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에 관한 기억들 (외 4편)
김정웅
1
이따금
추억의 부피가 더욱 커지는 날이 있다 똑, 똑―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 완전히 잠글 수 없는 마음에는
배수구를 낼 필요가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이 더러운 그릇들이 마음이다
싹싹 비우지 못한 그대가 여전히 많다
2
자주 영혼을 엎지르는 사람은
쉬이 타인의 인생을 더럽힌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산다는 거,
나는 나를 벗어 어두운 세탁기 안에 넣는다
세탁기가 돌아갈 때는 소리내어 울어도 좋을 것이다
단번에 울음을 끌 수 있는 전원 버튼이
몸에도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3
이 모든 일상적 불행은
있지도 않은 고기를 찾아 김치찌개를 뒤적대거나
아버지의 작업복을 몰래 뒤져
담배 몇 개비를 꺼내는 것과는 다른
슬픔, 물을 갈다가 깨뜨린 꽃병,
산산조각이 난 외부를
병의 주둥이는 꽉 붙들고 있다
함부로 엎질러진 입구는 견고하다
가장자리의 힘
버림받은 것들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모인다, 지난 봄
꽃잎이 모인 길가로 다시
낙엽들이 모이고, 너의 부드러운 내부로
차마 들어가지 못한 나는, 그대의 생
그 아름다운 가녘을 따라 아주 천천히 걷는다
아무 사연도 담지 못한 빈 소주병이
밀려오는 해변이나, 점점 그늘을 밀어내는
산자락을 따라,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걸어 본 자는 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왜 세상의 경계로만 모이는지,
검은 머리칼 흩날리며 가는 저 황혼은
너의 내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外界의 색이었음을, 내 몸의 끄트머리
손발톱처럼 가장자리는 단단하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내도
다시 자라나는 힘이 있다, 여러 번
사랑에게 버림을 받고도
가장자리계*는 쉬이 망가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모든 버림받은 것들이 모인다
끈질긴 숨을 몰아쉬면서,
―――
* (대뇌)변연계. 감정, 욕구, 기억 등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핵 근처에
대뇌반구의 가장 안쪽 모서리를 따라 있는 몇 개의 뇌 구조의 집합체.
나는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밤
잠에서 깼을 때 눈가에 물이 고여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내가 낙타를 사랑하기 전에 낙타의 등은
반듯했었다 낙타의 등이 굽은 이유는
나의 사랑이 굴곡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막이다, 뱀이나 전갈처럼
한껏 독을 품지 않으면 추억들은 견딜 수 없다,
미라처럼, 죽은 후에도 차마 썩지 못하고
끝끝내 견뎌내야만 하는 사랑이 여기에 있다,
그 어떤 그리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지독한 내륙에서 길을 잃은 사랑, 매일 밤
사막이 비를 그리워하듯* 그대가 그립다 그러므로
잠에서 깼을 때 비가 내리고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두 번 다시
내 생에 범람하지 못할 그대,
지금은 어느 곳에서 비를 뿌리고 있을까
하늘을 향해 쩍― 입을 벌린
목마름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발자국을 지워도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격정의 밤, 나는 마침내
잎을 모두 뜯어 삼키고 메마른 나무처럼 버려진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나를 견딜 수 없다
―――
* 팝그룹 EVERYTHING BUT THE GIRL의 노래 「Missing」중에서.
** 집회서 6장 3절 중에서.
내 귓속에 도청장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내 귓속 달팽이들이 우,우─ 하고 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우─ 하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술을 모르던 어릴 적, 귓속에서 달팽이들이 우는 날에는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나는 내 살을 꼬집어 비튼다. 비틀은 지리마다
스멀스멀
달팽이들이 기어다닌다.
내 고통이 낳은 달팽이들이 너에게 가 닿으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고통에도 모양이 있다면
나선형일 것이다.
사랑이란
맨살에 나사를 조이는 것,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나사처럼 몸을 말고
내 심장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달팽이의 짓무른 살점이
나사처럼 단단해지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손바닥으로 탁─탁─ 귀때기를 때린다.
그녀가 떠나며 박아 넣은
내 귓속 도청장치, 달팽이들이 죽어버리도록…
여전히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저수지의 개들
한여름마다 꼭 시체가 떠오르는
이 저수지는 쉽게 들키지 않는다 뛰어내리기 좋은
절벽들은 낭만적이다, 산등성이에서
달려 내려온 숲의 속도가
짙다, 사람 얼굴을 뒤집어쓴 개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람 얼굴을 뒤집어쓰지 못한
개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올랐지만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천박한 사운드가 너무 커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개들은 취해 버린다
임자 있는 몸이 임자 있는 몸을 희롱하고, 모든 사랑은
개수작이었다
바짓말을 적시며 물가에서 뛰어노는 저 아이들은
속옷이 완전히 젖는 날 어른이 될 것이다
개가 개를 먹고
개 같은 하루가 가고, 저 저수지 속
물고기들에게 살점을 툭툭 떼어 던져주고 싶은,
더 줄 것이 없어지면 마음까지
모두 내던지고 싶은 날들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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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웅 / 1980년 서울 출생. 2007년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주소 : 서울시 금천구 독산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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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 (외 4편)
기세은
아빠는 등푸른 생선을 즐겨 먹다가
바다로 떠났다
그 이후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랄 때마다
파란 물고기도 무거워진다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의혹이 심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루는 미용실에 갔다
파란 물고기가 다치지 않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더니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아빠가 불쌍해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두통이 심해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바다로 찾아갔다
머리를 흔들어 댔지만
파란 물고기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빠 하고 불러 봤더니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들어오라 한다
지느러미가 없다고 했더니
너는 이미 등이 몹시 푸르께하다고 하며
군침을 삼킨다
―――
* 천경자 화가의 그림 제목.
눈부신 방
매트 위에서
나는 혼자였다
뒤꿈치 들고 걸었더니
둘이 되었다
퍽 놀랍기도 했다
서로에게 누구시오 라며 질문을 해댔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심심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그랬더니 셋으로 늘어났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묻는 것은 피차 예의상 그만두었다
앞구르기로 가서
뒷구르기로 되돌아왔다
도무지 부딪히지도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곧 이어 넷, 다섯…
점점 수가 늘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각기
되돌아갈 시간에 사라졌다
퍽이나 고요한 하루였다
도드리*
나는 당신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어른이란 의미를 몰랐다
매일 매일
당신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날이 귀와 눈이 멀어져갔다
반년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똑같은 설명만 반복했다
드디어 모든 감각을 상실하자
나는 어른 흉내를 내었다
당신은 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매일 매일
당신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춤을 췄다
당신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어른에 대한 불신을 키워 나갔다
당신은 반항하기 시작했고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방심한 나머지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당신이 어른이 될 차례다
나는 색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다
―――
* '다시 돌아서 들어간다'는 뜻.
마녀 사냥
그녀는 원래부터 마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비밀 하나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토로하려 했으나 친구들은 외면했다
답답함에 매일매일 가슴을 두들기다
파란 멍이 생겼다
눈물이 났다
파란 눈물이었다
파란 눈물을 병에 담아두고
매일 밤 파란 눈물을 머리카락에 발랐다
그녀가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파란 머리카락의 색다름에 반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병에 담긴 파란 눈물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가슴을 세게 두들겨도
더 이상 파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빈 병만 남았다
파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즉단했다
베스트 프랜드
친구야, 친구야
작년 너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나는 앞날이 막막하다고 했어
나는 다 지나간다고 했어
얼마 전 우연히 너를 보았어
너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
깜짝 놀랐어
눈알이 보이지 않았어
그동안 너에게 무심했던 나는
크게 낙심했어
세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
눈을 감아도 다 보였어
그래서 너의 눈알을 되찾아주기로 했어
먼저 파출소에 신고하고
눈알이 갈만한 장소에 눈알 찾기 포스터를 붙였어
라디오 사연으로 올리기도 했지
방송되자 눈알을 비난하는 댓글이 빗발쳤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눈알을 생각하자
눈알이 빠질 듯 아팠어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알이 네 개나 있었어
너를 찾아갔어
너는 예전보다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줬어
내 덕분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했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너와 헤어졌어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네가 생각나지 않았어
다음 날
나는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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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세은 / 1984년 출생. 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 4학년.
주소 : 서울시 강동구 성내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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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회 시작 신인상 심사평 】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젖힌 채 감탄에 젖게 된다. 그곳에는 신의 영감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 〈천지창조〉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바탕 한 〈천지창조〉의 연작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아담의 창조〉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서로 연속성을 이루고 있으나 완전히 마주치지는 못하고 있다. 연속성과 단절이라는 모순 명제가 미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완전히 합치되지 못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를 지향하고 갈망하면서도 항상 갈등, 분열, 파행의 세속적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마주치지 못한 미세한 거리, 여기가 바로 지상에서 끊임없이 시가 생성되는 자리가 아닐까? 시는 현실과 꿈, 세속과 신성, 하강과 상승의 틈새에서 그 불연속성의 초극을 위해 전전긍긍 고투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정치권의 퇴행적인 행태와 경제적 한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 속에서도 더욱 늘어난 2009년 제7회 《시작》신인상 투고작을 마주하면서 시를 생성시키는 동력은 불화와 고통의 공간이라는 원론적인 명제를 새삼 더욱 깊이 환기하게 되었다. 120여 명의 1,5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 시대의 결핍과 원망의 시적 삶의 현장과 화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김정웅과 기세은의 작품을 2009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기세은의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은 날카롭고 경쾌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진경을 싱그럽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슬픈 전설"의 환정적인 토로나 "모든 감각을 상실"하면서 "어른"이 된 과정을 노래한(「도드리」) 시편들에서 매우 "색다른 혁명"적 언어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 김정웅의 응모작들에서는 그늘 깊은 삶의 언어를 표현하는 숙성된 솜씨를 만끽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 나를 견딜 수 없다"(「나는 사막이다」)와 같은 진술은 "마음까지 / 모두 내던지"(「저수지의 개들」)는 시적 삶의 열정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응모작들의 고른 수준도 믿음직한 기대를 갖게 했다. 서로 시적 성향은 다르지만 문학적 성취도에서 오늘날의 우리 시단을 선도적으로 헤쳐나갈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공동 당선을 결정했다. 거듭 축하하며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 홍용희, 유성호, 김춘식,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