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문서 /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당선소감] 불화 다독이다 알게 된 詩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치와 쓸모없음은 분명 어떤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던 핀잔들이 오늘, 이렇게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의 존엄은 지속 가능한 현재에 있다는,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던 충고도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한때 스스로와 타자 사이를 화해시키려 애썼음을 고백합니다. 그 불화를 다독이다 시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시를 보이고 들었던 악평들에 감사합니다.
뮤지컬 무대에서 수백 번 읽고 외웠던 가사가 어느샌가 노래로 쏟아져 나올 때, 붕붕거리던 노래가 다 빠진 그때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던 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의심을 믿습니다.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공연 끝난 무대의 쓸쓸함이 제게는 시였습니다. 노래는 제게 이율배반이라 힐책하고, 시는 주눅이나 챙기라 또 힐책했습니다. 이제 그 양립과 쌍방으로부터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정희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고 또 쓰겠습니다. 저 스스로가 양립과 쌍방이 되겠습니다. 움직이는 결단이자 따뜻한 소통의 지향점이 되겠습니다.
어머니라서 존경하는 신명희 여사님, 당신은 여전히 제게 확신 없는 난해(難解)의 밑줄입니다. 온정을 가진 내 소중한 오빠 이욱진, 영원한 지지자 아버지께 감사와 뜨거운 포옹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집을 선물해준 조해은 선생님! 격려와 지지를 주신 김종환, 권세훈, 조민영 은사님, 나의 애틋한 벗 성연지, 유은숙, 조민정. 고맙고 고맙습니다.
[심사평] 현란하지 않게… 돌에 비친 시대정신의 단면
신춘문예 투고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한국 현대시의 오늘과 내일을 파악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한다. 마치 아이돌 가수들이 현란한 춤 동작을 앞세우다 정작 노래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신춘문예 투고 시 또한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의 춤이 지나치게 현란해 시의 본질을 잃고 있어 안타깝다.
최종적으로 거론한 작품은 ‘그림자 꿰매기’(문수빈) ‘오늘의 기원’(김성열)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장현) ‘저녁 기도’(정동일) ‘망망’(이철우) ‘돌의 문서’(이린아) 6편이었다.
‘그림자 꿰매기’는 그림자를 통한 인간관계 실체의 탐구 정신이 엿보였으나 전반적으로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오늘의 기원’은 현실의 고통을 구체화한 점은 좋았으나 언어 사용이 구태의연하다는 점에서,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는 춤추는 남녀의 모습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저녁 기도’는 하루의 삶을 성찰하는 태도는 진지하지만 내용에 연결성이 없고 산만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망망’은 해도(海圖)를 인생과 역사의 지도로서 인간 해방과 자유를 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였지만 서사의 구체성 부족 등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선작 ‘돌의 문서’는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이야기로 읽힌다. 침묵을 옹호하는 시대에서 침묵의 증언을 요구하는 시대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이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안정적이어서 신인답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당선자가 돌에 새겨진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앞으로 두고두고 시로 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심사위원 문정희(시인),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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