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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야 놀자/ 최성희(2006 시작 신인상)

  

닭처럼 그는 날았다.

3층 베란다에서 활주로도 없는 정원을 향해 날았다.

햇빛도 날고, 반바지도 날고, 휴일도 날았다.

공중에 떠 있는 가볍고 물컹한 機體를 발견했을 땐 이미

가속도가 붙은 추락을 제어할 수 없었다.

두 팔을 뻗어 힘껏 저어보았지만 헐렁한 슬리퍼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새들이 앉았다 간 감나무를 지나

꽃 진 철쭉을 지나

땅에 묻힌 장독 위에서 그는 허우적거렸다.

부러진 감나무 가지가 통닭구이처럼 턱과 입술을 꿰고 있었다.

도망치던 토끼는 좋아라 베란다를 뛰어다니고

- 토끼는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

현관 입구 청동조각상이 몰래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꺾인 다리를 끌며 기며 그는 토끼를 불렀지만

터진 입 안을 맴돌 뿐이었다.

정원을 내려다보는 토끼의 눈이 빨갰다.

토끼의 눈은 원래 빨갛다.

 

 

 

 

물푸레 치맛자락 아래서 / 최성희

 

물푸레물푸레 그늘이 그리워

종종걸음으로 찾은 숲속, 햇살이 음탕하다

저 햇살 듬뿍 받아 마시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잎사귀들의 노래가

수런수런 바람결에 나부낀다

푸드득 호객하는 새와 물과 바위들

햇살이 닿는 곳마다 즐거운 교성이 터진다

초록이 주섬주섬 초록이 더듬더듬

나무가 나무를 낳고 짐승이 짐승을 낳고

바람이 바람을 낳는 숲속은 지금

한바탕 떠들썩한 잔치로 온통 질퍽질퍽하다

물푸레 치맛자락 아래서 힐끗 올려다보니

나무들의 陰毛가 땅속 뿌리가 아닌

공중에 달린 저 야들야들한 잎사귀인 걸 알겠다

숲이 왜 치맛자락 펄럭이듯 흔들리는지

기둥들은 왜 모두 하늘로만 솟구쳤는지

저 음탕한 잔치에 몸을 맡기고 교태를 부리면

누군가 은근슬쩍 슬립을 벗기고

귓불이라도 훅 물어줄까 꼭지라도 만져줄까

온종일 물푸레나무 치맛자락 아래 누워

물푸레물푸레 소리를 듣는다

 

 

 

 

얼굴 없는 책 / 장자영(2006 시작 신인상)

 

 

검은 책들을 거꾸로 꽂으며

줄곧 동경해왔어 나무의 성난 얼굴

밑줄을 그으면 핏방울 맺히는

실체로서의 활자 말이야

 

색 바랜 책장을 넘기자

구부러진 초침들이 흘러나온다

사진 속의 너는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극도로 팽창된 한 얼굴을 핥고 있다

 

부적절한 페이지를 달리는 기억

 

날 선 종이가 나무를 찔러보지만

흔한 고백조차 없고

비명대신 침묵이 쏟아지는

성난 얼굴을 거꾸로 꽂으며

 

검은 책들이 중얼거린다

인생은 얼굴 없는 연애에 불과해, 라고

 

검은 책의 나이테가

듬성듬성 사라져간다

아삭아삭 초침을 씹어 먹는 네게

나무의 몽타주를 묻고 싶지만 대신

사라진 활자 아래

밑줄을 긋는다

 

 

 

 

가난한 방 /장자영

 

   나의 위로는 초라하고 부적절했다

 

   아이들이 신음하며 입가를 닦는다 칠년 전 지금을 경험한 적 있는 일곱

살 어리고 일곱 배 작은 난쟁이가 낮은 환호성을 지른다 부끄러운 장갑들

이 감춰진다 세상의 모든 예식이 최소되는 무거운 생리통의 밤

 

   모든 준비는 과거형이다

   소문뿐인 연애를 굳이 끝장낸

   밤, 어제

   무의미한 굶주림이 잠들자 외롭지 않은 밤이 지상에서 사라진다 끝없이

연기되는 결혼식 그들도 난쟁이를 궁금해하는지 숫자들의 결합 없이는 어

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가능의 밤 누군가 눌려 죽어도 아무 일 없고 일곱 살

어리고 일곱 배 작은 머리통이 긴 레드카펫 위에 떨어져도 외롭지 않은 사

람이 없다 일요일, 오늘

 

   난쟁이의 꿈은 키에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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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사랑법 / 이정원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치독을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독 안으로
한없이 꺼져들어갈 것이네





깊은 무덤 / 이정원

풀섶에 숨어 있는 호박 한 덩이
반점이 푸릇푸릇하다
검버섯 가득한 노파가 풀 무덤 속에서
물결 주름 바싹 야위고 있다
노파의 몸 어느 구석에선가
맑은 풍경소리 들린다
마른 풀들이 품고 있는 미라 한 구
최선을 다해 마음으로 품은 것들은
저렇듯 썩지도 않는구나
바람결에 시나몬* 냄새,
마른 풀들을 잔디처럼 덮어주었다

* 시나몬: 미라를 만들 때 쓰던 계피향의 방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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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계간「 시작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생일전야 / 이영옥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순간에는 어떤 기억도 저
항하지 못한다 남자의 몸이 파닥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의 주변으
로 살비듬같은 햇살이 잠시 푸슥그렸다 호주머니 속에서 끌려나온 유서는
창백했다 세상의 고통들은 왜 똑같은 모서리를 가질까 남자의 절망은 여러
번 접혀진 채 천천히 닳아왔을 것이다 휘갈겨 쓴 모음과 자음들이 더듬거리
며 남자를 변명했다 생일전날 날짜가 맞아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남자의 수학
적 강박 때문이었다 TV를 켜자 아홉시 뉴스앵커가 알맞게 경직된 하루를
부검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은 놀란 동공처럼 아득히 뚫려 있고 남자의 반
지하 단칸방에는 미역이 양푼을 검게 부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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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03년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마늘까는 여자 / 채상우


 그 여자 마늘 까는 여자 녹슨 놋쇠대접만한 손으로 궁시렁궁시렁 마늘까는

여자 삼칠일 지나고 하루 지나도록 아무도  그 여자 얼굴 본 적 없다네  던킨

도너츠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 떠억 하니 세워진  덤프 트럭  시푸른 차일 속

비스듬히 돌아 앉아 하루죙일 마늘만 까는 여자 사타구니 쩌억 벌리고 그 안

가득

  마늘만 까대는 여자 육쪽마늘 한 접에 오천 원 팻말만 붙여 놓곤 손님이 와

도 시큰둥 내다보지도 않는 여자  미어터지도록 깐 마늘 담은 비닐봉지 누가

슬쩍 집어 가건 말건 그 여자 무심한 여자 곰 같은 여자 벌써

  삼칠일 하고도 하루가 지났건만  아찔한 마늘 냄새 풀풀 날리는 토굴 속 웅

크리고 앉아 육차선이 흘러 넘치도록  마늘만 까는 여자  사람들이야 퇴근을

하건 말건 주절주절 또 하루 저물도록 마늘 까는 여자  그 여자 귀신일까  사

람일까 귀신은

  아닐 거야 마늘 까는 귀신 본 적 있남  아님 정말 곰인가  그래 곰이니까 삼

칠일 하고도 하루 지나도록 마늘만 까대지  그러고도 암시렇지도 않지  곰이

니까 말야 곰이니까 마늘만 까먹고도 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 우리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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