마다

낮에는 하늘도 품고 저 산의 그림자도 품다가

저녁이면 서녘으로 길게 키가 자란 햇살도 품는다

 

물 잡은 논은 작은 바다다

바람이 바다마다 가벼운 물결을 만든다.

깊어야 내 종아리 깊이인 그 바다는

고요한 밤에는 깊이를 가늠 못할 만큼 엄숙해진다

물 잡은 논의 밤바다에는 별과 달이 뜬다

이 계절, 물 잡은 논은 하늘과 바다가 공존하는

거대한 화폭이다

화가 없이도 그려지는 수채화다

 

 

 

 

[은상] 플로라의 반짇고리 / 이기석

 

 

봄이 오기를 기다려 꽃을 피운다

 

몸 생채기야 기다리면 된다지만 마음에 상처가 났으니

 

땅속 헤쳐 돋아난 것들로만 무더기로 쥐여줘 봐도

무덤덤해 하니

 

플로라는 반짇고리를 이고 나온다

갖가지 색깔의 실로 채워진

 

가장 고운 자줏빛 실을 바늘귀에 꿰고

깊은 상처는 긴 바늘로 옅은 상처는 작은 바늘로

골무 끼고 수놓던 정성으로

 

한 끝 두 끝 상처를 깁고도 모자라

모아 둔 헝겊을 겉에 대서라도 한 올 두 올 깁는다

 

아픔이 아물어야 새살이 돋는데

돋은 살이 굳어야 사는 것인데

 

그래야만 끼리끼리 모여서들 산뜻한 웃음기 보인다면야

 

아픔을 깁는 거라면

삶에 애착을 피울 거라면

 

잘 풀어진 실뭉치 아끼던 골무 뭐든지 언제라도 준다

 

기꺼이 내어놓는다

플로라의 반짇고리

 

봄꽃과 함께

새살도 같이.

 

*플로라 : 로마 신화에 나오는, 꽃과 과실과 풍요와 봄의 여신

 

 

 

 

 

[은상] 꽃다발과 포승줄 / 이순호

 

 

꽃다발의 리본을 푼다

접힌 종이 위로 푸른 줄이 꽉 매어져 있다

꽃에게서 햇빛을 억지로 떼어 낸 줄과 종이가

몇 겹으로 둘려있다

 

이 꽃들의 죄는 무엇일까

포박의 자국이 분명한 곳에 줄기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포승줄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꽃은 알지 못한다

 

이제 막 봉오리 올리는 어린 꽃대를 붙잡아 매고

넓어지는 바람의 품을 휘감아 길들이던 줄들은

평소에는 늘 하우스 안에서 대기중이었다

줄의 강력함에

하우스를 기웃거리던 찬 바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었다

 

가위는 포승줄에 조였던 줄기를 잘라내고

시든 꽃송이를 골라낸다

햇빛도 바람도 어쩔 수 없었던 꽃은

향기를 탐한 죄가 있다

 

꽃잎들이 안간힘으로 남은 물을 올린다

올리는 물의 속도보다 시드는 속도가 빠르다

어쩌면 꽃은 빨리 마르는 방법으로

시간이 걸어놓은 포박을 벗어나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물은 어떤 도주가 가능할까

 

힘겹게 수액을 올리던 물관을 닫고 꽃은 탈주를 시도한다

색은 바람이 되어 가볍게 몸을 빠져나가 보기로 한다

 

꽃은 슬쩍, 햇빛의 부축을 다시 받고

오래된 뿌리의 기억에 불끈 힘을 준다

 

 

 

 

[은상] 바람도서관 / 주향호

 

 

달과 별도 숨을 멈춘 숲속 깊은 밤

혼자인 줄 알고 산 민들레 한 송이

바람의 가슴 안쪽 책갈피처럼 꽂힌다

이달의 추천 도서가 되어 북 수레에 실린 바람 따라

오늘은 민들레도 떠날 결심을 한다

얼굴을 들어 북 수레 너머 세상을 본다

두 발이 흙 속에 묶여 있을 때처럼

정지된 모든 것이 지나간다, 돌이킬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 뿌리가 있었으므로

떠나고 잊은 것은 민들레였을 가능성이 있다

잠시일지라도 머물다 간 새와 나비 그리고 구름

민들레의 심장을 두드리던 간절한 기척들이

적막만을 남겨두고 떠나던 날마다

해가 지고 꽃이 피고 별이 뜨는 곳에서

바람이 태어난 것이라는 서평을 읽는다

청구기호를 받은 바람이 서가에 가지런히 꽂히고

허공을 가르며 번개가 번쩍 빛나는 순간

불 켜지며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도서관

민들레를 읽어 줄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누·구·나

허공에 흩어진 홀씨처럼 바람도서관으로

입장한다; 검색어를 정돈한 하늘이

검색창에 ‘나’라고 치자, 사서 제한이 풀린 ‘너’의 얘기가

비로소 열람 가능해진다 

 

 

 

 

[은상] 잠깐만요 / 이청우

 

 

약수터에 가면요 빛바랜 산수유나무. 꽃송이 몇

연두 빛 새 잎 뒤에 아직도 숨어 있고요

어제 온 비로 젖은 돌 틈엔 알 듯 말듯 꽃들이 배시시 웃어요!

물통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아래로 눈을 돌리면

이상해요 숲을 이룬 고층아파트단지 흰 모서리가

저녁 어스름에 스며들어요! 문득

밑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에 동공이 더 커지기도 하지요

잠깐이죠. 잠시 그 본모습을 드러내는 황금빛 모서리. 소란스러워요

둥지로 돌아오는 산새. 덤플 속 토끼나 들쥐. 새끼들

밥투정에 하늘도 저물어 가요

물통의 뚜껑을 닫으며 낮과 밤의 경계를 정해요

잎만 흔들리던 갈참나무가 몸 부풀려 하늘로 오르려하고

멋모르고 하산하다 치어죽는 날 숲의 가족들의 장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요. 낮은 오래 꽃피고 일몰은 길게 이어져요

서방정토 아미타불 반가사유 하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달같이 대한항공 A433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고 있지만요

 

 

 

 

[은상] 2월의 골목 / 이남호

 

 

고모는 골목입니다

 

덜 마른 빨래 냄새가 서성이는 담벼락으로 바람이 넘을 때마다

동네 개들은 떫은 소리로 짖어댑니다

 

오래된 이웃들이 떠났지만 낮은 지붕은 더 낮아지지 않았고

전봇대에 붙은 셋방 전단지처럼 술 취한 남편을 기다립니다

 

그늘보다 먼저 늙은

그녀의 등줄기로 울퉁불퉁 겨울이 지나갑니다

 

이제는 걸음 뜸해진 길

며칠을 붙여 냄새 빠진 파스처럼

볕이

창문에 머물다 갔습니다

 

머잖아 봄일 텐데,

병상의 고모는

골목 깊은 곳에서 삭지도 않는 2월입니다

 

 

 

[동상] 지금 당신과 나의 거리 / 송남순

 

 

겨울의 끝자락에서 가장 뜨거운 기침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한 뼘 마스크 안에서

한 뼘보다 넓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입을 가리고 새로운 호흡법을 익힌다

입술이 사라진 자리에서

더운 숨은 갈 곳을 잃고

 

나는 매일 당신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

당신의 안부를 묻는 가장 먼 이웃이 된다

 

한 손을 뻗어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때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화면은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창이 된다

말들이 빗방울처럼 또렷한 무늬를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리는

매일 닦아내는 물의 양

 

한 조각 휴지를 흠뻑 적시는 물기가 마음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쉽게 휴지통으로 버릴 수 없는 온기

 

맑은 날이 올 것이다

우산처럼 둥근 간격을 언젠가 고이 접어둘 날이

 

봄이 오고 가로수가 울창한 그늘을 심는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한한 가지를 뻗는

가로수의 간격으로

푸른 포옹으로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다.

 

 

 

[동상] 소라의 빈소 / 임승환

 

 

비가 그친 하늘에 썰물이 무너뜨린 낮달의 어깨가 보입니다 뻘에 발자국을 남기고 소라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그때 소라는 나선형으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소라의 발자국은 어머니의 내비게이션이 됩니다 소라 같은 주먹을 쥐고 사는 어머니는 늘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밀물에 휩쓸려 달려갔던 새끼는 뻘에 쳐둔 그물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그물 밖에서 어미가 낮달 같은 얼굴로 바라보다 쓸려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부는 동네에서 자비로운 사람이었으면, 알맹이가 빠진 낮달이 물결 위에서 일렁입니다 점점 커지는 파도소리는 껍데기만 남은 어미의 귓속으로 걸어 들어간 새끼들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희미해진 낮달이 마침내 그물처럼 잡고 있던 바다를 놓치고 밀려오는 구름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바지락처럼 달그락거립니다 모든 게 쓸려갔는데 소라는 아직 뻘에 박혀 있을까요 구름을 흉내낸 포말의 시간입니다

 

소라를 줍던 갈매기들이 공중에 떠 있는 한낮, 어머니가 낮달을 물에 헹굽니다 쪼그리고 앉아 햇볕에 갇혀 있던 나는 그제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귀퉁이가 깨진 소라 주먹을 잡자 어머니의 얼룩진 어깨에서 쏟아진 물결이 해반닥거립니다

 

 

 

 

 

[동상] 어머니의 가을 / 김진희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조용한 대문간

삭은 감나무 어깨 슬쩍 건드려만 보고

뒤안 언덕배기로 곧장 올라서는

어머니에게는 늘 지나가는 바람

 

- 아랫집 누구네가 죽었단다

아프다 하더니만

글쎄 그래 금방 갔네

저어기 저기가 그 집 밭인디

사람 맴이 참 이상도 하지

밭고랑에 서 있으믄

흰 수건 감은 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무어라 아득하게 부를 것만 같어

내 이 밭에 혼자 오기 겁이 난다

 

고구마 줄기는 치렁치렁 넝쿨지고

마른 대궁들 사이 흰 도라지꽃 드문드문 일어섰는데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와

어머니 머릿수건이 잠깐 들린다

 

- 이런 바람이 불믄

저 아래 논배미 가진 사람이 부러워 야

그 맴이 오죽 든든할까

저 누런 것들을

다 내 것이다 품고 있으믄

하루 세 끼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겄다

 

고요한 산그늘

아랫논에는 맴맴 도는 잠자리

 

- 그만 내려가자

느그들도 왔으니

일찌감치 저녁이나 해 묵어야제

 

또 바람이 분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낡은 뒤축에서

툴툴 털려나는 흙먼지

머릿수건으로 훔쳐내는 골 패인 얼굴 위로

오늘은 뉘엿한 가을 햇볕 한 조각 얇게 펴진다

 

 

 

 

 

[동상] 소래포구에서 / 김대환

 

포구에 갇힌 바다는 오랫동안 안개를 끓이다 식으면서 강이 되어간다

안개와 비린내가 비벼진 갯 펄이 고깃배를 묶어두고 있는 사이

밧줄을 지팡이 삼아 찾던 것은 강일까 바다였을까

 

포구에서 시간은 수직으로 흐른다

가라앉은 모든 것들은 이미 경계를 잊은지 오래다

물은 바닥을 보일 때 가장 깊이 흘렀음을

갯펄이 바다의 손을 놓을 때쯤 강의 이름으로 살아갈 뿐임을 안다

 

포구에서 추억은 젓갈과 함께 삭아간다

유년시절을 닮은 작은 꽃게들이 튀겨져 집게등에 걸린 오후

이제와 파도의 무덤곁에서 팽팽히 울던 바람을 붙잡고

내청춘의 실향민 같은 멸치떼들에게 다시 묻는다

강에서는 어떻게 파도를 숨기며 살아가야하는지를

숯불에 등 지지지다 은빛 날개까지 태워버린

전어의 냄새가 그물처럼 퍼지는 어시장

 

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염전위에 남은 한줌 소금을

기억속에 차근차근 녹여내는 일이 아닐는지

낯달을 데리고 나온 갈매기들이 자맥질하며 터진 그물을 깁고 있다

협궤열차는 바퀴없이 그곳에서 사는 법을 알 듯이 통통배가 들어오기 전

먼저 바다가 만선이 었음을

강이되어서야 알것같다

새처럼 앉아 지저귀던 나무 이파리들이 소래철교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동상] 엄마의 버스정류장 / 조기봉

 

 

무거운 그릇 보따리를 

훈장처럼 이고 산 엄마 

 

그 보따리를 자전거에 싣고 

나는 뒤뚱뒤뚱 정류장으로 나섰다

 

보따리를 사람처럼 태우고 

짐짝처럼 실려 장터로 떠난 엄마

 

나는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 서서

다시 올 버스를 기다린다 

 

 

 

 

[동상] 갈치와 장미 / 암영희

 

 

갈치 트럭이 확성기를 켜고 장미 울타리를 돌고 있다

안 사요 안 사 우리 손녀는 가시에 잘 걸려요

 

그렇지, 갈치는 가시의 편이고 헤엄치고 어울려 사이가 좋지

갈치는 핑계대기 좋은 가시를 뼛속 깊이 사랑하지

 

뱉어내고 피해야 했던 뾰족한 것들의 오랜 버릇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스티로폼 박스 안의 갈치는 칼날처럼 떨고 있다

가시는 겁에 질린 무른 무른 살이 녹을까 봐 촘촘히 붙들고 있다

 

갈치와 장미가 섞이기 좋은 오후 다섯 시

핑계대기 좋은 가시와 체념하기 좋은 가시가 서로 찌르더니 이내 

농담하고 위로한다

 

아마 내가 당신의 풀덤불을 지나갈 때

넘겨다 볼 수 없었던 굵은 가시도

실은 그냥 가시

오래 아프지 않을, 삼키면 삼켜지는 것이었는지도

 

가시에 걸려 울먹이는 나에게

할머니는 밥숟가락 위에 취나물을 두툼하게 올려주셨지

 

 

 

 

 

[동상] 봄을 기다리는 병실 / 김두길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발소리가

병실의 문 틈으로

신문지처럼 얇게 접힌 새벽을 밀어 넣는다

 

두꺼운 잠을 덮지 못한 환자들은

살아 있는 분량만큼만 눈을 뜬다

 

벌써부터 상반신을 벗은 만년필이

환자의 몸 속에

문장보다 긴 통증을 받아 적고 있는 아침

아침 식단은

씹을 것도 없이 잘게 토막 낸 차가운 수액이다

 

병실 안은 해열제 몇 알과

봄과 겨울의 체온이 뒤섞여 미지근하지만

온통 겨울투성이인 환자들의 날씨

면회객들이 돌아간 뒤에도

아직 떠나지 않고 창에 모여 있는

핏기 없는 햇살의 발목들이

아직 춥다

 

‘쾅’ 해머처럼 어디서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그놈의 봄은

도둑처럼 살며시 스며드는 걸까

최근에는 수족냉증 환자의 몸 밖에 있는 꽃도 가끔 기침을 한다

 

오랜만에 빵처럼 잘 부풀어 오른 오후였지만

환자의 기분을 찔러버린 주사 바늘

기분이 정상치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한 환자에게 처방했다

파릇파릇한 인턴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봄을

빌려서

 

 

 

 

 

[동상] 다 망쳤다 / 강우성

 

 

우리 집 마당 앞산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배꽃 가득하다

참새, 까치, 까마귀, 꿩, 딱따구리 찌르레기 운다

 

비 오면 한 폭의 그림 같다

 

언제부턴가 송전탑들이

까만 줄을 늘어뜨린 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쭈그리고 앉아도

까치발을 들어도

허리를 숙여봐도

 

시커먼 줄들이

좌-악, 좍 그어져 있다

 

예쁜 그림 다 망쳤다

 

 

 

 

[동상] 외줄 타는 사내들 / 허석천

 

 

황사처럼 뿌연 아침안개 속

높은 고층건물 외벽에

두 사내가 외줄 하나씩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페인트통 두 개 차고앉아서

큰 괘종시계의 추처럼

슬픈 곡예사의 외줄 인생을

묵묵히 타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회색의 콘크리트 외벽에

레몬색깔 행복을 그려가고 있다.

오르려

오르려 하는 오늘만의 세상에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외줄 타는 사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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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독도의 기도 / 송택경

오늘도 방문객이 재잘거리며

설렘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내 품으로 들어섭니다.

국토의 막내를 대할 때마다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환한 미소로 웃을 수 있게 하소서.

바다와 바람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담담하게 들려주는 역사처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일본이 억지 주장을 되풀이할 때마다

한반도 사나이들의 씩씩한 기상을 닮은 파도처럼

왜곡된 역사를 강력히 규탄할 수 있게 하소서.

힘들고 어려운 위기를 맞을 때마다

한반도 아가씨들의 따뜻한 마음을 닮은 갈매기처럼

가슴 가득히 품을 수 있게 하소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마다

나라 사랑의 마음이 아름다운 무궁화처럼

건강한 가슴마다 영원히 피어나게 하소서.

행여나 누구든지 잘못된 생각을 가질 때마다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항구의 등대처럼

따뜻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방문객이 재잘거리며

애국심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내 품에서 나섭니다.

[당선소감] "2003년 첫 입도…웅장한 자태에 취해 詩로 표현하곤 해"

"물 위에 뜬 독도 Korea가 떠오른다."

2003년에 독도 관련 단체를 통해 처음 입도했습니다. 그리고 독도의 웅장한 자태에 취해 자주 시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독도 사랑의 씨를 뿌리고 가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에 놀란 마음이 지금도 두근거립니다. 앞으로 독도 수호를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렵니다. 물 위에 뜬 독도처럼 Korea가 세계 강국으로 떠오를 날을 기대합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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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정재식(시·부산) 

◆특별상 △류미월(시·경기) △박찬희(시·인천) 

◆특선 △시부문= 이생문(경기) 성정희(인천) 임석(울산) 정은주(경주) 김지영(포항) 용원(경기) 박한규(포항) 한명희(창원) 안경희(대구) 고병준(진천) 이영숙(안동) 김완수(전주) 이은영(울산) 박봉숙(구미) 문경선(제주) 방민영(인천) 정광근(진주) 최영희(부산)

[특선] 꿈꾸는 섬, 독도 / 김재호

 

 

모두 깊이 잠든 순간에도 부릅뜬 두 눈으로

첫 하늘 새 아침을 여는 섬

한반도의 막내이자 우리의 희망둥이

가슴에 품고 싶어도 차마 품지 못하고 

안타까이 바라만 보는 섬 

그립다 노래를 부르고 심장에 새겨도 

그리운 섬

죽도竹島라는 출처불명의 오명에도 굴하지 않고 기개를 빛내는 

쪽빛 물결이 한없이 그윽한 어머니의 품 같은 섬

수천수만 년의 시간을 당당히 버티어 내며

천상천하에 우뚝 솟은 절개

동과 서로 나뉘었으되

형제의 끈끈한 정은 깊은 물속에서 변함없이

한뿌리였음을 확증하니

삼 형제 굴바위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며 속정을 깊이 나누고 있으리라

푸른 하늘을 품어 넉넉한 가슴이요

심지가 깊어 감싸지 못할 바다가 없으니

혼란스러운 세상사 파도에 실어 보내고

두루미 꽃에 맺힌 어부의 노래가 

소금꽃으로 환생하리라

은빛 비늘을 물어 나르는 괭이갈매기 한쌍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파도는 섬지기 청년의 잠을 다독이고

삼봉三峰은 성난 파도를 엄중하게 꾸짖는다

기어이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통통거리며 어군을 찾아 나서는 어부의 희망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닷길이 멀다 한들 

백두에서 한라 까지랴

동해의 끝, 막내는 오늘도 간절히 두 손 모아

맏형이 통일이 되어 상봉하는 그날을 염원한다.

◆입선 △시부문= 김태준(서울) 고분임(구미) 서상규(인천) 최종만(대구) 이병숙(경기) 김미향(당진) 남호태(부산) 손병흥(부산) 정연숙(칠곡) 김태희(경기) 박봉철(부산) 박명호(칠곡) 정관근(진주) 박성수(광주) 김귀하(안동) 김만옥(부산) 심진아(삼척) 최운선(서울) 김연옥(경기) 고훈실(부산) 양성자(용인) 김귀순(안동) 김유식(부산) 유지호(서울) 황인술(포항) 유나경(진주) 최세환(광주) 최자영(영양) 유재희(대구) 

[심사평] "다채로운 표현기법 눈에 띄어…예술적 가치 한껏 느낄 수 있는 수작 많아"

동해 한가운데 있는 섬, '독도'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자 소중한 자산인 섬이다. 제12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은 독도, 울릉도, 동해 바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문화적 가치, 역사의식을 널리 알리는 뜻깊은 행사다.

올해는 3천800여점의 작품이 접수됐다. 심사에서는 장르가 다른 예술 부문이 함께 경합을 벌이므로 선별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다. 최대한 골고루 배정하려고 노력했으며, 각 부문에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의 공정한 심사로 운영됐다. 또 행사의 목적과 취지,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가 주제에 얼마나 녹아 있으며,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데 중점을 두고 평가했다. 상위권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미술은 독도에 대한 역사성의 이해도가 높은 작품이 많이 출품됐다. 재료나 기법의 다양한 시도가 눈에 띄었다. 문학에서는 독도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미래 세대에 대한 깨우침을 담담하게 비유를 통해 서정적으로 잘 그려냈다. 서예 부문의 경우 초등부는 판본체, 중고등부는 궁체가 주를 이뤘다. 획과 필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정성을 들여 노력한 점은 높이 칭찬한다. 사진 부문은 화면 구도의 다양화, 피사체의 세부묘사와 변화 등 다양한 작품이 출품됐다.

다만 심사에서 부분적으로 표절과 형식적 표현이 된 작품이 다소 눈에 띄어 아쉬웠다. 그러나 표현의 기법과 다양한 소재의 선택, 역사적 사실을 현실적 이미지와 융합, 사물의 은유적 표현 등 다양한 방법이 눈에 띄어 예술적 가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수작이 많았다.

수상자분들에게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쉽게도 낙선한 분들에게는 차후 독창적인 내용과 완성된 작품으로 다시 출품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 심사위원장 조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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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와 비닐 / 배한봉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심해에 사는 고래가

숨을 헐떡이며 해변으로 떠밀려 와 죽은 까닭을.

 

그런데도 우리는

과자의 비닐봉지를, 쇼핑비닐봉투를, 온갖 종류의 비닐을

날마다 쓰고

날마다 버린다.

 

온갖 색깔의 음모들,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썩지 않는, 질긴 혀를 내민 권모술수들

 

생활 속에 뿌리를 감추고 번성해 무기가 되려는 욕망들

 

칼처럼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폭탄처럼 터지지 않으면서도 목숨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나는 소화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본다.

 

버려져 없어지는 것이 아닌

주검이 되어 살아 돌아오는 끈질긴 욕망

아무런 마지막 비밀도 없고 끝도 없는

행로와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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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활짝 핀 꽃 외 4편 / 김이응

 

엄마는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말했다

 

초경을 하지 않은 계집애들과 몽정 없는 사내애들이

숨바꼭질하던 무싯날,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껌 씹는 언니들이 육낭거지 팔 때,

술래의 딸꾹질이 때맞춰 날 때,

 

고드래뽕이라며 한 마장쯤 내달리다

도깨비고비에서 넉장거리로 무너지던 저물녘

아카시아 단내가 이마를 스쳐올 때,

 

물음표를 떼어내며 첫사랑에 눈뜨던 초여름은

웅덩이마다 도롱뇽이 슬어놓은 알알이 몽글몽글해

무덤 많은 논틀밭틀로 질러가던 내 발소리에 놀라

오줌 지리고 돌아온 밤

 

담 없는 그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잉큼잉큼 뛰는 아랫배도 숨길 수 없어

너른 변두리로 쏘다닐 즈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아까징끼로 가슴팍을 문대던 엄마

 

아가씨야 가시에 찔렸다며 말 더듬던 내 동생

딸꾹질이 뚝 멈췄을 때,

 

질겅질겅 씹던 껌을 삼켜버린 무싯날은

내 몸에서도 아가씨 꽃 지린내 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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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게르한스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파 말기입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X번째 투시 그림입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산호초 같기도 하고

썩은 과일의 씨앗 같기도 한

폴립들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여기

이 섬이 랑게르한스죠

 

달력에서 달아난 어느 일요일 오후

 

그림자에

쫓기던 화가는

내분비선에 실린

옛 애인의 검은 양산에 놀라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흥건해진 손바닥으로 피하지방층을 가리려 했다지만

 

자율신경계의 교란이란

단맛에 길들여진 원숭이의 눈썰미엔

어쨌거나 달달한 포도당의 장난인데

 

창녀의 웨딩드레스처럼 부푼

유령해파리

 

촉수처럼 뾰족한

바늘로

찔러댄

셀 수 없는 우점종들

 

보호색으로 가릴수록

빛에 빛을 더할수록

도드라지는 그늘에서

 

화가의 엉덩이가

바나나처럼 짓무르고 있습니다

 

피사체의 해부학 시간,

 

마취된 카메라

동공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십이지장에서 비장까지

리아스해안선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복제하셨습니까?

그럼, 캔버스에 사인해주시지요

 

 

사라진 옥상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언니들은 섬, 구름, 섬, 구름을 부르며 구름을 더 좋아했다

나는 발, 구름, 발, 구름을 굴리는 언니들이 더 좋아졌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날에도 언니들이 웃는다

바다 끝까지 간 사내는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믿으며

섬, 구름, 섬, 구름처럼 들뜬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구름다리를 건너다닌 옛날을 떠올리며 빨래를 밟으며

나도 옛날에 어린애였단 건 믿을 수 없지만 믿음직한 언니들은 껌을 씹는다

어느 호주머니에서 한숨이 빠져나올지 모르는 아주머니처럼

풍선껌을 부풀리다 손톱으로 터뜨린다

 

해바라기보다 키 큰 바지랑대 사이로 몰려다니는 먼지들

그 사이로 마르는 빨래들, 언니들은 마르지 않고

네 시가 되면 어째서 이 빠진 접시 같은 기분에 젖는지

접시꽃과 헷갈리는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수록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빨래가 젖는다 비옷이 없는데도 언니들은 더 이상 젖지를 않고

비 맞은 비웃음은 쓰지만 쓴웃음은 소리가 없는데

실소로 번지면 황혼이 올까? 황혼은 종기보다 더 잘 터질까?

그녀들이 웃는다 요실금 터진 할머니처럼 찔끔찔끔 웃는다

 

어느 그림자가 먼저 추락할지 모르는 초저녁

헤프게 웃던 언니들은 나팔꽃처럼 축 처진 외줄을 타고,

 

구름, 빵, 구름, 빵, 노래하다 사라진 그녀들은 언제나 빵이 더 필요했다

 

 

추파춥스

 

 

입술이 달려간다,

 

사랑을 받으러

혀를 밀고 들어간다,

 

맛의 자기장으로

추파!

 

불알을 꼭 쥐고

두드리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한 옥타브

실로폰의 행성들

 

살살 녹는 이것은 사탕이 아닌 사랑

색깔로 흥행을 점치는 이것은 사탄이 아닌 사랑

 

발상의 궤도부터 다른

삐딱한 달리*처럼

입자가속기에 태양계를 넣고

돌린다

 

혓바닥의 미뢰로 떨어진

별똥별은

쪽, 쪽, 터져

운석들의 달달한 스캔들은

은하수로

쫙쫙~

퍼져

 

두 볼이 부푼다,

 

젖꼭지를 빠는 힘으로

알을 삼킨

아이들의 꿈이 팽창한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여름 들판의 사탕수수처럼

사르르 녹는 사카린의 핵융합으로

붉은 데이지의 꽃술과 고양이 성운의 푸른 눈에

침을 바른 거짓말로 완벽하게 포장되는

 

삼킬 수 없는 추문!

살릴 수 없는 추락!

 

명왕성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이빨 빠진 아이들이 문상 온 날,

 

이것은 끈끈한 설탕의 죽음

이것은 뼈대만 남은 태양의 주검

 

실눈 뜬 아이들 머리 위로

개미 떼가 몰려든다

 

* 막대사탕 ‘추파춥스’의 포장지 로고를 데이지 꽃으로 디자인한 살바도르 달리 

 

 

 

물집의 성분

 

기분 따라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꽃밭,

그곳은 무섭게 고요했다

 

고요는 물끄러미의 동사,

곧 축축해지는 건조체였다

 

엄마는 활짝 핀 꽃을 옮겨

현실을 허구로 바꾸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날마다 내 귀에 꽂은 것은

바람,

 

곧 시들해지는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화였다

 

그래도 그곳은 꽃의 무덤,

눈물을 부어주면

신기루처럼 젖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는

부끄럼이 많고

부끄러움은 구멍 난 빤스 같았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어보는 엄마도

가랑이 사이에 낀 빤스 같아

구멍 많은 오아시스에

엄마를 꽂았다

 

너, 그렇게 살면 세상이 좁아져,

꽃들이 농담을 했다

 

피부가 차갑고 투명한 농담,

썰렁한 사후경직이 일어났다

 

진짜 같은 조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엄마는 죽어서도 엄마 같았다

 

다래끼를 터뜨렸을 뿐인데

구멍마다 엄마가 새어 나왔다

 

몽정처럼 부드럽게

 

 

[수상소감]

 

오래된 핸드폰은 자주 꺼진다. 핸드폰에 배터리를 연결해놓아도 금세 충전이 되지 않는다. 다급한 전화가 올 일 없는지라, 뭔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핸드폰이 꺼져 있어도 무심할 때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낯선 번호가 떠 있은 걸 발견했을 때는 핸드폰보다 더 오래된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충전을 해두었기에 그나마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통화음 다음으로 낯선 남성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여성분이시네요. 저는 이름 때문에 남자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네. 제 본명이 좀 그렇죠. 하지만 제 시는.......” “아뇨. 시도 중성적인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원고를 보내면서 즉흥적으로 만든 필명이 떠올렸다. ‘김이응’ 34대 종손 집 맏딸로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성은 버릴 수 없었고,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성은 꼭 넣고 싶었다. 하지만 두 개의 성 다음엔 뭘 넣지?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따라가니 답은 쉽게 구해졌다. 그리고 <시산맥>신인문학상에 응모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름을 썼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시를 발표할 때마다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될 줄은 전혀 예상은 못한 채 말이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 문학 공부를 시작할 즈음부터 내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이름으로 불려본 적 없는 괴물이 되면 사람들의 세상이 낯설게 보일 듯싶었다. 하지만 ‘괴물-되기’는 슬프고 외롭고 심지어 억울했다. 입이 있지만 정작 입을 열어야 할 때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에둘러 처음 문학에 입문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곳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연애 시편들과 함께 하는 봄날이었지만, 내 시를 읽어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봄날마저 떠났다. 그래도 여름날은 용케도 찾아와 비교적 젊은 내게 아동문학이란 밝은 옷을 건네주었지만, 나로서는 제아무리 잘 골라 입어도 어쩐지 빌려 입은 남의 옷만 같았다. 결국 나는 훌훌 벌거벗고 조용히 숲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한편 두려웠던 가을 숲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알아챌 수 없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시는 나다워졌을까? 쓰면 쓸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핸드폰을 바꾸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바꿀 생각이 없다. 이상한 고집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실은 시라고 끄적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벗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돌고 돌아 어렵게 되돌아온 원점인 시(詩) 마을에서 언젠가 찾아올 겨울을 맞이할 생각이다. 홀로 걷고 있던 내게 이름을 묻고 도반이 되어준 <시산맥>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뒤처져 걷고 있던 내게 관심을 가져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당선 소식에 그 누구보다 기뻐해 준 엄마가 잘 걷지 못하신다. 한 가지 놀라운 건 내가 시 쓰는 걸 그 누구보다 반대했던 아버지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내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그 두 분께 ‘김이응’을 소개한다. ‘응이라고?’ 되묻는 막냇동생 내외의 목소리는 환청일까? 바라건데, ‘고모가 김이응이야?’ 라고 확인할 조카들에게 내 시 역시 수수께끼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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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 외 4편 /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 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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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칼을 쥔 바람의 이름

 

무엇을 떠올리든 자유다 부신 금발의 북유럽 여인이나 열도 소녀의 애살맞은 이름 같은, 떠오른 생각에 돌을 매달아도 자유다 들고양이가 세 발로 오후 세 시를 유유히 건너가고 있었다 외진 마음 몇 자락 슥슥슥 베고 가는,

 

여리박빙의 나날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휩싸인 계절의 막후는 뼈저리게 앙상하였다 나무가 털리고 가계엔 금이 가고 간유리가 박살나서, 나는 강으로 달려가 살얼음이 되었다 등뼈에 성에꽃 새겨 넣던 그믐이었나, 어디선가 쩍 손목을 긋는 얼음장 조각조각 찢어진 손바닥 돌멩이처럼 굳어가는 혀

 

어른과 어린, 같은 말을 꺼내서

착한 피라미와 버들치의 아가미에 던져주면서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슬픔을 오래 되씹는 습관

 

딱딱해진 과거를 깨물면 이유 없이 혀끝에서 피가 났지

월동이란 한철, 어딘가 심장을 대신 보관할 곳 없을까

 

누군가 번호판 없는 오토바이를 갈대 수풀에 버렸다

 

반지하 자취방 쪽창에 들이치던 소나기처럼

잊을 만하면 나를 두드리는 당신,

날아가는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에이다,

 

 

햇살 요양사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시큰시큰 쇳내 나는 이름. 종신보험같이 오래된 그림자만 몇 차례 뙤똥뙤똥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늙은 나무라고 늙은 꽃을 피우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해요. 저녁이면 손끝에 경련이 일어요. 쇠줄 묶인 백구가 등 휘도록 텅텅 적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벚꽃뱅어

 

황사는 웃었고 마스크는 울었다 꽃가루가 입술을 틀어막자 쿨럭, 창(窓)은 비염을 앓았다 구름의 등뼈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직진해야 하는데 좌회전 차선에 들었다 칼날 뒤집으면 칼등에도 꽃은 핀다고 밀어서도 당겨서도 문은 열릴 수 있다고, 라디오 주파수에 쑥물빛 짱짱 꽂혔다 때아닌 우박이 네이버 속보에 쏟아졌고 둥글둥글 파문에 우산처럼 접혔다 펴지는 마음, 무르팍 당겨 앉은 바람이 슬쩍 악수를 청하면 수당 받으러 온 실직자처럼 쭈뼛 보리이삭 패는 사월,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하노, 그 덕에 미싱을 빨리 돌렸고 내력만큼 답답한 산소마스크 낀 누이는 마침내 식물이 되었다 녹색 심장을 가진 봄은 빚쟁이처럼 몇 번 더 찾아왔고 까무룩, 노모는 웃음이 무거워 자주 발등을 찧었다 절정의 계절에 강으로 돌아와 알 낳고 죽는 벚꽃뱅어처럼 세상이 다 웃는 봄 같아도 누구나 울음 한 바가지 늑골 깊이 쟁여두고 사는 것을, 목단 이불에 찬밥 쑤셔 넣던 기억의 아랫목에 보내지도 잡지도 못할, 누이여!

 

 

 

피싱*

 

1

낚싯줄 묶인 독수리 모형이 포도밭에 떠 있다. 바람이 얼레를 풀자 낚싯대 끝이 팽팽하게 휜다. 솟구치는 독수리. 펄럭이는 독수리. 파르르 공중의 낱장이 찢긴다.

 

―낚고 있습니까, 날고 있습니까?

 

바람이 빠지자 몸을 접는 풍선 인형처럼 연출이 끝난다.

 

2

수화기 속 검은 목소리 사람을 낚는다.

 

우체국입니다 검찰청입니다 말씨가 좀 어눌합니까 믿으세요 믿으라니까 당신의 자식이 납치되었습니다

 

미끼를 최첨단으로 갈아 끼우고 카톡을, 메시지를, 대화를 가로채겠습니다. 엄마가, 언니가, 애인이, 절친이 되겠습니다.

 

돈 을 부 치 세 요 제 발 돈 을 부 치 세 요

 

그놈 목소리가 독수리 타법을 쓰고 있다.

 

3

독수리 허수아비가 못 미더운지

농부가 그물망을 치려고 밭두렁에 말뚝을 박고 있다.

 

* 피싱(phishing) : 전자 금융 사기 

 

 

[수상소감]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시가 오고 있어요

 

나의 동선이 형편없어졌어요. 어제는 현관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걸요. 여기와 저기, 경계를 지워버린 눈이 녹고 있어요. 녹아내리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아픔. 시골버스가 길가에 멈춰 노파를 태워요. 승강장이 아니어도 버스가 설 것이란 짐작.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어느 모퉁이를 돌아 시가 오고 있다는 생각. 결국에는 내게 당도할 것이란 믿음. 그렇게,

 

별안간 당선 전화가 날아들었어요. 멈춰버린 듯 아닌 듯. 일순의 떨림. 콩켸팥켸 가슴팍에 붐비는 기억들. 벽지를 더듬고 간 웃풍이었나, 떠난 아버지의 마른기침이었나. 가난한 유년의 풍경이여. 설움 훔치던 어머니의 차가운 아궁이여. 함부로 내질렀던 청춘의 시퍼런 주먹이여. 생의 살점을 물어뜯던 병마여. 고마웠어요. 남천 생울타리 눈시울이 붉어요. 덜렁수캐같이 밖을 서성거렸던 나의 부재여. 남편이여, 아빠여, 둘러보면 없던 이름이여, 시간이여. 미안해요. 내 사람의 둘레가 조금 환해졌으면 해요.

 

장하빈 시인님. 별사탕 한 개로 詩作한 일이 이렇게 커졌어요. 오래 걸려 멀리 에둘러 왔네요. 불필요한 게 때론 필요했나 봐요. 덕분에 모서리가 많이 닳았어요. 다락헌(多樂軒) 마당귀 꽃무릇은 땅속에서 한겨울을 애태우고 있었겠지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도록 등을 미는 바람처럼, 나에게 시의 배후가 있다면 당신입니다. 현대시의 낯선 언어를 접하게 해주신 변희수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수요일마다 함께 시를 매만지며 꿈을 키웠던 다락헌시인학교 문우님들. 여기까지 절반의 걸음은 그대들 몫이에요. 부족한 시를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산맥에게 지금부터가 시작, 이란 다짐으로 감사의 말을 대신할게요. 언제나 시의 발치에 있겠습니다. 오늘은 자작나무 서늘한 눈매를 보러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럼.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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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4편 / 한상신

 

아스피린 한 알을 물과 삼켰는데 물만 넘어갔을 때

내가 다시 유리컵에 물을 따라 들고 있을 때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

 

나의 하루는 자주 500mg짜리 흰 두통이다

 

염전의 외딴 소금창고를 닮은 밤에 대해

항상 증거가 불충분한 나의 생활에 대해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 불면 그 미제사건에 대해

어차피 기록을 남길 수 없으므로

 

아스피린이 비명도 없이 동그랗고 조그맣게 추락한 후

 

내가 소금기 마르듯이 잠이 든다면

신기루를 스쳐 아스피린 몸피들이

잠속인지 잠 바깥인지 알아차릴 때까지

내가 빈 책장처럼 딱딱하고 허전하게 잠이 든다면

 

내일 아침에 어쩌면 어제 아침에 내가 아닌 것처럼 깨어나

여기가 어디죠?

마리앙투아네트 증후군처럼 하얗게 증발하며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처럼

내가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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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불을 켜니까 발목이 번진다

나는 어깻죽지 툭툭 털며 빗소리를 벗는다

늘 먼 곳에서 검은 마스크를 쓰고 오는 빗소리

신발장을 열고 빗소리 닫고

 

비에 젖은 운동화 뒤축이 어둡다

운동화 끈을 잃고 끈 구멍이 사라지고

빗소리 몇 모숨이 실종되고 있다

미리 젖고 있는 어둠

푸른곰팡이 포자같이 번지는 어둠

 

발뒤꿈치를 조금 들어 올리는 빗소리

빗소리는 좀처럼 개체수가 줄지 않는다

 

재봉틀 같기도 하고 탁상시계 같기도 하고

연통 같기도 하고 무슨

가재도구 같기도 한 푸른곰팡이들로

빽빽한 오후 여덟 시

 

신발장 안에서 빗소리들이

켤레켤레 깊어지고 있다

신발장 앞에선 외딴 신발 한 짝의

어둠이 또 고요히 번식하겠다

 

 

첫사랑

 

 

물방울은 어차피 누드다

물방울들이 물방울들끼리 맨살을 마저 벗는다

 

물방울의 둘레와 둘레를 뺀 나머지

목선을 따라 환한 물방울은

 

물방울이 물방울에 물방울을 끼치다가

물방울 안으로 이내 사라지고 만다

 

물방울 옆에 물방울이 또 도진 후

물방울에 매달린 작은 욕조들

욕조를 욕조 밖으로 떨군다면

물방울 바닥이 더 깊어진다면

 

물방울 우듬지가

물방울 메아리가

물방울 아침이

벽의 줄눈을 타고 붐빈다

 

하마 동그랗게 아물지 않는다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

 

 

어떤 다홍

 

 

1

계단 모서리마다 이 세상을 뜨고 싶은 다홍들 가랑가랑 가랑가랑 어떤 가랑잎은

어떤 가랑잎보다 전신이 가벼워 먼저 떴다 가라앉았다 흔들 삐딱해가며 이디야 종이컵이 바람을 담았다 매번 쏟았다 계단은 계단을 혼자 떠나는 연습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2

계단 머리에 모과나무며 단풍나무는 제 이름들을 내려놓는다 바람이 불자 화단과 화단 사이로 다홍빛이 돌았다 삼색이 너 거기서 염을 하겠구나 다홍을 신고 다홍빛 해그림자를 덮겠구나

며칠 전 으슥하게 젖을 물리고 있던 삼색이가 오늘은 경계석 옆에서 벋정다리로 누워 있다 장의사가 관절을 다홍으로 덮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이제 편하게 가세요 몸에 힘을 조금만 빼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 입관이 끝나면 장의사가 빈소에서 육개장을 한술 뜨며 다홍빛으로 말할 것이다 몸을 주욱 펴주셔서 잘 모셨어요

 

그 발치께 있던 새끼들이 뿔뿔이 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기저기 다홍이 자꾸 샜다 계단이 묵묵하다 다홍의 무게중심이 허공에 잠깐 머물렀다 가랑잎 몇 개가 계단바닥에 떨어졌다

삼색이가 화단 안쪽 잡풀밭에 데려왔었다 발톱이 오이 속살 같은 새끼들을

 

 

메밀묵의 본론

 

 

도마 위의 메밀묵이 먹먹하다

한 모쯤 말하려 했다

메밀묵을 넘겨짚는다

메밀묵은 항상 아래쪽이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두 손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안 들려 안 들려

메밀묵을 농담같이 장미칼로 썰었다

도마 위의 메밀묵은 후미진 골목 만화방 전등 밑 같다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정만화책 곁의 순정만화책

무심히 우묵하게 엎드린 메밀묵

숭덩숭덩 썬 메밀묵의 어깨들이 끼리끼리 붐볐다

메밀묵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한 차례 더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메밀묵의 가로가 메밀묵의 세로를 용케 견디고 있다

 

 

[수상소감]

 

어렸을 적 커다란 바퀴가 두 개인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하늘로 구름처럼 날아오를 듯한 기분일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 졸랐더니 열 살이 되면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이 되어도 자전거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열병 같은 무엇인가를 저는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글쓰기는 그 자전거를 기억하는 한 방식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는 것도 없고 부족하기만 한 제가 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격려를 주셨던 여러 선생님들 덕택입니다, 늘 모자란 글을 읽어 주신 시 세미나 선생님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34년생 사랑하는 울 엄마, 관객이 많은 무대가 떨린다면서도 노래를 스스럼없이 열창하던 엄마처럼, 엄마의 딸도 용기를 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겠다며 머리 싸매고 돌아앉은 나를 애정과 근심으로 지켜 준 남편에게도, 자랑스럽게 잘 커 준 두 딸 지윤과 민지에게도 지면으로나마 고맙다는 뜻 전합니다.

 

제게는 개벽과 같은 당선의 전갈이 지니는 엄중한 무게를 온몸으로 기억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2020년 해를 맞아 일 년에 한 번 있는 계간 󰡔시산맥󰡕 신인상 심사를 온라인 무기명 원고로 하였다. 100여 명의 응모작품 중 예심을 거쳐 5명의 작품이 심사자의 이메일로 들어왔다.

 

1번 -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외 9편

2번 - 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9편

3번 - 그 외 9편

4번 - 내연(內緣)의 땅 외 9편

5번 - 가시를 바르며 외 9편이었다.

 

한 편의 시가 그 한 편으로서 스스로 움직이는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기본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더해 그런 무난함을 넘어 새로운 발견이든 정서적 극대화든 그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신인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시인이 언어의 운용보다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시 안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은 각자 추천 번호를 단톡방에 올렸다. 1번이 한 표(A 심사위원), 2번 3번이 각 한 표(B 심사위원)씩 나왔다. 심사위원은 다시 한번 1번 2번 3번을 읽으면서 꼼꼼하게 검토하였다. 마지막 1번과 2번으로 추리고, 고심 끝에 최종 수상자를 2번으로 결정하였다.

 

3번 - 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이 좋고, 자신만의 사유를 확장해 나가려는 방식에서 숙련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의 효과에 비해 정제되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표현들이 다소 아쉬웠다.

 

1번 - 의미나 맥락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무겁지 않고, 진지함보다는 사소함을 통해 핵심에 다가가려는 태도가 잘 읽혔다.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이미지의 운용이 활달하고 경쾌하나 한편으로는 가볍다는 혐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2번 - 마음에 어떤 움직임을 일으키는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그 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힘이 그것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에서 보듯이 서정적인 울림을 담백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비극적 세계를 따뜻하고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에 믿음이 간다.

 

이번 2020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수상자는 한상신 시인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그 첫걸음이 시의 진정성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산맥 안에서 기존 등단자와 빠르게 동화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본심 : 이화은 이승희 / 예심 : 조희진 최지원 김정현(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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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외 4편 / 한영미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면 빠져나올 수 있는 꿈이면 좋겠다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시어 빠진 김치 쪼가리로

후르륵 위장을 채운다

내비게이션 토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낯선 얼굴들이 모래 수렁에서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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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온 고양이

 

 

이빨과 발톱 세우고 울고 싶을 땐 언제든

울 수 있는 길냥이가 되고 싶어요

울 수 없는 시간이 낭만인가요

안락을 위해 몸을 둥글게 말아 가장

보드라운 털을 내어 주어야 하는 일과

희롱하는 손끝에도 냐아옹!

그대 기쁘게 하는 콧소리,

그때마다 털이 바짝 일어서요

손끝을 와락 물어뜯고 싶어져요

좋은 옷, 머리에 달아준 분홍 꽃리본

날마다 입김 불어 건넨 사랑한다는 말,

연애를 위해 시를 쓸까요 시를 위해

연애를 할까요

너는 나라는 말의 함정에 한 번쯤

빠져본 기억 있다면 누구든 알 수 있어요

이제 그만 소설적 진실*을 밝히고 싶어요

밤거리를 걸어요 온 털끝 세우고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걸어요

상대가 놀라도록 두 눈 크게 떠요

어두울수록 빛나는 광채

집 나온 고양이에게 더 이상

집은 필요 없답니다

 

*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차용.

 

 

굴레방다리

 

 

아현동 굴레방다리 하면 목줄이 떠오른다

둥근 모양이 세 개나 들어가는 아현동이란 지명이

입 벌린 사람들의 모습 같아서, 그들의 허기진 뱃속 같아서,

소가 벗어놓고 와우산으로 누웠다는 굴레가

골목 어디쯤에선가 나타나

기다렸단 듯이 목을 거칠게 잡아챌 것만 같은 동네

흑백 사진 속 배경으로 만나는 그곳에서

부모님의 목줄 덕으로 어렵게 대학까지 마쳤다

가난은 꿈도 사치라는 말을 배웠지만

철수된 고가 다리처럼 빠져나와 모두가 잘살고 있다

날마다 걷던 웨딩드레스 거리는 왜 그렇게도

퇴락한 슬픔이었는지,

조화롭지 못한 방석집과 한데 나열되어

흰빛이 눈처럼 순백색이 아닌 술집 여자들의 덧칠된 화장처럼

이물스러웠던 기억

밀폐된 어둔 공간을 찾아들던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의 술 취한 모습과

그들의 손을 잡아끌던 눈빛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화려한 여자들과 마주칠 때면

그녀들이 입을 먼 미래의 웨딩드레스가 궁금해지곤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여전히 웨딩 타운으로 화려한 동네

이따금 생각나는 곳이지만 그와 동시에 목부터 죄어드는 곳,

모두가 치열했던 시절이 재개발된 모습으로 지워졌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 

 

 

 

목관(木棺)

 

끝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지

책장을 넘기듯 무심코 지나가는 하루하루

난 나의 변화무쌍한 책을 읽느라

어느 날 갑자기 너의 책이

찢길 수도, 찢겨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치 못했어

오늘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다면

내일도 당연히 붉은 태양 아래 짙푸른 땅 밟으며

황금 같은 시계 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리라고 생각했어

날마다 안부를 묻는 건강한 목소리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도

인사도 생략한 채 보냈을까

꽃상여에 묻혀 떠나는 너 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빈 하늘 바라보며 바다만 그렸어

어디든 하나로 이어져 있으리라고

이제는 나란 책을 펼치면 매 페이지에

부록처럼 달라붙어 있는 목관과

짧은 한 줄의 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니콜라스 푸생의 그림 작품에 쓰인 글 차용. 

 

 

 

일대 일 대응설*

 

​꽃을 꽃이라 부르지 말자

세상 만물 이름 정해지지 않은 건 없다지만

밟고 가는 사람들에 따라 산길은 모양이 달라지지

없던 길도 눈앞에 펼쳐지고

있던 길도 초야에 묻혀 사라지기도 하지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듯이

네가 아는 나도 네 앞의 나일 뿐,

합목이 된 나무마다 비틀린 모양새를 보면

제각각 다르지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뜨겁게 타올라

엉켜 붙은 절정의 모습도 있지만

겨우 무늬만 하나인 채로 합목이라 불리는 것도 있지

상대의 손끝 아래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불감의 여자일 수도

가장 현란한 요부일 수도 있어

여기저기서 부르는 욕보다 못한 이름에 갇혀

그 값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꽃을 꽃이라 가두지 말자

오늘도 내일도 그 이름 밖으로 모두가 흘러가지

길도 나무도 강물도 그리고 너도

 

* ‘모든 사물과 개념은 일대 일 대응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상소감] 불편한 시와 손잡고

 

시와 오래된 연인처럼 살아왔습니다. 벅차게 가슴 뛰던 날도 있었고, 눈빛만 마주 보아도, 손끝만 닿아도, 하나로 소통되던 날도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고 머물러 주어 고마웠다고, 다정한 인사 건네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좋았던 시간보다 힘겨웠던 시간들이 많았지만, 주저앉는 순간마다 다른 의미를 생성해 빈손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던 숱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이번 등단을 계기로 십여 년 전,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모해도 열정은 살아 있었던 그때 정신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불편한 시를 쓰겠습니다. 지혜와 성찰을 통해 나 자신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비바람과 햇살과 삶의 유의미한 부스러기를 줍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온몸으로 시를 쓰라던 김수영 시인의 말을 떠올립니다.

자유하는 시의 정신과 삶이 한 몸이 되는 날까지 오늘을 에너지 삼아 걷고 또 걷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직접 전해주신 󰡔시산맥󰡕 대표님과 부족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먼저 감사 인사드립니다.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임정일 선생님과 허경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강산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함께해온 예술촌 선배들과 문우들 사랑합니다. 문향 가족, 소중한 곰시 동인 역시 동행이 든든했습니다. 직장 일과 시 작업으로 늘 바쁜 아내와 엄마를 한결같이 지지해 주는 내 소중한 가족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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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앞에서* 외 4편 / 박민서

 

 

벽에 찍힌 손바닥은 붉은 비명이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천천히 시드는 비명, 동여맨 손목들, 실핏줄처럼 아주 느리게 담을 넘고 있다

 

지문 없이 찾아갈 수 없는, 먼 시대를 떠돌고 있는 언어, 손가락마다 불꽃을 달았다 벽을 밀어내고 있는 기원이 종유석처럼 자란다 말이란 다 자라지 않으면 더듬거리는 법이다

 

손을 맞대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벽은 얼마나 오랜 연대가 시큰거리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흘러가는 지문들이었을 뿐

 

동굴처럼 웅크리고 있는 부족

손목을 관통하고 있는 터널

 

명칭을 나누어 가진 관계가 있었다면 한 손목을 잡고 위로하는 다른 손목을 볼 때도 있지, 손톱이 자라지 않는 손바닥 벽화, 마주보지 않고서는 손을 맞출 수 없어 여전히 벽을 향해 있다 두 번 다시는 접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았다

 

온갖 말들이 들락거리는 관절, 말은 모두 벙긋거리며 동굴을 지나친 것들이어서 악담과 정담이 함께 있다

 

며칠 악담으로 시큰거리는 내 손목이 아프다

 

* 스페인 북부 지역의 카스티요 산에 있는 동굴 속 채색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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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연필 한 자루엔

몇 개의 얼굴이 들어 있을까

남자가 더듬는 손끝에서

여자의 얼굴이 돋아나오고 있네

태초에 신의 말씀으로

천지와 동물과 사람을 지었다고 했으니

말씀은 검은색이네, 흑심(黑心)이네

신은 늙고

초라한 형상을 하고

마로니 그늘에 앉아서

제가 빚은 젊은 처녀를 힐끗거리고 있네

신의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필은 깎이게 되지만

지나온 것들은 평면이었네

자기 얼굴을 쓰다듬을 때는

난감하거나 피곤한 얼굴

손에는 표정이 묻어 있네

마른 빵을 맛없이 조금씩 뜯어 먹고는

- 지 어미와 꼭 닮았어

손이 기억하는 얼굴이 있었네

액자 속의 화분처럼

얼굴이 옮겨가는 것을 보았네

쓱쓱, 그가 도화지 귀퉁이에 리본을 긋네

여자가 뚜벅뚜벅

영안실로 걸어 들어가네

 

 

물소리

 

깊이 숨어 사는 물은 맑아요

끊어지지 않은 물소리는

장인의 솜씨

그곳이 물을 닦는 공장일 거라는

추측을 해보곤 합니다

 

물이 물을 닦는다는 소리

흘러가면서 앞과 뒤를 깨워줘요

 

물 주름을 벗겨내며

물을 닦는 바람을 바라봐요

태풍에 넘어진 나무의 잔영을

소소한 빗줄기의 흔적을

그늘에 구겨진 혼잣말을

누가 떠밀지 않아도

둘둘 말려가는 것을 봅니다

 

물이 물을 닦는 이유는 무엇인지

가끔 흙탕물 세제를 푸는 일도

구멍 난 나뭇잎 몇 장 띄우는 일도

물이 물을 닦는 일이에요

 

숨어 있는 물을 처음 만나는 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내 얼굴이 사실은

모두 처음 만나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 사이에 흐르면서 구겨지는

얼굴의 재촉,

되돌아가지 못한 소리들

얼굴은 가장 맑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했어요

 

손으로 휘이 저으면 생기는 물의 페이지

물이 내 얼굴을 닦고 있어요 

 

 

 

 

 

낱말 퍼즐게임

 

 

우리 두 사람은 H열 좌석에 앉았다 그도 나도 한(韓)이나 홍(洪)이 아니다 좌석의 엉덩이 자국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나의 첫 낱말풀이는 G열 왼쪽

첫 번째 칸에서 시작한다

 

저기 D열의 가운데 남자는 머리가 솟았으니 고(高), 뒤쪽 F열의 남자는 등받이를 발로 쳐대니 굽은 다리 장(張)이 분명하다 중간에 낀 E열의 여자는 팝콘을 한 주먹씩 입속에 넣으니 권(拳)인데, 주먹이 가득 찼다는 뜻일까 아니면 주먹을 부른다는 뜻일까 두 갈래로 땋은 머리 B열의 왼쪽과 투블록컷 머리 오른쪽과 입맞춤을 하니 호(好)가 맞다

 

눈동자를 굴리는 스크린은 우리 눈을 구슬처럼 가지고 논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은 적 없다

 

누군가의 머리와 나의 꼬리가 만난다 각각 생각이 다른 세로의 첫 글자와 가로의 첫 글자는 닮았지만 끝내 연결 안 되는 좌석이 있다

 

비어 있는 번호, 도무지 풀리지 않는 퍼즐 판, 빈 의자에 구름처럼 가볍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한 조각 퍼즐 속에 꽉 끼워져야 한다

 

가로와 세로를 따라가는 오후의 퍼즐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구는 이쪽입니다 뒤집힌 퍼즐 판의 낱말들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제의 미로

 

침엽의 미로에 서 있다

 

바람의 모양으로 무늬가 들어 있는 미로

아이는 헤매는 것으로 길을 부르고

울음으로 조형의 벽을 삼는다

 

키가 보이지 않는 정원, 길은 푸른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아이는 왜 작아지는 것으로 크지 않는 건지

젖이 아프다

 

젖을 물리는 순간 출구와 입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육된 정원은 모두 손등이나 손끝을 닮는다

뱀처럼 구부러져 있는 나무들

울음소리를 따라 점점 미로가 되어 간다

 

표정은 사라진 얼굴이 되고

대신 구겨진 미로들이 얼굴로 몰려든다

 

구부려 누운 잠은 계절을 보려고 하는 것

어느 틈에 자라는 전정으로 매듭과 키를 정한다

 

동맥(動脈)은 종착이 있는지

젖어버린 발바닥은 안 보이는 키를 자라게 하는 정원일 뿐

바닥으로 바쁠 뿐

 

울타리가 있는 정원은 갖지를 못했다

입구와 출구가 있어 계절은 몸을 바꿀 것이고

접혀지거나 지나가는 것을 지우거나

발소리 숨어버린 어제의 길만 남아 있다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이다

 

 

[수상소감] 새로 산 신발 뒤꿈치의 손가락 틈

 

잘생긴 막대기 하나로 한여름 들창을 받쳐놓았던 적이 있다

막대기는 갓 더위를 받치고 있었고 늘어진 포도나무를 받쳤고 오래전에는 새를 잡기 위해 바구니 옆구리를 받치고 있다가 익어가는 들판의 논을 받쳐놓기도 했다

한 번도 앞으로 돌아올 수 없는 벽의 뒷면엔 보여주기 싫은 크레이터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이에는 동네 아이 하나가 자치기로 동심을 받쳐놓았고, 빗방울이 빗 소리를 받쳐놓아 쉬었다 갔다 아버지 대신 굳은살 박인 어머니 손은 반평생 자식을 받치고 있어 한때 기울어진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받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시에게 말을 걸었다 몽환적인 곳에서 그 대상을 부를 때는 땅에 귀를 낮게 기울여도 표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산길을 혼자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대상이 너무 많아 빠른 속도로 쫓아가 손으로 잡아보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잡히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수없이 버렸던 시들, 압력밥솥에 마음을 꾹 눌러두고 배회할 때마다 미련 없이 시는 아침에 뜨거운 수증기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는 나와 은유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첫발을 내디뎠다 그물을 어깨에 메고 그 표상을 찾아다닐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찾고 있었다 그때 메시지 ‘잘하셨어요 등단에는 운명 같은 게 있나 봐요 좋은 시로 보여주세요 축하합니다’ 그때 실감이 났다 용기가 생겼다 책상에 등을 말고 앉아 있는 몸에 태엽 감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물구나무를 서도 나를 받쳐줄 막대기 하나 생겼다

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놓을 때마다 초심을 불러주곤 했던,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김석환 교수님이 많이 기뻐하실 것 같다 끝까지 믿고 함께해준 우리 가족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명지대학원 동기들, 스터디그룹 케빈과 빛별 친구들, 오랜 문우 써니 언니들, 토즈반 문우들, 시와 운명으로 만난 친구 양비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당선 소식을 전해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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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외 4편 / 이소현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

오아시스의 밤은 낡은 허물만 남겨 주었고

낮은 아지랑이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허물어졌다

 

갈대를 엮어 만들었다는 밀짚모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갈대는 매정한 허공을 찔러댔지만

태양은 비 대신 땀을 선물해주었지

물 한 병은 십 달러

십 일의 하루를 견디는 가격이라서

혀 밑으로 달콤한 온기를 숨기곤 했어

쉽게 녹아내리던 단어들

 

지나온 발자국으로 써 내린 이야기

결국 한숨들은 짓궂은 모래바람에 지워질 것이다

사막여우는 열을 뱉어내는 법을 알지만

나에겐 옹골진 귀조차 없어

지나친 그림자로 귀를 틀어막고 사막을 건넜지

 

더 먼 곳에 닿으면 빛이 있을까

스물의 귀퉁이는 쉽게 허물어지고

어설픈 꿈들을 엉성하게 베어 먹으면

붉게 핏자국이 베인 발바닥은 이제

차가워진 허공을 떠돌지

 

자꾸만 지워지던 발자국 나는

스무 시간 십삼 만원 최저도 받을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므로

오아시스, 초록 야자수가 우거진 오아시스엔

이미 낡은 팻말이 서 있는데,

 

나의 오아시스는 꽤 늦게 찾아오는 법이지

맨발로 사막을 걷고 있는 하루

나는 이방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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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어느 날 일그러진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매일 같은 문장을 읊으며 내일을 가늠하던 어느

외국인 노동자

그는 베트남 사람들처럼 조금은 희어지고 싶다며

쓰게 웃었다

 

나는 안녕,

인사하는 법을 잊었다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언제나 슬퍼

깨진 거울에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연습을 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던 문장들

결국 나의 하루는 고작 몇 천 원짜리인데

 

티브이에선 재산의 95%를 기부했다던 어느

부자의 소식이 즐겁게 춤췄다

그에게 남은 5%는 오억

나는 오백원 통장잔고를 보며 웃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

 

일그러진 얼굴은 희게 나오지 않는다는 건

낡은 공장의 철문을 두드리던

거친 손길들로부터 배운 것

스물 몇을 겨우 지나간 날들에선 꽤 쓴맛이 났다

 

거울엔 내가 모르는 사람만이 바르게 서 있다

오늘의 일그러진 시간들을 내일이면

한 줌 한숨에 흩어질 테니 나는

조그맣게 안녕,

인사했다

오늘의 배웅인지 내일의 마중인지 모를

안녕

 

 

 

 

별천지

 

새벽이면 아빠는 별 찌꺼기를 안고 들어왔다

이른 아침마다 하루를 쓸어내던 아빠

그의 몸에선 퀴퀴한 그림자 냄새가 나곤했다

 

새벽은 하루를 억지로 삼켜대다 붉은

토악질을 하곤 했다

깊은 목울대를 차고 나오던 울음들

결국 모두는 등 뒤에 저를 숨기고 있다

 

달빛으로 쓸어내던 골목엔 유난히 태양이 늦게 도착했다

지나치게 높은 아파트 때문이라며 웃는 동안

아빠는 스러진 빗자루를 들었다

흔적들을 담아내던 시간 하늘엔

오늘의 별빛이 조금 피어올랐다

 

밤이면 떨어져 내릴 별들은 환했고 차가웠다

어깨에 쌓이는 건 누구의 고난

고난들은 방황하다 가난처럼 아빠의 어깨로 쏟아졌다

 

긴 속눈썹에 끼던 유난히 짙은 먹구름

장래희망의 질문에 대해 나는 기린을 읊었고

도장을 찍어주던 아빠는 빨갛게 번진 이름을 쓰다듬었다

방구석엔 별들이 쌓였다

새벽에 잠든 아이를 달래듯 나는 별을 안았다

누군가의 울음은 아주 조금

오늘의 일기가 되기도 했으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 그림이 그리워져

허공에 한숨으로 그림을 그렸다

 

별로 도배한 집에는 아직

차가운 공기만 부유하는데 아빠와 나는

한숨으로 온기를 메웠다

별천지가 된 밤,

별천지가 된 방

 

 

 

 

아스팔트 런웨이

 

눅눅한 공기를 쥐고 길을 걸었다

차가운 이야기는 꽤 눅눅해지는 법

나는 또각이는 소리가 나던 걸음으로 물기를 털었다

오후의 열기가 짙어지던 날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길을 걸었다

어두운 색 옷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먼지구덩이를 살아야 한다

자박거리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진다

꿈벅일수록 많은 숨을 내뱉던, 아스팔트

그 진득한 찌꺼기

 

잎사귀는 꽃 대신 담배를 피웠다

바퀴의 궤적이 그리던 시간

그들은 매일 촉박한 일상을 넘겼다

나만 넘기지 못하던,

오늘의 페이지는 이미 어제의 페이지가 되어 있던 시간

 

언제나 팽창하는 노래를 불렀다

터지기 직전의 콧노래

낮잠의 색처럼 자꾸만 바래가는 것 같은 날이면 우울해져

하늘도 노래지고는 했으니까

문득 별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같던 검정의 길 위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은 사실 지나간 위로

이 길을 뒤꿈치로 잘근잘근 밟아댄 사람들

그들이 그림자 뒤에서 몰래 훔치던 눈물은

같은 그림에 대해 진부한 감상을 토해낸다

덥네,

발끝으로 올라오던 열기들

 

아스팔트를 걸었다 무의미한

런웨이를 모델처럼,

또각

 

 

 

 

카무플라주

 

나는 주기적으로 우울해지고는 했다 공장에서 잿빛 연기가 쏟아지듯 나의 하루는 회색조였다 모든 빛을 삼키던 어둠의 계열

그림자는 종종 짙어졌다 악어처럼 진흙 속에 몸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앞집 2층에 사는 오빠에게 배운 첫 키스처럼 눅눅한 하루 쓰레기 냄새가 나는 포옹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한없이 우울해져 다시 하루를 오물거렸다 어느 파충류처럼 쉽게 색을 바꾸고 싶어 보호색처럼 배경에 녹아들거나 그림자가 되어 아무런 발에나 차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상은 쓸모없이 밝았다

 

잎맥처럼 복잡한 삶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평지는 꽤나 깊고 길었다 건조한 걸음 사이에선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는 규칙 거짓으로 적은 자기소개서에 대해 증명하라는 어느 면접관에게 두 마디만 던졌다

날카로운 칼날에 얼굴이 비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사실 이건 세상에 내뱉고 싶던 문장 어느 뒤통수에서든 들이치던 시선은 커터칼 심처럼 날카로웠으니 나는 얼떨결에 쥐어든 합격증을 찢어버렸다 공장이길 포기한 우울공장에서

 

나의 색은 무슨 색이야 사실

나는 아무런 빛도 없는데

아무런 빛이 될 수 없는 것일지도

하늘은 쓸데없이 파래서 나는 문득 하염없이

우울해졌다

 

 

 

[수상소감]

 

갑자기 어지럼증이 느껴져 눈을 감았습니다. 지구의 자전소리가 듣고 싶어 귀를 틀어막고 상상을 유영했습니다. 너무 우울하고 관념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낭만적인 은유에 대해 고개를 저었습니다.

 

함부로 문장을 쓰던 어린 날. 제가 올곧은 단어들을 내뱉을 수 있게 도와주신 아버지와 제 시선을 감싸 안아주시고 모진 말 뒤에서 격려와 희망을 주시는 가슴으로 낳아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의 원천이 되어주는 50명의 요정들과 1명의 천사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년도. 첫 번째 스물을 음미하며 새로운 시작들을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잘 걸어 나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만, 저와 부모님의 삶의 이력들을, 그 거창한 고난들을 진솔하게 뱉어내는 거친 시를 쓰겠습니다. 시인의 숙명은 삶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뜨거운 아스팔트 밭길을 맨발로 걸어 나아가겠습니다. 덧붙여 제가 끌어안고 싶던 사회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모든 생명들이 조금 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저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거친 진실을 마주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마주한 모든 관계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제 시의 바탕이 되었다는 걸 전하고 싶습니다. 긴 터널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신 권주희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우리의 현대시 역사는 100년을 건너오면서 많은 시도와 새로움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렀다. 상대시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화기의 신체시에서부터 굽이굽이 궤적을 남긴 시인들은, 그 이전에 없었던 지평을 새로이 열어온 분들이었다. 전쟁의 역사는 승자를 기억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와 작품을 기억한다. 이에 등단 이후 전문가의 대열에 합류한, 혹은 합류하려는 시인은 당대나 이전의 시풍에 안주하려는 게 아니라 신-지평을 구현해 내려는 의지의 소유자라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에 응모한 150여명의 작품 중, 7명의 응모자 작품을 본심에 올렸고, 그 중 최종 본심에서 논의되었던 세 분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소현의 「이방인」외 9편, 강희정의 「행성넘버 4797」외 9편, 황신의「내연(內緣)의 땅」외 9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첨예한 눈금과 논박을 요구한 작품은 「이방인」과 「내연의 땅」이었음을 밝힌다. 이토록 심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은, 선배 시인이 다하지 못한 바를 다음 세대가 능히 북돋우고 이어나가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서렸기 때문이요, 우리 문단의 지층을 더욱 비옥하게 하려는 데에도 뜻이 있음이다.

 

이소현은 수상작 「이방인」에서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이라는 문장을 첫 줄에 놨다. 독해가 수월찮은 조합이다. 물도 아닌 “열기를” 마셨다거나, 더욱이 “맨발로” 마셨다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알레고리가 형성되고 독자가 상상의 문을 열 수 있는 틈, 즉 다양한 공간이 생겨난다.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접합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일절이기도 했는데, 그 외 작품에서도 웬만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다른 분들께도 다음 기회가 반드시 행운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원한다.

 

- 심사위원 정숙자(시인) 

 

 

[심사평] 관념 중심과 사물 중심의 상상력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심사 의뢰를 갑작스럽게 받고 이메일로 온 일곱 분의 작품을 여러 번 깊이 있게 읽었다. 보내온 작품들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기명으로 번호만 매겨진 작품들을 크게 대변해 보면 관념 중심의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서 표현의 객관성이 결여된 면이 있지만, 그러한 관념적 사유가 오히려 낯설고 신선하게 읽힌 경우와 사물 중심의 상상력을 통해서 객관적 사유와 표현의 일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대별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함께 심사를 한 정숙자 시인은 전자의 시를 선호하고 필자는 후자의 시를 선호하는 바람에 정숙자 시인은 3번(이방인 외 9편)과 5번(그림자 외 9편)을, 필자는 2번(그날의 신발들 외 9편)과 4번(행성 넘버 4797외 9편)과 6번(내연의 땅 외 9편)을 최종심에 올리고 카톡과 전화로 의견을 조율했지만 공통된 의견에 근접한 시인이 한명도 없어서 예심위원의 의견까지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예기치 못한 산통을 겪고 태어난 시인이 「이방인」 외 9편을 투고한 이소현 시인이다. 이소현 시인과 마지막까지 겨룬 시인은 황신 시인의 「내연의 땅」 외 9편과 강희정 시인의 「행성넘버 4797」 외 9편이다.(투고자의 이름은 심사 후에 공개되었다.)

 

먼저 필자가 주목한 강희정 시인의 시들은 「행성 넘버 4797」, 「꽃총」, 「오늘과 동전은」, 「바콜로드에서 짐 풀기」처럼 다양한 소재를 균형 잡힌 상상력으로 이끌어가는 솜씨가 믿음직스러웠다. 반면에 몇몇 작품은 단조롭거나 패턴화된 구조를 띠고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에 「내연의 땅」, 「허공이 익는다는 것」, 「에덴의 방정식」, 「생각이 많은 날」 등 다양한 소재를 긴장감 있는 언어로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가는 힘을 보여준 황신 시인의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의 시들은 단순하지 않은 상상력과 깊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완결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시는 다른 심사자의 눈에는 새로움이 부족한 시로 읽혀져 제외되었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소현 시인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좋은 표현에 비해 객관화되지 않은 관념적 진술이 거슬렸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은 오히려 표현의 일관성을 거스르는 관념적 진술이야말로 새로운 실험성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보았다. 필자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먼저 「이방인」의 첫 연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로 시작되는 첫 구절부터 막연하고, 두 번째 시 「불가살이」는 1연에서 밥풀에서 태어나 쇠를 먹고 살아가는 ‘불가살이’의 모습이 2연에 오면 트럭을 모는 사람으로 갑자기 바뀌어서 표현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소현 시인을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수상자로 동의한 것은 이 시인의 앞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다. 긴 호흡의 시를 활달한 상상력으로 끌고 가는 장점을 살리고 앞에서 지적한 결점을 보완한다면 앞으로 우리 시단의 새로운 계절이 될 것이다.

- 심사위원 박남희(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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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의 배꼽 외 4편 / 박동민

 

 

방문의 배꼽을 꼬옥 누르는 순간부터 사춘기는 시작된다

 

성벽은 높고 천장은 낮은 다락

프레스코화 속 성인(聖人)이 두 손 모아 배꼽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펑, 소리와 함께 사생활의 구름이 성채를 덮는다

 

웅크린 가슴의 단추 하나 풀고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는 사춘기

저요 저요 대신 쟤요 쟤요

팔랑이는 창문은 나무의 자세를 따라한다

 

단추 하나 더 풀어볼까

합법의 우듬지에서 불법의 밑동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수시로 넘나드는 사춘기의 배꼽

 

밖에서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배꼽은 열리지 않아요

멋있는 척 어른인 척하지 않아요

뭘 자꾸 척척 해내라는 거예요

겁나거나 골나지 않아요

골라도 내가 골라요

 

성스러운 손으로 빼꼼 성문을 열고

흔들리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오후

 

천장의 야광별이 넝쿨손을 타고

광장의 배꼽으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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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맞선, 甲과 乙의 동화

 

 

소장 접수

 

한 번 보실래요?

절친한 변호인이 느닷없이 야밤에 소장을 보내주었다 첨부된 사진 속 여드름 자국이 틀린 맞춤법처럼 도드라졌다 각하해버릴까, 소개팅은 몰라도 맞선은 싫었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명절, 후견인들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만나보겠다는 답변서를 즉각 제출했다

 

제1회 변론기일

 

드디어 법정에서 맞선, 원고 甲과 피고 乙

수차례 법정을 들락날락 했지만 처음처럼, 간단히 신원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환하게 웃는 제3자 丙판사가 메뉴판을 건넸다 첫 만남부터 펼쳐진 심리적 공방

차 많이 막히셨죠?

실은 마실 차보다 타고 온 차가 궁금했다 딱 벌어진 보닛에 사진보다 각진 얼굴 두툼한 에어백과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시원한 목소리

그는 세단보단 신형 지프에 가까웠다 게다가 국산차, 그녀는 애국자니까

 

조정절차

 

역시 믿고 쓰는 국산차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다 몇 건의 통화와 문자가 뻥 뚫린 도로를 내달렸다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그린라이트,

추정이 간주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회 변론기일

 

사람은 사계절을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乙의 지론

절친하고도 친절한 丁변호인은 나이도 있는 만큼 지나친 검증과 감정(鑑定)은 삼가길 권고했다 丁을 믿고 몇 번의 데이트를 이어갔다 접촉사고 같은 돌발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변론 종결 및 판결 선고

 

甲은 乙에게 고백을 했다

‘당신의 그루터기가 될게요. 우리 사랑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압류 당한 피고

더 이상 그들은 맞선 상대가 아니었다

악수하며 법정을 나오는 화해의 당사자

쌍방을 대리한 丁은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계절의 묵시적 갱신이 수십 번 이어졌고

원고 甲돌이와 피고 乙순이는

호숫가 청둥오리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거북처럼 오래오래

분양받은 보금자리에서

서로서로 항복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부러짐은 이렇게 말했다

 

낙타들이여,

우측통행 표지판을 보면 왼쪽으로 걸어라 보이지 않던 오른쪽 얼굴이 지나가리라

빈 좌석의 유혹을 견디고 서서 가라앉은 아침의 표정을 읽어라

음모에 찌든 찌라시 대신 눅눅한 책장에 눈길을 주어라 그대들이 펼치는 곳마다 길이 태어날 것이다

그 길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언가(無言歌) 들리리라

 

사자들이여,

엘리베이터를 며칠씩 굶겨라 굶어도 배가 부른 놈들이다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는 불길이다 폭발적인 반응으로 계단의 몰락을 몰고 오는 놈들이다

흡혈모기를 사랑하라 그대들의 죽음과 그 현장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수호천사다 혼자 먹던 편의점 도시락에 담긴 혼을 기억하는 자다 남은 반찬들은 그대들이 짊어지고 갈 잉여다 놀랄 나머지들이다

 

청춘들이여,

우선순위 영단어를 아직도 외우는가 상해버린 숙회처럼 단어들은 비리지 않은가

책상에 그어진 금은 지우고 금을 넘었는가 자율학습은 자유로운가

한쪽 소매에 더듬이 같은 이어폰을 끼고 킥킥 웃다가 떴다! 척후병의 외침에 수학공식보다 정교하게 사다리를 걷어찼는가 그런데 매점은 누가 다녀오기로 했는가

 

육체여,

울고 싶을 때 크게 웃어라 울다가 웃어도 괜찮다

토할 것같이 괴로울 때 ‘토마토’를 읊조리며 더듬이를 세워라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미끼를 물어라 더듬더듬 찌가 흔들리면 몰려올 삐끼들을 물리쳐라

기억하라 지렁이의 마지막 꿈틀거림을, 상대는 강하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반복되는 시간표의 피복을 벗기고 날 것이 되어 날아올라라

 

당신이여,

부러짐이 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규칙의 칠판에 예외를 그으러 강을 거스르는 은어 떼들이 보이는가

해금소리 들린다

산이 이마에 닿을 것 같은 오지에 당신을 묻었다.

 

 

 

 

 

오이도(烏耳島)

 

 

까라면 까!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귀가 없어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저기, 까마귀가 날고 있어요 까마귀는 눈이 없어요 까막눈도 알 수 있어요

눈 좀 빌려 주실래요

 

까라면 까! 발랑 까진 것들, 가랑이 사이로 통과!

까진 건 무릎 밖에 없어요 까진 것들은 더 깔 게 없어요

까졌다고 까면 잠깐만요,

 

더듬지 마세요! 친밀이 침입이 되는 순간 소름 돋아요 허벅지에서 더듬이가 돋아요 수작 부리지 마세요 건넨 적도 없는 잔을 채우라니요 쏟지도 않은 말을 담으라니요 대거리할 가치도 없는 대가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나미, 토할 것 같아요 등 좀 두드려주세요 아니다 등 좀 빌려 주세요 어부바해주세요

 

림보를 통과하면 까마귀들의 귀 무덤

문고리 없는 집의 둥그런 처마에서 태어나

부러진 숟가락을 쫑긋 세우고 걷는 까마귀의

마귀의 귀까지

 

물이 점점 차올라요 몸이 점점 떠올라요 날아올라요 귀에서 마귀가 툭 튀어 나와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탱자나무 가시로 귀 파드릴게요

귀도 없고 눈도 없는 까마귀는 칼을 물고 있어요 칼자루가 없는 칼로 시간을 두드려요 갈수록 무뎌지는 날로 시간을 구부려요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자장가 소리 들리세요

섬들이 꺼이꺼이 가라앉고 있어요

 

 

세로수길 가로등

 

 

내가 어둡대요

밤새 손들고 벌 받는 중에도 쉴 새 없이 까부는 난데

바닥에 붙은 은색 껌종이처럼

나의 꿈도 통통 튀는 용수철이었죠

 

커서 뭐가 되려는지

뭐라도 되겠지, 하시던 분들

보세요!

나는 매일 런웨이를 걸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워킹 워킹,

배운 적은 없죠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옷걸이들이 홋홋 모자를 쓰고 걷네요

나는 통유리 앞에서 마네킹이 웃을 때까지 춤을 춰요

이렇게 흥이 많은데 내가 어둡다니 원

 

어젯밤에는 발톱에 페디큐어를 칠하다가 미친년처럼 웃었어요

런웨이에선 절대 웃으면 안 되거든요

 

요새 시즌이라 먹어도 자꾸 말라요 체질인가 봐요

모가지보다 다리가 길어서 슬픈 족속

 

자기 전에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사실 워킹보다 중요한 건 턴 턴,

 

뒤도 안 돌아보고 꿈속으로 워킹 워킹

배우지 않은 걸음으로

 

 

[당선소감]

 

제 몸속에 항아리를 심었습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읽고 그린 것들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런 습관이 관습이 될 때쯤 하나씩 꺼내 추체험(椎體驗)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허리띠와 넥타이를 풀고 알몸으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아 아, 외쳤습니다. 제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듣는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둥치에 끈을 단단히 묶고 엄마의 배꼽 속으로 들어가는 그 설렘이 좋았습니다.

 

엄마의 살결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보드라운 부분에 손등을 대면 잠이 금방 옵니다. 엄마의 귀와 배꼽과 팔뚝을 만지는 버릇이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행진곡이 마태수난곡처럼 들렸던 겨울과 몇 시간 동안 아가리를 굳게 다문 수술실을 떠올려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질까 마음 졸였던 시간, 제가 골라준 장갑 끼고 서로 팔짱 끼고 생태하천길을 따라 소풍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처럼 엄마 몸에 산다는 나쁜 병 덩어리도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고, 목련을 볼 수 없어도 봄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봄은 옵니다.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려 얼굴을 바꾸는 나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서서히 녹아 손가락을 빠져 나가는 아이스크림처럼.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도를 잃고 길을 헤매던 저에게 지남철(指南鐵)을 건네주신 고경숙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자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품처럼 차가운 이 핏덩이를 낳고 길러주신 아버지, 엄마 덕분에 저는 차가운 입김으로 수많은 당신의 뜨거운 이마를 짚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조정인, 유종인 시인님, 예심을 봐 주신 최연수, 진혜진, 강주 시인님 고맙습니다. 아들처럼 아껴주신 큰아버지, 큰어머니, 김동훈 교수님, 친형처럼 든든한 김봉철 교수님, 천웅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인 등극을 해주신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시작(詩作)은 반(半)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이라 모자라고 반이라 충분합니다. 끊임없이 반을 채우고 반을 비워나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방에서 구석만 찾아다니던 제가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손목이 되어준 아내 연미, 연미를 낳아주신 장모님, 곧 태어날 ‘봄’에게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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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열풍 외 4편 / 이동우

 

 

질투가 조화造花를 만들었다는 이 도시의 풍문

 

장미꽃은 허브티 한 잔 다 마시기도 전에 시들었다

시간이라는 벌레가 결 사이사이 주름으로 숨어들고

소행성 B612,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도 시든다

 

꽃을 냉장고에 넣는다

냉기와 서리로 화장한 꽃은 신선 유지 기능이 만족스러운지

더는 질투하지 않는다, 안에선 시간도 언다

언 꽃에게 한창때 사진은 보여 줘도

거울은 안 된다

박제된 젊음, 그 탱탱함을 회상하는 ‘복고復古’ 사진전이 열렸고

주말 내내 붐볐다

 

딸아이 스케치북에서 시들지 않는 꽃을 발견했다

아내는 빨간 크레용으로 그려진 장미에서

샤넬 No.5 향도 맡고

꽃을 쫓는 나비의 숨소리도 듣는다

 

땅의 보폭에 맞춘 그리니치 표준시를 거부하고

시곗바늘을 꺾는 사람들 하지만

수분과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훈제의 과정은 막지 못한다

요즘 들어 얼굴보단 빈 풍경을 찍는 아내

걸을 때마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가 난다

 

도시를 뒤덮은 풍문이 자욱해진 밤

냉장고에서 꽃을 꺼내 말해 준다

꽃잎이 다 져도 넌 장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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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전개

- 버려진 20리터 종량제 봉투들

(웅크린 자세로, 구겨진 표정으로, 무릎 꺾인 순간으로)

 

길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면

닫혔던 골목이 열린다

밤의 주인들이 후각으로 서열을 매겨

옆구리를 단번에 찢는다

불법 투기된 냄새에

얼룩무늬 몇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앙칼진 울음에 허공이 깨진다

먹이 다툼에서 밀린 그림자가

트럭 밑으로 사라진다

 

이슥해진 밤이 어둠을 담으면

한껏 부푼 골목이 터질 차례

금 간 담벼락마다 웃풍이 거세지고

틈새로 쏟아진 소란의 흔적이

전신주를 타고 축대 끝

옥탑방까지 타전된다

골목에서 쫓겨난 이들이 뒤척인다

벼린 발톱에 긁힌 길바닥이

게워내는 낮 그림자

밤의 숨구멍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집 앞 외등이 동공을 가늘게 뜨고

길은 어둠 속 꼬리를 치켜세우는데

 

 

 

비유하자면 겨울밤

 

빗댄 색들 가운데 의인화한 것 위주로 한 움큼 집는다 원고지에 조심스레 풀어내자 숨과 섞여 진해진다 입을 그려 주고 표정을 선물한다 비로소 꿈틀거린다

 

촛불 하나 켜고 둘러앉는다 의외로 책이나 옷가지보다 가구들이 말이 많다 핀란드 자작나무 탁자는 고향 얘기만 몇 시간째다 눅시오(Nuuksio) 숲, 이곳저곳에서 눈밭 헤치고 모인 고아들

 

벽시계도 수다스러운데 둥근 것들은 했던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늘 대유에서 시작된다 괜한 격식을 차리거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사달이 난다

 

직유는 늘어지기 일쑤고 ……, 은유는 둘을 뻘쭘하게 잇곤 한다

 

창을 열자 촛불이 어둠 사이로 얼른 두 손을 밀어 넣는다 허공이 하얗게 벌어진다 첫눈이 닿소리처럼 내린다고 해야 할지, 이 계절의 첫 페이지다, 라고 우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내 몸에도 불이 들어온다 별은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막다른 바다

 

어머니가 골목 어디쯤에서 물질하면서부터

조각난 일상

나는 집 앞 깨진 외등 아래 주저앉는다

어둠을 끌어당겨 제 몸을 덮은 밤바다처럼

스스로를 지워 버린 잠녀

겨우내 소금기 짙은 밭은기침만 골방 안으로

덕장 밑으로 쑤셔 넣었다

바람이 마당에 부려 놓은 갯내

눈가에서 파도가 참방거릴 때면

잠녀는 골목을 길게 이어

갯가로 나가려 했다

물소중이 걸린 옷장 안으로 펼쳐진 허름한 바다

방바닥에 흘린 물을 보고 바당이라 외치며

철퍽철퍽 바닷물을 두드렸고 이어지는

삭풍에 삭아 가는 노랫소리

이엿사나 이어도사나 이여 이여 이어도사나

자신의 근원인 마을 앞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밤

눈보라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사투를 벌였고

갯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포말 속에서

새벽은 후렴처럼 일렁였다

간신히 잔잔해진 숨비소리

잠녀는 또다시

물허벅에 담긴 파도 소리를 쫓아

막다른 골목에서

구부정하게 짠맛을 캔다

 

어머니가 두고 간 망사리

나는 삿대도 없이

골목에 잠긴 물길 더듬으며

널린 조각들을 맞춰 간다

골목마다 바다가 넘실거린다

 

 

 

 

봄 외출

 

권투 선수가 매니큐어를 바른다

사각 링처럼 각진 손톱

땀내 위로 뿌려지는 꽃잎

글러브를 벗은 손가락은

발가벗은 것 같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꽃잎이 샌드백에 가 붙는다

가쁜 호흡들이 달라붙은 곳

심판이 휘슬을 분다

함성이 모인다

꿀꺽, 카운트다운을 삼키는 벽

맞아도 손톱은 꿋꿋하게 자랐다

밖으로만 자라는 퍼런 멍

숨기고 싶어 주먹을 말아 쥐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손톱

얻어 입은 옷처럼 껑충하다

햇빛이 죽죽 팔을 뻗는다

원투! 원투!

섀도복싱은 이제 그만

가볍게 쥔 주먹 안에서

사각 링이 구겨진다

쫙 펴자, 순식간에

만개하는 손가락들

소녀가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당선소감]

 

하루하루 충실했으나 시가 잘 써지지 않아 허전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밤새 시에 대해 이야기할 선후배가 없어 외로웠으나, 어쩌면 그래서 자유로웠다.

 

조금 늦은 내 글쓰기는 아직 유년의 골목 어디쯤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 나를 일으켜 다시 달릴 수 있게 한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뒷덜미를 잡는 창작에 관한 회의.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달리며 조금씩 깨닫는다. 우직한 반복이 저 스스로의 리듬으로 마침내 한계를 넘어서리라.

 

굽이쳐 뻗어가는 ‘시산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험준한 산세山勢에 주눅 들지 않겠다. 한 발 한 발 내딛겠다.

 

마지막으로 내 시의 근거와 얼개가 되어준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영원히 반짝여 달라고 …….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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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 김태인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

바닥이 없는 마음처럼 지붕 없는 둥지를 이고

부화할 날들을 뒤로 한 채

늙은 나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새는 빈 둥지를 허물고 도화지를 떠났다

 

* 애착안정성 진단을 위한 투사검사(B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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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1번과 3번 지문의 영역 사이에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문장들이 꿈틀댄다

이해는 지문이 만든 미로를 뚫고

출제 의도는 몇 년 째 퇴로를 헤맨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과정은 4번 지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그리고 죽음의 묘비명을 이해하기까지

 

3번 나뭇잎과 1번 잎사귀 중 옳지 않은 것은?

가장 나뭇잎 같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질문에 모든 잎사귀들은

말문의 잎맥을 막고 치를 떤다

가장 고양이 같지 않던 울음소리만 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순간은 질문과 사고의 이종교배이다

가장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몇째일까요?

문제 같지 않은 문제가

가장 꽃 같지 않은 꽃을 고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간다

 

똑똑 물방울 돋는 약수터 바위틈에

5번 물결이 수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가장 꽃잎 같은 분홍 벚 꽃잎 아래로 숨어든다

열한 번 한숨과 아홉 번 어긋난 관절은

지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지문이었을까요?

 

 

 

순간기억상실

 

강한 휘발성을 띤 순간의 장소에서 당신의 기억은 웜홀로 증발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블랙홀의 가공할 중력과도 같아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끌어당겨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배출한다 실로 눈빛 깜박할 순간이다 서울역 앞 내 앞을 빠르게 지나는 한 여인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 균형을 잃고 두 시선을 직선의 관성을 한 순간에 집 어 삼 켜 버 렸 다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커피 잔에 흙빛 기억을 왈칵 토해내며 핑그르 순식간에 비켜선 찰나 마주 오던 한 남자 나를 피해 급히 직진 괘도를 선회할 무렵 휴대전화 통화에 한쪽 기억을 먹혀버린 한 여성의 스텝과 엉켜 탱고의 피날레를 연출하고 만다 서로의 방향성 기억은 가방이 서로 부딪치며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놀람과 통증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연쇄반응으로 엉켜버린 공황은 순간기억상실증 옆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이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유리창에 부딪히고 순간 걸음을 멈춘 바람에 날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서울 상공에 쌓이며 지표면 1mm를 덮어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중금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간기억상실의 연쇄반응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서울역 대합실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틈새

 

얼굴 틈으로 날아오는 새,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와 오늘 사이로 말과 행동을 자주 흘린다.

 

화장실 깨진 벽거울에 비춰진 조각난 얼굴, 나뭇가지 쪼개놓은 낮달처럼 틈새 파고든 눈코입은 온전히 꿰매내지 못한다.

 

찔끔찔끔 녹물 흘리는 수도꼭지, 전립선이 막혔는지 꽉 깍 나오는 울음이 길다. 한번 구겼다 펼친 살림처럼 모든 각이 흩어지듯 놓아두고 지우고 가야 할 것들.

 

휴지에 싸서 버린 얼굴이 넘쳐난다. 형광등 속이 까맣다. 한쪽 기억을 뜯어낸 벽지 여백이 길다.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스미고 대들보가 벌어진다.

 

한 귀퉁이 부서져 내린 계단으로 깃털구름이 몰려든다. 거울 속으로 한 줄 훈풍이 불고, 햇볕 든 꿰맨 틈으로 죽지 않은 뇌신경을 뻗는다.

 

얼굴 중앙으로 사납게 몰려오는 실금, 조각조각 붙은 파편이 흩어지듯 수십 개의 얼굴이 다시 부화한다. 푸드득

 

주름지고 패인 틈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 떼,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헐렁하지도 호락하지도 않다.

 

 

 

겨울, 유전자

 

 

하늘에 닳아가는 새들의 잊힌 무릎이어서

나는 둥근 손거울 안에 오랜 문명처럼 희미하게 닳아간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고기의 뼈를 대면하는 일처럼

 

나는

거울 위에 눕는 또 하나의 혈연

 

주먹도끼를 들고 오랜 자폐를 깨고 나오는 날

무르팍을 흐르는 달빛의 기도는 단말마 비명으로 깨져 한꺼번에 와장창 쏟아질 것이라 한다

 

깨어진 조각마다 고스란히 녹화된 아버지 얼굴과 내 눈빛이 바라보는 아이들

서로의 거울을 바라보며 부레가 닮아가는 예감을 터득하는지도 모른다

 

곱슬머리를 기억하기 위해 쌍꺼풀 닮은 눈빛이 더듬어가는

유전자 지도 속에서, 물고기 뼈를 바라보는 염색체 한 쌍이 잊힌 새의 무릎임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보라와 폭풍과 강추위를 이끌고 거울로 뛰어든 후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손짓을 해도 대답이 없던 무성영화 같았던 거울 속에는 혈연으로 뭉쳐진 응고된 구름에서 잊힌 문명들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수상소감]

 

응모를 한 후 바로 베트남 출장길에 올랐다. 몇 번의 낙선이 있었던 이유로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다. 전화가 안 되어 카카오톡으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먼 타국에서 혼자 맛보는 짜릿한 순간이 앞으로의 시쓰기에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정과 모던 사이에서 방황을 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의 수준을 인정 받았다기 보다는 더 많이 노력하라는 노력상으로 생각하고 싶다.

 

몸에 깃털이 다 벗어진 느낌이다. 깃털이 다 빠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어떤 깃털이 나게 될지 두려움 속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깃털은 다시 돋아날 것이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색깔과 모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기회를 주신 계간 <시산맥>과 심사를 해주신 송용구 시인님, 안차애 시인님, 이기와 시인님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심사평]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작품을 기대하며

 

70여명의 700여의 응모작에서 예심 통과하고 본심에 오른 작품 중 김태인, 이선유의 작품들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외 9편은 풍부한 습작의 연륜을 짐작케 할 정도로 언어의 연금술에 있어서 숙련된 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생(生)의 체험에서 얻은 주관적 사유(思惟)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객관적 공감대의 넓이를 확대할 수 있는 훗날을 기약한다.

 

김태인의 「새 둥지를 그리세요」외 9편을 주목하였다. 그의 시는 낱말, 어절, 문장 간의 의미의 연결고리가 튼실해보였다. 문장과 어절과 낱말은 몸의 각 기관처럼 의미의 자양분을 주고받으며 상호의존(相互依存)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수준의 편차가 거의 없는 10편의 응모작 중 특히 <순간기억상실>과 <지문>과 <틈새>가 심사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분주한 역대합실에서 보행자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사건을 비롯하여 일상의 사건들 사이에 보이는 평범한 ‘틈새’들이 새로운 의미의 세포들로 채워지면서 ‘시’라는 유기체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이 혈액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사건, 하나의 사물과 또 다른 사물,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그 사람과 자연 간의 의미의 그물코들을 촘촘히 연결시키는 ‘연쇄반응’의 그물망을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솜씨가 시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송용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심사평]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를 바라며

 

행복하게도 따끈따끈한 햇(?)시편들에 한나절이나 잠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섯 분의 작품까진 추릴 수 있었으나 마지막 두 분의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 외 9편을 놓고는 다들 長考의 한숨이 깊었다.

 

하지만 ‘신인상’이라는 처음의 의도로 돌아가 짚어보니 한 분의 당선자가 풋풋하거나 촘촘한 시의 행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완성된 시편도 중요했지만 현상의 올과 감각의 결을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로 얼마만큼 직조해내는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김태인의 시편들은 공기방울 같은 가벼운 감각과 진부하지 않게 행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행보가 강점으로 보이나 시편들 사이의 편차와 모호한 표현은 극복해야할 과제로 보인다. 이선유의 시편 ‘무늬’와 ‘깃털’을 한참을 쥐고 놓지 못했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공교로운 언어의 결은 참으로 매혹적이었으나 자주 보이는 상투적 문구와 익숙한 묘사 등이 못내 걸렸다. 이미 詩魔에 든 분이니 한결 깊어진 풍모로 시단에서 반갑게 만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화투 패를 뒤집듯 지금 여기의 시편을 까서 보이고 또 다시 몇 모금의 시인으로 남는 가혹하고 이상한 동네(?)에 자발적으로, 설레어가면서 들어오신 것을 연민하고 또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안차애(시인. 본지 편집위원) 

 

[심사평]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을 기대하며

 

누구에게나 무의식 방에 “내면아이”가 살고 있다. 사십 살, 오십 살이 지나도 “내면아이”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려져서 세상이 갑자기 낯설고, 먹먹하고, 불안하고, 불쑥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몸뚱이만 커졌을 뿐이지 억압받고, 거부당했던 영유아기의 영혼은 무의식 안에 외소하게 남아 징징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길을 걷는 다는 건 그 어두운, 심층에 가두어 두었던 내면아이를 조심스럽게 들추어내어 달래는 과정,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할애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라는 시구에서도 극명히 들어나듯이 “나 안의 나” 은밀한 이중 자아의 현실적 괴리가 파헤쳐지고 있다. 그의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건 내면 심리를 현상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기법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편 마다 숨은 심리와 표층 현의식, 또는 드러난 현상과 숨은 원형의 상관관계를 짜내는데 농익은 안목과 섬세한 세공술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앞으로도 그의 시작은 기울지 않고 더 탄탄하게 대양을 항해하리라 믿는다.

 

나머지 후보작들 중에서도 번뜩이는 시적 기교와, 독특한 발상과 전개가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있었으나 그것이 지속력이 없이 부분에서 그치거나 어느 대목에서는 장황하여 시적 리듬을 죽이는 경향이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 밖으로 밀리기도 하였다. 후보자들 모두 시를 아바타처럼 바라보고 자기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걸 보니 그들 중 우리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는다.

- 심사위원 이기와(시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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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외 4편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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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인사

 

자세를 교정하다 새의 온도를 짐작했습니다 짐작만 했어요 뜨거운 온도로 쏟아지며 태어나던 날부터 세상을 짐작하는 것이 습관이어서

 

어깨에는 깃털처럼 자라는 겨울이 있습니다 깃털을 뽑으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눈은 발아래 쌓입니다 눈을 밟으면

 

새가 펑 펑 울었습니다 새는 그렇게 웁니다 짐작으로

한 발을 반쯤 들어 올린

 

새가 절반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새를 만났고 새가 날개를 펴는 순간은 자주 목격했지만 공중에서 날개를 펴는 동작이 발레의 짐작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리를 반쯤 들어 올려도 새처럼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날지는 못 했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못돼먹었으니까

 

동베파도브레 - 정령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신고

글리사드 - 찢은 새를 밟고

발을 버린 무용수처럼 날아올라 - 그랑제떼

 

숨이 멎었습니다 짐작만으로

 

신발 한 짝에 어깨 한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다른 발을 들어 올려 빛을 끌어당긴다면 불가능한 자세를 새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아침마다 당신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겠습니다

 

 

 

사과를 먹는 사과씨들

 

어떤 의미에서 사과는 2층에서 언니들이 던진 종이다

 

사과를 씻으면 단어는 뭉개진다

이 언니가 저 언니와 섞이고 문장이 젖는다

 

종이는 썩지 못한 것들의 시

아니, 씨

언니들의 방에서 뒹굴던 사과씨 귤씨 비타민C는

 

내가 버린 종이였다

젖은 종이를 펼치면

 

사랑한다는 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건너가 있다

계단이 계단으로 접히다 썩은,

 

집들이 언니들의 씨와 나의 시 사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더 어두워진 다음에 언니들을 깎아낸다

 

사과씨에 닿기 위해

시를 쓰면

사과는 씨에서 멀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집에 가까워졌다

 

집을 뭉치면 금형공장 프레스로 누르면 더 단단한 씨가 되겠지만

사과씨 귤씨 바다라는 Sea는 다른 장르의 종이

혜은 씨 수미 씨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사과를 씻으면 농약보다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체리가 굴러다니는 지구

 

 

둥근 것은 왜 기울어질까 태양과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슬픔 없이 기울어진다 지구와 체리는 부딪친다 크랙이 생겼다 방울토마토는 싱거워서 크랙 사이로 체리즙을 흘려 넣는다 그런 식으로 지구에 연애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연애는 워싱턴 체리 같아 이국적인 말로 세련된 욕을 구사하지만 연애의 안쪽은 백 년 내내 우기였지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태양은 지구보다 작아지고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지구는 체리보다 작아졌다 빗물은 어디에 고여야 하나 비는 싱거워져서 지구를 적시지 못하고 백 년 동안 과육 속에서만 내린다 태양은 방울토마토처럼 창백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억 년 후에 하얗게 될 방울토마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억 년 동안 친절했던 체리에 대해 사랑은 체리나무 같지 친절을 조금 기울이면 가지 끝은 붉게 맛이 들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구를 토마토와 함께 두면 지구에 먼저 금이 갔다

 

 

기체를 끌어안는 방식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덮밥을 즐겨 먹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가끔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얹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멍게덮밥이고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알맹이는 씹을 때마다 당신을 주황색으로 떠올리게 해요 멍게 오렌지 꽈리는 버리세요 주황색만 생각하세요 첫 키스는 꽈리 같았죠 꽈리를 불면 질량이 0이었던 한 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팽창하는 인플레이션 10⁻³⁶이나 10⁻³⁴초 만에 멍게는 멍게로부터 멀어지죠 멍게를 훔쳤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론물리학과 식품영양학은 버리세요 그러면 식탁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대기현상이 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대기가 폭풍의 기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 대적점이라는 목성의 주황색 반점 사실 멍게는 거기서 나왔죠 노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죠 그러니 주황색은 잊어요 덮밥만 생각해요 폭풍의 대기를 뚫고 착륙하듯 나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꿰뚫기도 해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재료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죠 죽은 별에서 새 별이 탄생하듯 재료의 완전한 죽음으로 밥은 완성되니까요 덮밥은 죽음 위에 죽음을 얹는 한 끼니까요 첫 키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당신과 당신 사이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다 보면 입은 기체로 들끓고요 사실 꽈리는 거기서 나왔죠

 

 

[당선소감]

 

복대박, 림포마 투병 중인 반려견입니다.

 

「윤곽」의 그 손처럼 내 손은 한 번도 종양을 어쩌지 못하고 간절하게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세 번째 날 오후를 지나는 중이었고 내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오후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던 중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연모하면서도 두려웠고 좋아하면서도 피해 다녔던 제게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간절함이 신께 닿았나 봅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곽재구 선생님, 염창권 선생님 그리고 ‘상상인’ 관계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와의 결별을 밥 먹듯이 하던 저를 안타까워하시던 여성민 시인님 감사합니다. 정말 잘 써야 된다고 하신 허혜정 교수님과 고락을 함께해 온 시향문학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보내주신 키다리 아저씨 배철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들 감사하고 대박아! 그만 일어나렴.

 

이제는 시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겠습니다. 애인처럼.

 

 

 

[심사평]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특징적인 상상력이 글쓰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계와 가상계의 경계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예비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치지 않고 끝없이 들려온다. 이처럼 중심을 포착하기 어려운 시대에 ‘시 쓰기/읽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현실계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가상계 혹은 상징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구멍은 통로이며, 구멍 뚫기는 시인의 몫이다. 더불어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소통의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화살촉과 같은 무게중심을 가지고 대상을 향해 꽂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무기명으로 본심에 전송된 원고는 16명의 투고작이었다. 먼저 이를 출력하여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읽었고, 다음에는 오프라인으로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대상작은 8명, 4명, 2명의 순서로 좁혀져 갔다. 전체적인 면에서 시적 표현의 양상이나 제재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서정적 자아의 부재, 주제 의식의 빈곤, 시어의 함축성보다는 진술적 설명에 치우친 점 등이 우선 지적되었다. 최종에서 논의된 작품은 「크레인의 목적」 외 7편, 「손, 라이프 나이프」 외 8편, 「문」 외 4편, 「윤곽」 외 4편이었다.

 

먼저 「크레인의 목적」은 일상의 애환을 환몽 속에 아프게 겹쳐 보인다. 크레인에 날아온 새는 자아의 상관물로 ‘몸 바꾸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곧 감상의 벽에 막힌 것이 아쉬움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도 논평이나 감상을 넘어서는 의미의 파장이 있어야겠다. 「손, 라이프 나이프」는 영상 언어 및 극적 서사의 방식으로 언어의 다층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실험적 형식을 아우르는 중심이 풀려 있다. 그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추구의 진정성보다는 논평적 위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문」(「락다운」)과 「윤곽」(「사과를 먹는 사과씨들」)이었다. 「문」에서는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 있다.”와 같은 표현이나,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와 같은 절묘한 서정성의 실현이 시의 정감을 풍부하게 한다. 동시에 내면의 영역 표시를 ‘문’으로 상징한 것은 평이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이 없었’던 것에 닿아 있다.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의미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윤곽」은 앞의 시와 같이 ‘나/너(당신)’의 관계성 속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결속의 상징은 “손”이자, 손이라는 윤곽을 가진 “열쇠”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당신”의 관계성을 깨고 타인의 “손”이 개입되는바,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와 같이, 너(당신)조차도 타자화되면서 꽉 쥔 열쇠의 윤곽은 점차 “헐거워”진다.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해졌다”라고 했을 때, 선택 불능의 홈만 깊게 파인다. 전체적으로 너(당신)는 마음으로 지어진 가상의 너이자 허구적 현실이다.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고, 비중이 엇비슷하다. 「문」에서는 ‘나/너’의 단순한 도식이, 「윤곽」에서는 일부 어눌한 표현이 걸린다. 논의 끝에 「윤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안정적인 전개와 동봉한 작품에서 보이는 상징성의 구축 등에서 믿음이 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분발을 부탁드리며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한다.

 

- 심사위원 : 곽재구 · 염창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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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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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외 7편.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외 4편.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응, 그런 편이다> 외 5편.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외 6편.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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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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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년 11월.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제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응,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투’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외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외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응,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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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컵 외 4편 / 최은여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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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수상소감]

 

시를 쓰는 몇 해 동안 제가 사는 작은 도시 서북쪽 우리 동네 하천가에는 벚꽃과 접시꽃이 여러 번 피고 지고 수양버들이 새로 심어졌습니다.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하천 둑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를 묻고 새가 불러주는 답을 받아 적었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가끔 시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은 후, 필사하고 습작하던 A4 종이 뭉치를 정리했습니다.

 

나룻배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저에게 크고 깊은 등단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입니다. 그런 저는 하얀 종이배를 꼬깃꼬깃 접고 띄워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깊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종이배가 찢어지면 다음 날 더 두꺼운 종이배를 접어서 올라탔습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면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늘 혼자였고 또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시인과 대화하던 중 ‘작가’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솔직함을 시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작가’라는 단어 풀이는 노가 없는 뱃사공의 거친 손에 노를 잡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강 건너 아름다운 숲에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 다녀왔습니다. 서늘하고 고요한 시를 쓰겠습니다. 성실하고 미련한 글 노동자로 살겠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누군가가 서어나무 같은 시를 만나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허물어 시인으로 빚어주신 ‘수요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안도현 선생님, 김륭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께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시를 더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여기겠습니다.

 

 

 

[심사평]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

 

본심 작품

 

이은정 「생리전증후군」 외

최은여 「머그컵」 외

라환희 「화양연화」 외

이은우 「라라의 창」 외

김나형 「비둘기, 투신」 외

김수형 「야호에 찍는 마침표」 외

 

삼백사십여 명이 응모,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열기가 뜨거워지는 최치원 신인문학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섯 분의 응모작들은 그 가능성 못지않게 편차 또한 뚜렷했다. 모든 시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언제 어디서든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심사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시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생의 새로운 범주 혹은 미지의 세계)으로 만들어지거나 수혈되는 영혼의 양식에 가깝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두 분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이은우(「라라의 창」외) 씨의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음미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흥미로웠고,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설렜다.

 

이은우 씨의「라라의 창」외 4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밀고나가는 패기와 언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만큼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서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부 상투적인 진술들과 맞물려 사고의 깊이와 메시지가 다소 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라라의 창」의 경우 문장을 부리는 능력만큼이나 탁월한 이미지를 전경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마지막 연(“겨울이 노랗게/창을 두드릴 거야”)의 임팩트가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번 심사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제로 오랜 토론을 거쳐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새롭고 다른 시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된 서정을 새로운 시의 표면 위로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만의 세계를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와 이미지로 보여준다.「머그컵」이란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상투적이지 않게 혼융되면서 육체와 정신에 제각기 기댄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저항을 독창적으로 펼쳐 보인다.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서사가 단순히 읽히기보다 보이게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동참하게 하는 극화의 형식이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앵두를 줍는다//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로 시작,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튀어 오르고/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는 결말에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습작시간과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이다.

 

「미러링」, 「예민한 장난」, 「내 이름은 Run」등의 작품 또한 자연스러운 언술과 맞물린 서사의 개성적인 조형능력이 돋보인다. 사소한 일상을 담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같은 작품에서도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확인되듯 그의 시적인식은 얼핏 평범한 언술이지만 주술적이다. 극도로 개인적이면서도 우울(?)할 정도로 합창적인 현실과의 조우를 시적에너지로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더불어 이은우 씨에겐 어쭙잖은 격려 대신 조만간 시의 길을 함께 걷게 될 것이란 심사위원들의 예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글) 유홍준 / 예심위원 김경린 성금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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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 / 최지안

 

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겨울 처마 밑에 쩔쩔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

 

 

[당선소감] 여기, 발화점

 

발꿈치 들어 살살 걸어봅니다. 지상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걷는 사람이 시인이라지요. 휴대폰으로 건너온 당선이라는 말이 그 저녁을 휘저었습니다. 이름표 받아든 일학년처럼 이래도 되는 것인지, 내가 가져도 되는지 만져도 보고 기울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꿈과 잠 사이가 멀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얄팍한 발목으로 넘겨다 본 까마득한 저쪽. 물렁한 턱이란 없었지요. 한 생을 시만 먹으며 무명으로 소비해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은 파일 안에서 허옇게 낡아갔습니다.

 

끝동을 만지작거린 9월. 몇 편의 깃을 골라 저쪽 문턱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신 김윤배, 이경철, 안도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 알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특히 열렬한 지지자인 두 딸과 축하 케이크를 먹고 싶습니다. 마경덕, 박지웅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수원 AK 시창작반과 시담 동지들의 응원 고맙습니다. 수필 스승이신 손광성 선생님 휘하 아가위회원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제 시의 발화점이 되겠지요. 이제부터 뜨거워지겠습니다.

 

40년을 디디고 살다가 얼마 전 떠나온 용인에게 안부 전합니다. 용인을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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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 제4회 남구만신인문학상 본심에 임했다. 용인의 구도심 어느 카페에서였다. 최종심에는 모두 열 사람의 응모작이 올라왔다. 다들 시적 수련의 흔적이 단단해 보였다. 우리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어떤 우연에 의해 시인이 탄생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훈련이 좋은 시인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습과 훈련의 흔적이 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을 만나고 싶었다.

 

새로운 신인일수록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말처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태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 신인에게는 과거의 것을 본받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응모작들은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에서 망설이고 기울고 빠져나오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민의 자국이 역력했다. 그 고민은 사사로운 것과 공적인 것,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들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만 여러 사람의 작품에서 ‘애인’ ‘문장’ ‘언니’ ‘허공’ ‘언어’와 같은 시어들이 동시에 발견되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상이 시류에 편승하는 말의 패션이 아니기를 바란다.

 

꽤 오랜 토의 끝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압축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외 6편은 현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시를 진행시키려는 의식이 강해 보였다. 자의식에 대한 편애와 고백의 시들이 넘쳐나는 때에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적잖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다 발랄하면서도 능숙하게 시를 전개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표현의 수사에 기대 멋스러움을 만들려고 하는 기술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롱꽃」 같은 시에서 “월세가 밀린 꽃이 아픈 허리로 비를 밟고 야근을 간다”는 표현처럼 삶의 신산함에 다정한 정감을 부여하면서 선연한 서정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시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고통에 바늘 끝을 갖다 대고 그 고통을 달콤하게 만드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올해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최지안씨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이 선정됐다.

 

용인문학회(회장 이원오)가 주최하고 용인시와 용인신문사,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이 후원하는 ‘남구만 신인문학상’은 조선시대 문신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시 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지난 2018년 제정됐다.

 

본심 심사위원단은 “최지안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약천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등 시조 900여 수를 지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벼슬을 그만둔 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집 ‘약천집’ 등을 남겼다. 묘역과 별묘 등이 모현읍 초부리에 있다. 

 

당선자에게는 상금 500만 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11월 27일 용인문화예술원 마루홀에서 진행되는 ‘2021 남구만문학제’에서 진행된다.

 

한편, 이번 예심은 용인문학 편집위원회가, 본심 위원엔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평론가)씨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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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 이창원

 

 

섬에는 집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과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도저도 아닌 떠나서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러저런 무리를 만들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몰려다니기를 좋아해서

애초에 얻으려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은 무리들이 있었고

누가 뭘 얻었거나 잃었거나 아무 관심 없이 구경만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몇몇은 모든 걸 잃어버린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모든 걸 잃고도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훌쩍 딴 데로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섬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잘 돌아왔구나, 라며 내 말을 받아줄 것 같은 아버지는 어구를 정리하느라 외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살면 거기에 익숙해져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갯바닥처럼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갯바닥 색깔처럼 납작 엎드린 물고기까지 걷어올리는 솜씨였다

그 통에 아버지 손에는 어구에 베였다 아문 상처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나

매년 되풀이되는 폭우에도 침묵처럼 잘 허물어지지 않는 벽돌담이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이따금 벽돌담 위에 손을 짚고 서서 저녁노을을 이끌고 돌아오는 배들을 구경하곤 했는데

햇볕에 오래 그을린 얼굴은 좀처럼 그 표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낯익은 것이 낯선 것이 되고 그걸 또 얼마만큼 견뎌야 낯익은 게 되는 것인지

더군다나 섬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칠부터 벗겨지며 원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일까, 두엇이 부두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건넨 뒤라서

나는 배를 몰고 미끄러지듯 섬 안으로 들어간다, 귀어(歸漁) 생활은 어떠냐는 물음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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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가 제14회 목포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927일 발표했다.

 

시는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우진, 박화성, 차범석, 김현 등을 배출한 문향 목포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목포와 관련한 다양한 문학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단편소설, (시조), 희곡, 수필, 평론, 아동문학 등 6개 부문을 공모했다.

 

14회 목포문학상에는 전국의 문학인들이 참여해 총 701명의 작품이 접수됐고 시는 전국의 지명도 있는 작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해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당선작을 확정했다.

 

본상에는 단편소설 부문 큐브가 있는 풍경; 0.083’(최수하, 서울시) (시조) 부문 탕자’(이창원, 충남 당진시) 희곡 부문 미얄’(허진원, 서울시) 평론 형식의 변주, 과정으로서의 감성-최은영론’(신용성, 홍천군)이 선정됐다.

 

지역작가 발굴 양성을 위해 전남 거주 작가에게 수여하는 남도작가상에는 단편소설 부문 길목의 무늬’(김성훈, 해남군) (시조) 부문 목포에는 이런 소리가’(박행신 광양시) 수필 부문 그녀는 나의 주인공’(주재현, 무안군) 아동문학부문 그림 가족’(이연숙, 영광군)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022일 목포문학관에서 개최되는데 본상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1000만원이, 남도작가상은 단편소설·(시조) 부문 수상자에게 각각 500만원과 수필·동화 수상자에게 각각 300만원 등 총 5,600만원의 시상금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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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팔꽃 / 김희정

 

 

스물보다 몇 해 더 산

어린 시동생은

나를 잉태해 불어난 엄마의 배를 보며

조카를 얼른 만나고 싶다고

형수님 배 만져봐도 되냐고

담벼락의 붉은 나팔꽃처럼

수줍게 얼굴 붉히며 물었다지

 

아마 그즈음에도 이렇게

가금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해가 쨍쨍했겠지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 살

엄마 뱃속에서 몸집을 키워나갈 동안,

육사에 막 입학한 삼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거지

시집살이에도 도시락 싸주며 공부시켰던,

착하기만 했다던 시동생을 떠나보내며

엄마는 뱃속에 나를 이유로

양껏 울 수도 없었다지

 

형수님 많이 울지 말라고 그때 떠난 건지,

매번 궁금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매년 현충일 국립묘지를 찾을 때면

내 일 년 치 생활과 갖은 상념 젖은 편지

가족 몰래 묫자리 위에 올려놓고

삼촌이 다 읽겠지, 뒤돌아보며

매번 구원받았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그가 떠난 계절에 피는 나팔꽃 꽃말은

기쁜 소식, 결속, 덧없는 사랑

꽃말 따라 살다 간 것 같은 삼촌

매해 이 계절에는 그의 나이 세어보며

흑백 사진 속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새겨넣네

창틀에 심어 놓은 나팔꽃 화분에는

어느새 새싹이 피었다지

 

 

 

 

 

[금상] 외포리 요양원 / 송순애

 

 

바닷가 모로 누운 폐선 한 척

뒤척일수록 마른기침 흘러나온다

창가의 휠체어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노인이 자꾸만 한쪽으로 저문다

갈매기가 바람 다발을 뱃전으로 물어 나를 때

성한 데 없는 이음새가 삐걱거린다

더는 조일 수 없는 나사처럼

노인의 관절은 오래전부터 녹슬어 있다

누군가 찾아와 주었으면

어스름 속으로 길이 보일 텐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파도를 따라 졸음이 밀려온다

가는 귀먹은 텔레비전에서는

입만 벙긋하는 가수가 콧줄에 걸려나온다

식도 어디쯤 가보았던 것인지

바람 소리가 목선을 휘감고 쿨럭인다

한때 해상을 횡단하던 선박이었던가

물살이 커튼처럼 접혀오는 저녁,

이곳의 문은 여전히 밖으로 잠겨 있다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할 것이다

갯벌처럼 드러난 병상에서

폐선 하나 쓸쓸히 밀물을 끌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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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명단

 

[대상] 엄정현

 

[최우수상] 손명권

 

[우수상] 윤지원

 

 

창간 76주년을 맞은 강원일보와 ()김유정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28회 김유정 기억하기 전국문예작품공모'에서 엄정현(춘천·운문), 김미정(경남 김해·산문)씨가 대학·일반부 대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공모 심사위원회는 최근 춘천문인협회 사무실에서 부문별 심사위원회를 열고 문치우(오천고 3), 이현재(용정중 3), 홍석현(남춘천중 2·이상 운문), 정지유(경희고 3·산문) 학생의 작품을 중·고등부 부문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등 모두 18명의 입상작을 최종 결정했다.

운문 심사위원회는 김유정의 작품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연결해 시로 풀어내는 작업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력을 요구하는데 입상작들은 통제된 형식 속에서 시어(詩語)를 풀어내는 실험정신이 눈에 띄었고 간결하게 시상을 풀어내는 잠재력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산문 심사위원회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전개해 가는 필력에 있어 좀 더 정진하면 차세대 작가로서 성장할 것이 기대되고(고등), 반전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상작은 흠 잡을 데 없는 문장력과 전개가 좋았다(대학·일반)”고 평가했다.

시상식은 따로 개최하지 않고 상금과 상장은 입상자에게 개별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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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생의 반려 / 김명래

 

[최우수상] 동백꽃 / 김효은

 

[우수상] 슬픈 이야기 / 박하성

[우수상] 이런 음악회 / 임아영

 

[우수상] 산골나그네 / 서희정

 

칼날의 등선 타고 올랐던 산골마을

희멀건 여린 숨결 객으로 숨어들어

나날이 설레임 안고 부풀었던 마음결

 

조각난 잿빛 안개 어느 결 돋아나서

허물만 벗어놓고 그리 급히 떠난 걸까

그날밤 따스한 온기 아직 여기 있는데

 

허망함 부여잡고 내달린 산모롱이

정답던 그 목소리 아스라이 멀어지고

뻐꾹새 울음소리만 흥건하게 젖는다.

 

 

심사평

202027회 김유정기억하기 전국문예공모전에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국문단의 큰 희망인 소설가 김유정은 한국문학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김유정을 기리기 위한 이번 문예공모전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다 높은 지식과 문장 표현력에 의해 상당히 냉철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작품으로서의 완성은 오랜 문장 작성상의 수련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이 결핍을 보완하는 노력의 뒷받침이 좀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졌습니다.

이번에 선정된 김명래의 김유정기억하기 작품 생의 반려는 문장면에서의 기본적 완성도와 김유정이 가진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작품의 완성도 양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른 차별성에 의해 평가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좋은 글쓰기로 계속 정진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심사위원/ 박민수 · 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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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베란다 / 김범수

 

물속에는 형이 두고 간 비늘이 많아, 모래성으로 갈 때마다 병든 비늘이 떨어져 있었지, 물이끼가 덮인 모래성 속에서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어, 꼬리를 수놓던 별들을 기억하는. 겨울이 시작되고 형의 몸에는 붉은 별자리가 새겨졌지, 피를 머금은 피부가 선연했어, 하루는 구름에 묻은 노을을 형의 객혈로 해석한 내가 미웠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모래를 잘근대던 그 밤

 

말했잖아? 볕이 잘 드는 뭉게구름 동산에서 일광욕을 하고 싶다고, 미지근한 물 대신 햇빛에잠기고 싶다고...

 

언젠가, 뭉게구름 동산으로 가고 싶어. 철새를 타고 형의 별자리를 찾으러 갈게. 형은 어느 성단을 헤엄치고 있을까?

 

여름이 우거지면 햇살이 내릴 거야, 별자리가 빛나는 날, 깨끗한 구름을 말려서 차를 우리자.

 

지느러미는 유리를 깨뜨리는 바람이 되고

 

 

 

 

 

[으뜸상] 잠수 / 조혜인

 

엄마는 아쿠아리움에 누워 전복을 딴다

 

여전히 숨을 참는 엄마

미역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

꾹 감은 눈덩이 아래에

그늘처럼 속눈썹이 드리워진다

 

빨리 나오세요, 엄마

엄마가 자리한 곳은 바다가 아니잖아요

 

이끼 낀 유리 너머로 자갈을 던진다

던지고 던져도

내 옆에 쌓이는 무게

 

엄마의 잠수가 길어지던 날

흰 침대 위로 문어 먹물이 흩어지고

바닥엔 해삼과 멍게가 나뒹굴었다

 

마음을 넣었다가 뺐다가

잠그지 않은 형태로 달이 떠오르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름을 입속에 오랫동안 가둔 날

바다의 소금기만 손금에 고여 있었다

 

 

 

[버금상] 엄마 / 이수미

 

여자의 어깨에 시간의 머리카락이 쌓인다

바늘은 시침보다 더 늦은 간격으로 실타래를 돈다

반쯤 감긴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잠깐 미열을 앓은 것 같은데 반생이 지나 있고

잘록한 허리에 휘감겼던 빗줄기들이

사선처럼 걸어와 바늘귀에 축축한 눈동자를 댄다

문밖에 서 있는 낙타의 얼굴을 눈을 슴벅거리며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점점 투명해지는 몸을 어쩌지 못한다

황망히 일어나 문턱을 넘으면

전생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여자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귀가

눈이 따갑도록 반짝거린다

돌아보면 마루에 백발로 지은 옷 한 벌,

여자의 일평생이 거기 쌓여 있다

문득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올,

바늘구멍 속으로 꿰어진다

그 실마리를 따라

낙타 한 마리,

비좁은 둘레의 구멍을 통과하는 중이다

 

 

 

[아차상] 마중물 / 이동우

 

 

여름 볕을 못 이겨 낮잠에 빠진 도시

치매 어머니 문제로 형과 언성을 높였다

불은 면처럼 끊기는 대화가 자꾸

목에 걸렸다

 

광장 분수에서 흠뻑 젖어 뛰노는 아이들

물기둥을 타고 튀는 웃음소리

물보라로 부서진다, 반짝인다

 

어릴 적, 어머니가 마중물 한 바가지 부으면

펌프는 마당 한가득 되돌려 주었다

수챗구멍을 따라 길게 이어지던 물줄기

우리 형제는 냇가에라도 나온 양

신이 나서 물장난을 쳤고

얼음장 같은 펌프 물이

등에서 부서졌다, 반짝였다

파닥이는 햇발 눈부셔

머리끝까지 적시던 그해 여름

 

질긴 장마철, 벽지 꽃무늬가

천장까지 검게 피어오르던 문간방

어머니의 한숨이 맺혀 흐르는 창 너머

술 취한 아버지가 비틀비틀 돌아왔고

나는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리곤 했다

어머니의 좁은 옷소매 끝에 숨어

밤새도록 등만 키우던 그해 여름

 

용기 내어 전화기 안으로

마중물 같은 말 한 바가지를 붓는다

형! 우리, 등목이나 할까?

또다시 솟아오르는 분수대 물줄기

화들짝, 도시가 낮잠에서 깨어난다

 

 

 

[장려상] 친구 / 김지용

 

나는 머리가 커서 제왕절개로 나왔습니다 그때 나는 문을 잘못 연 것 같습니다

 

나의 얼굴의 뒤편은 모과처럼 단단해요 쓴맛이 혀에 먼저 닿죠 나의 표정은 짓눌린 복숭아처럼 도려내고 싶습니다

 

내 친구는 거울 나는 항상 상이 다른 표정을 연습합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내 웃음이 싱그럽지 않은 이유는 비닐에 씌워져 있기 때문.

아버지는 흠집 난 것은 버려야한다고 내게 농약을 뿌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나는 자주 나무에 달려있는 기분입니다 난다는 건 어떤 걸까요 떨어진 과일은 나는 건가요 추락하는 건가요 둘은 다른 의미 인 것 같습니다

 

나는 낳아진 게 아니라 떨어진 거라고

다리 밑이나 황새 부리에서

 

어머니는 태풍 그러므로 나는 썩은 사과처럼 무른 등을 감추기 위해 교복을 벗지 않습니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이를 닦을 땐 혀를 열심히 닦았습니다 나를 포장하는 작은 잎

 

괜찮아요, 괜찮아요

바람에 흔들리듯 쉼 없이 말했습니다

 

나는 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들을 미워했습니다

벗기면 벗길수록 속과 겉은 다르니까요

 

내 속은 늘 푸른 맨살입니다

 

친구들은 물어봅니다 숨쉬기 힘들지 않냐고 나는 목까지 연기가 차올라서 입을 열 면 구름이 뱉어질 거 같아요 나의 일기는 말들이 쌓여 무거워지면 비가 내렸습니다 친구들이 포도송이처럼 뭉쳐서 집에 갑니다

 

나는 비를 맞으면 자라는 게 아니라 비틀어집니다

떨어지는 악몽 밖으로 자라는 나의 종아리처럼.

나는 더 높이 뛰어 다시 매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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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산 / 박해빈

 

누나의 산은 매일 누군가의 입술이다

 

입 모양을 보고 소리를 읽는 누나는

눈에서 멀어지는 산을 오를 때마다

기울어가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바람의 호흡이 가빠질수록

침묵을 소리로 메울 단어를 찾고 있다

 

혼자 산을 오르던 어제도

처음 만난 상대의 입술빛이 어두워져

가파른 말을 해석하다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웅덩이에 발을 빠뜨렸다는 누나

 

내가 젖은 양말을

말려주며 조심스레 물어봐도

또 입 모양을 못 봤다는 핑계를 댄다, 항상

김치와 치즈를 비슷하게 발음하는 누나

사진을 같이 찍으면 ㅈ 발음이 어려워서

김치도 치즈도 아닌 미소를 발음하던

 

닳아버린 소리를 가진 누나는

소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맑지 않은 밤에도 입술을 벙긋할 수 있게 연습한다

언젠가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나만의 소리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또박또박 정확하게

제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발음하는 누나,

누나가 흐릿한 날에도 산을 오르려는 이유

 

가장 큰 산을 넘기 위해 오늘도

작은 산들을 넘나드는 누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저만의 소리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뒤꽁무니에 내가

몰래 응원 한 마디씩 던지는지도 모르고

또다시 김치도 치즈도 아닌 미소를 짓는 누나는

마지막 정상을 향해서 간다.

 

 

 

 

[으뜸상] 폐교의 기다림 / 장서영

 

 

다 떠나도

 

이곳에 있을 거야

 

이 다음

이 다음에

추억의 징검다리 건너

찾아오는 사람 있을 테니

 

이끼

잡초

빈 그네가

같이 기다려

 

아이가 

어른 되어 찾아오면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뒤뜰 감나무에

부지런히 

감 익히고 있어.

 

 

 

 

[버금상] 산 / 김은경

[아차상] 나목 / 김태준

[장려상] 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 홍덕기

 

 

 

[심사평] 가보지 못한 길도 걸어가면 길이 된다

 

겨울의 끝자락이었지 싶습니다. 그때는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몰라서 무어라 이름 지어 부르지도 못한 채였습니다. 마스크 대란이 오고 세계 곳곳에서는 국경의 봉쇄가 이어졌습니다. 지구촌의 사람들은 우왕좌왕 하면서 저들을 ‘코로나 19’라고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생겨났지만, 저들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정확한 무늬도 모르겠고, 백신도 없고 치료약도 없는 이 이상하고 두려운 적과의 싸움은 하루가 다르게 조용히 퍼져나가 사람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을 빼앗긴 채 ‘거리두기’라는 아주 낯선 사회 현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언제 어떻게 어떤 생김새로 마감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미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안개 자욱한 미지의 시절에 박두진 문학관에서는 전국백일장을 개최했습니다. 암울한 시절을 건강하게 건너가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문학이, 문학만이 피폐해진 사람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는 신념으로도 읽혔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마음으로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문학으로 열어놓은 것입니다. 전국의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일반부까지 너무나 많은 원고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어나간 저들의 이야기는 모두 진솔했고 간절했습니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암울한 시절의 싯구는 모두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또한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나름의 모색이고 탐험이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도 걸어가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신념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투고된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정성껏 읽어나갔습니다. 암묵중에 약속된 상황은 오로지 작품만 보는 것을 가장 커다란 심사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에는 출신 학교나 지역 또는 학연과 지연 같은 미시 담론은 배재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 심사의 잣대로 초등부 4편, 중등부 4편 고등부 4편 일반부 4편, 그리고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상 1편이 선정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선정된 고등부의 ‘산’은 누구나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산’을 통해 가족애는 물론, 반드시 어려운 고비를 넘고야 말겠다는 힘찬 메시지를 적절한 비유법을 통해 잘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고통도 이겨내면 고유의 무늬가 될 수 있음을 담담하게 시사하면서, 함께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는 메시지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초등부의 ‘텅텅텅’은 코로나 19라는 작금의 현실을 뛰어가는 슬픔처럼 노래하는 주술적인 힘도 보여주었습니다. 중등부의 ‘산’은 전통 서정의 기법을 고수하면서 산의 의미망을 추억까지 끌어올리는 놀라운 비약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편 편의 시편 마다 모두 이 시절의 아픔이 짖게 녹아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이 고통을 진술하는 것이라면 시는 개인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은 정녕 갈 수 없는 것일까요. 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합니다. 길은 걸어간 만큼이 길이 된다고, 가보지 못한 길도 걷다가 보면 길이 된다는 것을 많은 시들은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응모해주신 전국의 예비 시인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또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박두진문학관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위원장.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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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꽃, 피어나다 / 김승욱

[으뜸상] 엄마 모습으로 / 김미영

 

[버금상] 구름 / 공성웅

 

[아차상] 꽃뜰 앞 / 서유진

[장려상] 능소화(양반꽃) / 강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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