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우옥자)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눈(目)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당선소감] “긴 기다림 끝 기쁨… 이제 또다른 여정 시작”
그날,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지만 어느 늦깎이 소설가의 출판기념식 참석차 공주에 가 있었다. 기대와 우려가 폭설이 되어 정처 없이 한옥마을을 덮는 밤. 절절 끓는 구들장에 풀어놓았던 몸을 추스르며 길을 나서고 있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구태의연한 말씀은 재미없다. 더 신선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발랄하고 더 엉뚱한 것을 즐긴다. 새로운 물건들, 새로운 언어들, 새로운 상상들이 차고 넘친다. 오래된 것들이 빛을 잃는다. 앞으로 걸어가는 데도 자꾸 뒤로 밀리는 것 같은 속도.
‘할 수 있을까’ 막막한 물음에 대한 회신이 도착했다.
내 손을 들어준 최동호 황인숙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자기가 기다리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오고 있는, 그러나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돌아보면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소녀시절부터, 지독한 페미니스트로 이 땅의 딸과 어머니로 살아낸 날들 속에도 면면이 오고 있었을, 지금도 오고 있고 앞으로도 오고 있을,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오랜 희망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자신을 불태우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신화의 새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구태를 벗겨내는 일은 더디고 혹독했다. 기쁘다. 자고 일어나도 기쁘다. 이 기쁨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를 지켜주기를 기도한다. 나의 당선이 누구엔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어둑할 때, 늘 불빛이 되어주는 경희사이버대학 김기택 교수님을 떠올리며 걸어왔다. 격려를 아끼지 않은 유종인 시인, 윤성택 시인, 마경덕 시인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랫동안 함께한 ‘새울음나무’, ‘글샘’, ‘책이 있는 풍경’의 文友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흡사 바다에 이른 강물이 비가 되어 다시 시원을 향해 떠나는 여정과 같은, 나의 詩를 꽃 피우고 싶다. 문단에 그늘이 되지 않도록 정진을 다짐해 본다.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심사평] “섬세하고 감각적인 목소리 돋보이는 작품”
신춘문예 예심 통과 작품이 담긴 봉투를 열어보는 건 사실 숙연한 일이다. 어떤 진기한 보석, 혹은 어떤 신비로운 식물이나 동물과 감전되듯 조우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지만, 그런 행운이 닿지 않더라도 봉투 안에는 자신의 생을 시에 걸어보려는 이들의 시적 감수성을 꿈틀거리게 한 삶과 최선을 다한 기량이 오롯이 지어낸 시편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 심사자들은 본심에 올라온 21명 응모자의 작품들이 다 고만고만하고 확 오는 게 없다고 착잡해했는데, 최종 후보자 세 사람을 두고 당선작을 고를 때는 다 뽑을 만한 것 같아 행복한 갈등으로 갈팡질팡했다. 같은 작품들을 두고 상이한 반응을 일으킨 원인은 아마 처음에는 너무 큰 기대치로 티끌 같은 흠도 잡아내게 됐고,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에서는 내려놓기 아까운 장점이 마음을 붙들어서이리라.
‘꽃밭과 물고기와 뛰는 물’ 외 4편을 응모한 정금하씨의 작품들은 깔끔한 감각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특히 ‘공중무덤’이 심사자들의 눈을 끌었는데, 자기의 기록을 깨는 게 목표인 운동선수처럼 그만한 웅숭깊음을 기준으로 시를 쓴다면 참으로 매혹적인 시인이 될 듯하다.
‘지난 시간은 풍경이 된다 해도’ 외 4편을 응모한 장정희씨 작품들 중 ‘은행나무 솜틀집’은 완성도 높은 따뜻한 시로서 재미있게 읽힌다. 리듬감 있게 언어를 이끌고 가는 감각이 범상치 않은데, 굳이 흠을 잡자면, 소재가 좀 신선도가 약하다.
당선자는 ‘돋보기의 공식’ 외 4편을 응모한 우남정씨다. 그의 응모작 중 ‘죽은 발톱’은 섬세하고 적확한 묘사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탄탄한 구조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지키는 힘은 저 묵묵한 마중에 있었다.”로 마감되는 희망의 메시지도 새해 첫날을 장식하는 신춘시로 제격이어서 물망에 올랐지만, 우남정씨의 감각과 목소리를 더 섬세히 음미할 수 있는 ‘돋보기의 공식’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축하합니다!
싱싱하고 싱그럽고 신선할 듯한, 새파란 청년 응모자가 줄어드는 추세는 아마도 생존문제가 절박한 ‘77만원 세대’에게 시가 사치여서가 아닐까. 문학에 뜻이 있었으나 생활에 쫓겨 ‘습작 단절’ 시기를 가졌다가 다시금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대로 묻혔으면 아까울 재능을 발굴한 듯한 즐거움이 각별하다.
심사위원 최동호·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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