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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쓴 가족 / 한우진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겨울 유서遺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
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
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
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
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
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
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
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
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부록》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가구를 바꾸며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가구에 들러붙어 있는 기름때를 닦는다.
가구하고 내통해 본 지도 오래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욕망은 트고 꿈은 자주 삐걱거린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아내의 문 열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갈망은 굽은 빨래판처럼 뒤뚱거린다
일요일마다 나는 빨래판 위에 빨래처럼 누워도 보는 것인데
아내는 오자誤字투성이 내 몸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인데,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냄새와 시너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네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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