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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만드는 골목외 4편

 

류명순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처럼 슬픔을 진열한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발걸음을 덮어쓴다

경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켠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한다

 

바람이 갸웃거리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고문은 진화 한다

 

  불시에 나를 구속한 스티븐 존슨*은 희대의 고문기술자다. 눈을 떠 빛을 데려오면 그는 내 장기마다 하루 치의 수명을 부여한다. 오늘은 그가 되돌이표 그려진 악보처럼 나를 연주 한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음표를 벗어난 신음을 뱉어낸 적이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첼로 현처럼 휜 척추로 연주했고, 십 년 전에는 각막에 펼친 건반을 올려 차며 연주를 했다

 

  그가 내게 배려한 유일한 자유는 목숨이다. 나는 사디스트가 되어 나를 때리고 마조이스트가 되어 고통을 충전했으므로 내 목숨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나는 희열이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통증으로 사정을 완성하던 날, 그는 새로운 고문기술을 접목했다. 손톱이 뽑힐 때 음역 밖의 신음을 연주한 것은 실수였다.

 그가 내게서 손톱과 닮은 둥근 각도를 찾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발톱을 뽑아내고 앞니를 뽑아내고 각막을 뽑아내고 결국 양지에서 나를 뽑아 음지에 가두었다.

  눈을 떠도 빛을 데려오지 못하므로 나의 하루는 길이가 없다. 열쇠가 없는 안구의 독방에서 내 묵비권이 완성됐다. 내가 내게 종신형을 언도하자 고문이 멎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열쇠를 목숨에 꽂아놓고 사라졌다.

신음을 연주해서 형기를 채워야 하는 내가 고통 없음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을 때,

  나는 외로움을 비틀어 고통을 초대한다. 그가 내 장기를 하나 둘 두드려 깨운다. 나는 목숨에 없는 빠른 박자로 신음을 연주한다. 그가 관장하는 하루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존슨: 약물 알레르기로 눈의 점막을 손상시켜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

 

 

 

 

사람의 품

 

미루나무 껍질에서 나이테의 파동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손가락 한 마디씩 늘인다

이파리가 그늘의 나선을 돌린다

 

넓어지는 그늘에 내가 얼룩 하나로 섞인다

 

내 잠꼬대가 다른 사람 호흡으로 바뀌자 그늘이 확장을 멈춘다

옹이 빛깔의 눈동자가 전생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이 기도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합장의 어둠을 열고 무작정 걸어 들어간다

매일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길 끝에

내 얼룩과 마침맞은 공간이 파여 있다

 

먹는 자세를 하고서야 꿈을 꾼다

한 사람이 손 그림자로 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품에 안긴 내가 그늘의 속도로 자란다

 

아기 발길질에 얼룩이 깨진다

내가 서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내 눈동자에 한 사의 얼룩이 고여 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외우려고 하자 그늘이 나를 팽개친다

그늘이 사지를 숨기며 미루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얼룩을 품으로 키워내면 어머니가 된다

 

 

   

형법 제38조

  

충혈된 눈에 들어온 형법 제38조가 수갑을 채운다

방안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서른여덟을 염탐하는 담쟁이가 방안을 기웃거린다

법전 속에 숨긴 법문이 미궁에 빠져든다

승자독식사회의 알리바이를 밝혀내기 위해

육법전서의 침묵을 몇 년째 추적해 보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제자리 잠복 중이다

 

그림자를 체포해 가는 그믐달이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머니기도를 의심스레 쏘아본다

잠을 취조하는 시계 소리에

별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또다시 법률사전을 비워내야 하는 공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파산선고를 받은 등골뼈들이

호시탐탐 무릎까지 넘보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 사랑을 수첩에 기록하고

날 선 법과사전에 시선을 책갈피로 꽂아두면

두 눈에 고여 있던 하늘이 빛을 흘린다

법복보다 더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고시촌 하늘엔 별도 법문처럼 뜬다

 

 

 

   

무덤으로 가는 앤디워홀

  

나를 버리러 지하로 간다

캔버스와 판화도구 버리러

내가 사랑하던 마릴린 먼로도 버리러

세상의 희롱과 박수까지 버리러

주유소도 편의점도 없는 지하의 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혼자의 길

 

누구 하나 환호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사물들, 구조는 단순하다

주검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도 없는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나를 다녀간 사람들이 기록해둔 필름처럼

기억이 기억을 물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문득, 까마귀가 울 것 같은 적막이 몰려들고

붓을 든 낯선 손을 따라

무덤속이 밀밭으로 변하고 있다

복제된 그림이 제멋대로 불어나 무덤을 밝힌다

 

버리는 것은 끝이 아니고

또 하나의 부재를 달고 새롭게 태어난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린 내 몸이 한없이 추락한다

낯선 내가 나를 붙잡아 콜라병에 담는다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류명순 :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재학 중.

저서 :  잃어버린 20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외 4편

 

김명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나 이제 돌아서려네 고개 숙이고 있던 수은등이 마지막 시선 한 조각을 떨어트리네 당신의 눈길이 차곡차곡 쌓인 골목 내 기다림에 닳고 단 모퉁이 당신의 체온 대신 깨진 벽보 한 장에 기대네 더 이상 당신이 내가 아닌 첫 시간, 눈 감은 수은등 대신 당신의 방을 지키려 하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손을 쥐고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빈손이었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과를 깎는 일과 같더군 손을 베이고 나서야 나를 향해 칼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네 당신을 코르크 마개처럼 빼낼 순 없겠지 하지만 이제 배경이 되어야 할 시간 그동안 고단했을 수은등을 놓아줘야 할 뿐 초승달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네 나와 눈이 마주친 별들이 하나둘 흥건히 떨고 있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이제 당신도 상상이 되려하네

 

 

 

 

한 짝

  

신발 밑바닥의 껌 딱지처럼

누구라도 붙들고 싶은 날

인력소개소 앞에서 악수를 청하는

목장갑 한, 짝

길을 베고 때 묻은 얼굴을 붉히며

처음인 듯 서툴게 망설이며

어쩌면 목장갑은 일용직 잡부로 못 박혀

붉은 빨판으로 쇳조각만을 붙잡았을 것이다

만난 적 없기에 더 닿고 싶었을 체온

어느 누구도 왼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관심에 차이는 깡통마저 부러웠을 날들

골판지 상자가 손 잡아 줄 만도 하지만 이미

킬로그램당 백이십오 원이 수거해 갔을 것이다

무관심이 시간당 백오십 미리로 쏟아져

상처난 손가락 끝을 때린다

단물만 뺐기고 뱉어진 내 마지막 퇴근길에

손 내미는 목장갑 한, 짝

 

그래, 악수

 

 

 

 

루어

 

내가 낚싯감이었던 거야

 

빛살이 되어 파도의 속살을 가로질러 덥석

싱싱한 기대 대신 입술을 꿰뚫은 날카로운 착각

몸부림칠수록 미늘은 깊숙히 박히고

부레를 부풀릴수록 낚싯줄은 긴장

비늘을 움켜쥐는 또 다른 바늘들

빼곡한 통점을 털어 버리고 싶지만

그것마저 놔주지 않는 악력

바다를 배경으로 훌라춤을 출렁이던 여자는

산호도 진주도 아닌 루어*일 뿐

 

세상을 사냥할 수 있다는 확신은

결국 세상에 낚였다는 관통상이 되지

아가미를 열어 납추 같은 한숨을 떨어트린다

이젠 먹이의 배경에 언제나 바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나인 거야

온몸을 찢어 바늘과 헤어져야지

이젠 루어를 만들어

촉수를 감춰야 할 나인 거야

이젠 내가 세상을 속여야 할 차례인 거지 

 

나는 루어(淚漁)

 

*루어(lure): 생미끼가 아닌 눈속임용 미끼로 플라스틱이나 금속 재질로 만든다.

 

 

 

 

아내의 시집

 

   아내는 어느새 셋방살이 같은 잠에 빠졌네요 가게부에 밥풀처럼 납작 달라붙어서요 의류수거함 대신 아내 차지가 된 제 뜨게옷의 보플도, 때 넘긴 파마머리도 투정을 거두고 같이 잠들었네요 아내는 쪽잠 속에서도 흥정을 하는지 깎아 달라고 잠꼬대가 졸린 눈을 비비네요 저는 생활정보지를 접고 말을 걸어 봅니다

  -마수걸이라 그렇게는 안 돼요

  -그래도 깎아… 주세요

  된소리를 발음할 때마다 아내의 눈썹 사이가 구겨져요 아내가 젖몸살을 앓으며 걷던 가계부 속으로 눈길을 피해 봅니다 올 나간 우리 가족을 숫자와 기호로 옮겨 놨네요 북쪽 말로 남편은 '나그네'라던데, 저는 아내의 가게부에서 길을 잃네요 매일 생리통을 앓는 가게부는 아내의 시(詩)네요 한 장 한 편 한 편 이미 아내의 시집(詩集)이네요

  -그럼 그렇게 가져가요, 아가씨

  미안함에 선심을 써 봅니다 덤으로 싸 준 아가씨란 말에 에누리 없는 웃음이 커져요 비닐 봉다리에 제 것과 애들 것만 담아 꿈길을 돌아올 아내 저는 꿈에서마저 시를 쓰느라 부르튼 아내의 두 발을 주무르네요 아내의 거친 발톱이 오늘 왜 이리도 제 눈을 찌르는지, 왜 이리도 제 가슴에 박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네요

 

  남쪽 말로 아내는 '가시'라고 하데요

 

 

 

 

생명선 기차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때문일까

빗소리 때문일까

최선을 다해 울어 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누구의 잠도 건드릴 수 없는 물결무늬

몸에 꼭 맞던 잠을 벗어던지고

아이를 건져 올린다

불인한 아이의 손끝이 내 눈을 더듬는

순간, 본다

손바닥을 힘껏 달려야 할 생명선이

시작하자마자 잘려 버린 것을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사이로 아이의 울음이 침목이 된다

창문 너머에서 미안한 듯 서성이는 빗소리

아이도 눈물 자국 같은 생명선을 따라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변명밖에 모르는 처방전에

건널목 차단기를 내린다

나는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

아이의 시든 생명선 끝에

바다를 향해 달릴 철도를

잇고 잇고

또 잇는다 

 

 

김명호:

1977년 서울 출생. 이후 전주에서 성장.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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