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코마니 / 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꼬리 살짝,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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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작품, 삶과 같아 언제나 미완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아득하기엔 아린 나날이어서 먼 듯하지만 가깝고 가까운 듯하지만 먼 거리였다.
움켜쥐어도 끝내 잡히지 않는 햇살, 그럼에도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듯.
빛살을 엮어 만든 밧줄과 같은 인연의 힘으로 여기에 서 있다.
고마움과 미안함은 이따금 동의어로 쓰인다.
시를 쓰면서 그림을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시 쓰는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저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며 걸었다.
걷는 것은 견디는 것과 닮았다.
작품은 삶과 같아서 언제나 미완일 뿐, 오늘의 뿌듯함이 내일의 부끄럼이 되곤 한다.
하지만 등 뒤에 있는 시간처럼 이 또한 성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빛나는 밧줄을 길잡이 삼아 환한 저 너머로 다시 걷는다.
제 시의 맨 앞에 계신 이용헌 시인님, 박동기 작가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버지 어머니 큰모 삼촌 막모, 그리고 브라더 복문.
끝으로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뒷면에 감춘 저항의식…詩 본원적 매혹 느껴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
'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 이하석 시인·전동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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