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타임 스토리 / 김민서
물 속에 잠든 산이 고요하다
고수레를 하듯 떡밥을 풀고
바늘에 꿰인 구더기를 던지자
산등성이에서 곤히 자던 별들이 진저리를 친다
산을 흔들며 다가온 물고기들
입질만 하다 돌아가고
작은 흔들림에도 소스라쳐
낚아 챈 낚싯대에 물비늘만 파닥거린다
고기는 온다고
자넘이 참붕어가 퍼덕이며 온다고
물 속의 산 속으로 미끼를 던지지만
물의 살점만 뜯어 돌아온 빈 바늘들
상처를 여미는 가슴에서 물음표로 흔들린다
새벽 이슬에 젖은 별들이
야광찌를 물고
하나 둘 날아오를 때까지
물위에 떠 있는 이지러진 얼굴
수시로 확인할 때
강을 베고 누운 이마 위에는
매듭 풀린 바람의 차가운 손이 얹히고
부르튼 입술은 또 하루를 입질한다
자벌레 / 김민서
전셋집을 옮겨 앉을 때
꽃사과나무 한 그루 선물 받았네
볕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니
연둣빛 혀들의 수다는 즐거워
꽃 같은 사과 달릴 날 손꼽아 기다렸네
바람은 대추나무를 건너오며
가시를 세우는데
꽃 사과나무
어쩐 일인지 빛을 잃었네
짧아지는 겨울 해를 좇아 자리를 옮겨주어도
자꾸만 시들어가서
아주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아픈 가지 하나를 꺾으려다가
손가락 끝에 물컹!
가던 마음을 저버리고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음지의 탄력,
꽃 사과나무 시들어간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벌레 한 마리
나만큼이나 놀라
온몸을 오그라뜨리며 나뒹구네
어떤 보이지 않는 눈 있어
천연덕스레 꽃사과나무에 세 들어 살았네
어디에도 몸 두지 못한 바람이
생의 흐린 창문을 흔드는 이 겨울날
마른 꽃사과나무 가지 아래
꿈틀거리며 온몸으로 몸부림치네
매 맞는 여자 / 김민서
스쿼시
감옥의 죄수들이 하던 운동이라고 했다
뛰쳐나가고 싶은 갈망과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절망이
때리고 매 맞으며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공간
그 속으로
말캉한 고무공 하나와 라켓을 들고
스스로 걸어 들어가 수인이 된다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네 개의 벽면은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었고
노란 점박이 공은 끝없이 튀어나와
팔다리의 순발력을 조롱했다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할 일도 없는
안일이 온몸을 휘감아 올 때
안면몰수와 비웃음의 채찍
흠씬 맞으며
길들여진 것은
과연, 공이었을까?
봉선화 / 김민서
어디로든 스며야 할 마음들,
멍울져 맺혔다
멍울의 심장 짓이겨
생명의 즙을 얻으면
그 꽃들 스며
새로이
인연의 꽃 피어날 것처럼
불길해서 좋았다
모래집 같은 가슴에
봉숭아 꽃물 들이고
그대 간 뒤
손톱 끝으로 붉은 계절이 자란다
자라난 계절은 모두 사막이다
모래알을 헤는 뜨거운 시간들
서리찬 한숨으로 언다
불과 얼음을
한꺼번에 안기고 간 그대여
한때 우리의 꿈이었던
무사한 이 시간들은 차라리 병이다
아무런 증세도 없이 수백 년의 잠복기만 있는
자반고등어 / 김민서
배를 가르고
세속을 버린다
간물에 몸을 씻고
아가미 가득 마른 소금 채운다
터진 속살을 껴안는 소금의
짜디짠 포옹
모든 잡념이 증발한다
얼음송곳 찔러오는
생선가게 좌판에 누우니
한때 겁 없이 마구 삼킨
푸른 파도 출렁인다
멱목처럼 덮여오는 드라이아이스
거리에 주검을 펼쳐놓고
비로소 완성하는
결빙의 포옹
혼 나간 지체는 저리도 평안할까
짜디짠 결빙의 포옹 앞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던
마음의 배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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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 본명 김정란.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주소 : 서울 강남구 개포3동.
新 고려장 / 박정수
경로당 앞, 낙엽들을 시청에서 거두어 간다고 혹여 믿고 있지는 않나요. 바람은 뒷일을 책임지지 않아요. 누구 눈여겨본 적 있나요, 왕벚꽃나무 뒤를
장례식장 건너편에 경로당이 있어요 상갓집 신발들처럼 아무렇게나 벗겨진 낙엽들이 수북했어요 주.말.이.었.어.요. 속수무책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젊은 한때 일기를 지우듯 무거운 비질을 시작하는 노인들, 조급한 비질 같았지요 바람은 짓궂었어요 흩어지는 낙엽들이 달아나는 손자의 웃음소리로 들렸나 봐요 그저 껄껄 이번엔 느린 비질이었어요
또 다른 죽음을 축하해 주는 弔花가 장례식장을 들어가고 있었지요
몰래 넘겨다본 경로당엔 이 빠진 화투짝이 낙엽처럼 구르고 있었어요 지게에 업히지 않고 걸어온 이곳은 전기도 수도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햇살 드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지요 지방신문 조그만 기사처럼 읽혔어요 십 원짜리의 손놀림들이 국숫발처럼 힘없어 보였거든요 간혹, 훈수 두는 목소리는 창을 넘어 들렸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전화기는 영 소리를 울리지 않았어요 몇 번은 괜히 번호를 누르곤 음료수마냥 흔들어보는 순간 훅, 콧속으로 겨자씨가 들어왔어요
장례식장에서 멋진 리무진이 나오고 있었어요 뒤덮인 꽃들, 무엇을 축하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學生府君神位 / 박정수
세상 모든 祭日은 죽은 자의 어제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 엘리베이터 속으로 따라붙고
기억들이란 스틸사진처럼 덜미를 갖고 있다
갖고 있는 기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리베이터는 14층까지 오르고 이쯤 되면 세상의 모든 인기척들
가뭄에 콩 나듯 희박하다
紅東白西, 켜 있던 티비가 꺼지고 魚東肉西가 켜진다
신용불량의 과일차림이 마무리되고
겨울을 보낸 밤알의 벌레 먹은 자리가 꿈틀 흐려진다
늘 번창도 쇠퇴도 없는 둘째의 라이터가 켜지고 잠깐, 후손들은 꺼진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香연기에 매달린 祭主의 初獻이 거나해지는 동안
이웃집의 부부싸움은 절정에 치닫고
이제부터가 시뮬레이션이 좀더 진지해지는 때다
국과 갱물이 바꿔지는 동안
뒷짐을 진 막내의 지난밤 과음이 어슴푸레 흔들리고
혹시 집을 잘못 찾았나
구석으로 몰리던 사내의 음성이 아랫배까지 힘이 들어간 듯,
원래 제사란 건 죽은 자들의 어제가 아니겠는가
飮福을 하는 숟가락들 중 하나가 유난히 빛난다
마네킹 / 박정수
―독백
쇼윈도로 몰려드는 시선들, 나의 사랑은 늘 충전 중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녀,
누구에게나 나를 멋지게 소개하고 싶어한다
늦은 시간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녀
긴 생머리를 뒤로 젖히며
청바지에 줄무늬 후드티를 입혀주고는
눈빛이 상기되어 한 시간 내내 나만 바라보고 있다
저런 표정일 때 그녀는 유난히 입술만 붉다
연인처럼 그녀가 나를 안아 바닥에 눕힌다
눈을 감을 수 없는 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미니스커트 다리 사이로 나를 뉘어둔 채
내 엉덩이를 까고 바지를 벗긴다
하체와 분리되어 뉘어진 채 내가 폭발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을 수 없는데
오늘 그녀는 검정 망사팬티를 입고 있다
내 팔은 어디로 갔지,
그녀의 다리가 점점 길어지고
할로겐 열기가 내 심장을 자극한다, 밖은 깊은 어둠인데
그녀와 나 둘뿐인 공간, 달빛도 없는 밖은 더 깊은 어둠인데
순간, 그녀가 연인인 듯 나를 안아 올린다
내 하체와 상체가 결합된 순간,
나의 체액이 그녀의 손에 축축이 묻어난다
새로운 힙합바지의 지퍼를 올려주고 벨트를 채.운.다
분리된 양팔이 그녀의 숨소리처럼 헐떡, 내게로 왔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지금, 그녀의 입술은 더 붉어져 있다 그녀의 입술을 범했다
마.법.에.걸.려.멈.춰.버.린.나,
노루페인트 / 박정수
색깔을 그려내는 남자
녹이 핀 트럭을 타고 매일 같은 시간 가게를 연다
계절과 무관하게 신나 냄새나는 작업복이 벽을 타고 다닐 땐
그 빛깔에 스스로 취한 듯 흔들거린다
햇살은 그를 믿는다
붓을 잡으면 그 또한 햇살을 믿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늘 다른 서로로 갈아입는 것이다
비 내리는 어느 아침, 녹이 핀 트럭이 비를 맞고 있다
큰 눈의 노루 또한 통유리에 붙어 글썽, 눈물이 고인 듯하고
모처럼 커피 향기가 문을 열었다
오늘은 작업복이 아닌 낡은 청바지, 빗소리에 리듬을 타듯
제멋대로 그어진 페인트 자국은 싱싱한 빗줄기 같다
쨍쨍한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눈에 오늘은 무지개가 떴다
출장 중이란 팻말이 걸리면
가게 통유리엔 노루가 혼자 가게를 지킨다
秋 / 박정수
콩은 말을 아껴
말 많은 대추나무를 택한 것이다
타고 오른 넝쿨을 걷어 내리느라
남자는 뒤꿈치를 곤두세우며 안간힘을 쏟는다
여름내 들어준 이야기가 서 말은 되는지
올라간 넝쿨은 제 뿌리 쪽을 두려움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추나무가 꽃핀 시절부터 들려준 말들,
비밀이 많았었나, 자꾸자꾸 붉어지고
속말 한 톨 꺼내지 않고 넝쿨만 올린 콩은
꼭 다문 입술이 제법 단단하다
남자가 낫으로 넝쿨을 잘라낸다
줄기가 파삭, 두려웠던 것일까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놓는 말들
친구 배반하고 호박씨 까는 음흉한 뒷거래 같다
보증 빚 남기고 도망간 ?처럼
파삭, 파삭 와르르
낫이 목을 조였던 것이지
가을바람마저 낫질 해대는 남자
중얼중얼 서 말의 콩알보다 할말이 많아 보인다
맷돌 호박 하나 엉덩이를 깔고 헤프게 웃고 있다
모르는 채 단내를 내고 있는 대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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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 본명 박혜정.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제2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당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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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풍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시인의 총 인구수가 무려 2만 여명에 이른다 한다. 80년대 초반 1,000여 명에 이르던 숫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수적 증가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풍문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풍문에 의례 실리게 마련인 어느 정도의 과장과 허세를 감안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역사상 전례 없는 시인공화국 시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증가 추세라면 일본 하이쿠 시인의 숫자 5만 명을 따라잡는 날도 멀지 않으리라. 시인의 숫자가 많아서이겠지만 일본 시단의 경우 시인과 독자 사이의 거리나 경계가 거의 없어진다고 한다. 창조자 혹은 생산자(시인)가 바로 수용자 혹은 소비자(독자)이고, 독자가 바로 시인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단도 일본의 경우와 흡사한 조짐을 벌써부터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외연 확대가 반드시 부정적 현상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자원 속에서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낼 고전적 명편들이 내재, 산출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문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시단에 적용될 경우이다. 양적 확대가 질적 발전이나 향상을 위한 토대가 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외연 확대가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거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과연, 미상불 우리는 시의 르네상스를 구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학의 종언이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평단 내외의 우려 섞인 진단과 달리 문학 현장에서의 창작의 열기는 날로 뜨거워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유한 사례에 해당되리라. 이는 고무적 현상으로 우리 문학 지형에 있어 지적 목록이나 재산이 될지언정 결코 냉소나 폄하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거듭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열기가 창조적 생산을 결과하는 것으로 작동되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도 많은 시인 지망생들(180명)의 응모작들이 있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20명 가운데 우리는 박정수, 김민서, 심기랑, 이병기 등 네 분의 시편들을 각별히 주목하여 꼼꼼하게 읽었다. 오랜 숙고 끝에 김민서 씨와 박정수 씨를 2008년 제6회 『시작』신인상 당선자로 꼽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박정수 씨의 시편들은 일상의 세목에 주목하여 그것을 언어 형상미학을 통해 구조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가령 소외 계층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일 때에도 그것이 연민이나 동정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대상과의 일정한 미적 거리와 객관성을 지킴으로써 감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오랜 시력의 경험이 아니면 구사하기 힘든 언어의 장악력도 돋보였다.
김민서 씨의 시편들은 하나같이 구조의 안정감이 돋보이고 또 시의 세계를 맑고 투명한 언어로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녀의 시편들에 구사된 언어의 결은 체를 통과한 가루처럼 곱고 섬세하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세공으로 그녀는 우리 현실에 미만한 무거운 삶의 문제들을 촘촘히 엮어내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이병기 씨와 심기랑 씨의 시편들 또한 충분히 주목에 요하는 시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병기 씨의 경우 시의 상상력이 현실의 물적 토대에 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 심기랑 씨의 경우 제출된 작품들에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시인 2만 명 시대에 진입한 두 분 시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비상한 각오로 '시작(詩作)'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름뿐인 그 흔한 시인이 아니라 우리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는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초심을 잃지 말고 초지일관하는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낙선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심사위원 : 이재무, 이형권, 유성호, 홍용희, 김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