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시작 신인상 당선작] 김영호 배지영
■ 고공에서 외 4편 김영호
고공에서
황조롱이 한 마리가 바람과 주파수를 맞추는 중 고층건물에 오르면 창문이 자주 흔들려 자꾸만 속삭이는 통유리 진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실외가 아닌 실내
조용히 실체와 그림자가 어긋나는 중
이것은 어느 봄날의 연애 이것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 두 여자의 사랑으로 끝나는 얘기
사랑은 즐거워 우리는 말이 안 통해하지만 같은 곳에서 비를 맞을 거야 아니라고 하면 아니야, 맞다고 하면 맞아, 나는 순종적인 아내 매일 아침 불륜을 저지르는 손가락
그리고 정교하게 칼집 난 구름들만 남았다 구름들은 계속해서 제 몸에 칼집을 내지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빛과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칼집이 되지
그러나 길이 있어도 가지 않을 거야
은유의 맥박이 멈추고 공중의 거대하고 낡은 쇠사슬이 쳐진다 더 이상 날지 못하고 가라앉는 새 구속되는 즐거움 구속되는 턱뼈 고립되고 싶어 높이 서고 싶어
수백 개의 섬이 석양에 일그러지며 하나의 선이 되어간다 일제히 내리는 비 땅에서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비
에너지
건너편 옥상에서 태양열 집열판이
빛을 끌어모으고 있다
창가 옆에서 그는 잠들었다
그의 남색 셔츠가 빛나고 있다
조도가 최대에 이르자
교실바닥에 비치는 창문의 힘줄
에너지를 모으고 잇어
멀리서 누군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말투
생각과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간 뒷문이 열리고 거대한 빛과 함께
그가 사라졌다
여전히 그는 꿈꾸고 있었다
꿈꾸는 척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교실이 환하게 빛났다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마을에
소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소년이 아끼는 초록 전지 가위와
검고 낡은 장화만이
정원 수풀 사이로 언뜻 보였다고 했다
그에 관한한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말
그의 전지가위는 사정없이 쳐냈기 때문이다
정원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마을 사람들은
진정으로 정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 먹은 노인 하나가
정원의 빈 가위질 소리에 뛰쳐나갔다는데.............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의심했으나
누구도 소년의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모두의 집에 초록 전지가위와 낡은 장화가 하나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
마을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정원은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날리기
오늘은 연을 띄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아 하고 입 벌리면
당신 입속에 가늘게 떨리는 댓가지가 보여
우리는 안정된 기류에 들고 싶었다
묘기와 같은
흔들림만 있는
서로 경멸하기로 해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게
높이가 필요한 것뿐이니까
십이월의 바람이 연의 마음에 둥근 구멍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품어지지 않을 때까지
얼레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실이 풀려나는 만큼
우리는 가까워지는 거야
팽팽한 연실 혹은
당신과 나
우리는 이제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다
실종
나무는 천천히 공중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밑동이 없었다 그곳으로 바람이 지나가다 멈춰 섰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일까
한참을 서성이던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두터운 외투 속에 감춰두었던 긴 목을 뻗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에서 두 개의 뿔이 천천히 자라났다
애초부터 느낌은 없었다 예측은 모두 거짓말이 되었다 천체관측학자들은 오늘, 대기권을 향해 전속력으로 상승하는 운석을 목격했으나 발표하지 않았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과녁
계속해서 생겨나는 물음
구름이 걷히자 드러나는 하얗고 거대한 공중의 교각 그 위에 가스통을 실은 트럭 불붙는 트럭 나의 트럭
천체의 어깨가 탈골된 뒤에도 봄은 오고 잎은 자랐다 불 꺼진 동물원에서 기린은 계속해서 잎을 뜯어 먹고 아래에서 나는 물었다
무슨 맛입니까?
■ 속기 외 4편 배지영
속기
나는 당신을 아주 빠르게 받아 적는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질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비의 착상이었기에
모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볍게 넘기며
어떠한 점과 글자들이 지나가고 기록이
너무 빠른 나머지
스케치를 하듯이
당신은 이제 선 하나로 설명이 된다
추상적이다 피카소의 소처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안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지긋지긋하게도
거의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이다
모닝 베이커리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 허벅지
안쪽이 붕 뜨는 기분이다
달달하게 반죽한 밀가루가
오븐에 부플어 오른 것처럼
금방 꺼내어 펄펄 뜨거운 상태도,
아주 식어사 차갑게 바삭바삭
바스라져버리는 상태도 아닌 미적지근한 온도
말랑한 겉 부분과
습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찬 그곳
고소한 냄새
서로의 손이 깍지를 끼면
어린아이의 손과
요리의 끝을 맺는다
등줄기에 매달린 당신과
좋은 하루의 작별키스를 한다
아직도 난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한 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당신의 품은
따뜻한 집이자 짐이다
꽃자리
내가 사랑한 건 까마귀였다
할머니는 깨를 볶아 대야에 담았고
고양이는 거기에 똥을 쌌다
신이 일하지 않는 돼지의 긴 코를 잘랐다
오빠는 자르지 않은 연근을 던진다
등 굽은 검은 염소의 호흡이 무너지면
검불은 어김없이 타오른다
입술 색이 같은 여고생들이 떼로 몰려오자
자궁 속에서 밤나무가 자랐다
은하수가 유성의 닻을 애만지고
매미 위에 기름공이가 고깔춤을 추자
가을 햇덧에 서리병아리가 태어났다
씨 없는 처녀 땅은
살꽃 한번 못 피우고
흉터 같은 그늘만 솟아난다
떠돌이 여자의 몸이고 싶다
과조*
너는 어쩜 눈이 이렇게 기니
감은 눈 위로
알록달록 색깔을 칠하며
네 성병에 대해 침묵했던 그 시간
자, 봐봐 하고 손거울을 건네자
너는
바닥에 반사된
한 뼘 정도의 빛에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곧 죽을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너
그랬니, 그랬니, 대답하다가
다 담지도 못할 말이 쏟아져
내 살에 도로 붙었다
삶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라는 말은
배 속에서
산산이 찢어두기로 한다
*볕이 적게 비치다
기질
입을 벌려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할까
시청 입구에 큰 붕어는 하루에도 멏 번씩 고민을 한다
그게 오래된 고민이었다는 것조차 계속 잊는 듯
무엇 하나 뱉지도 삼키지도 않는 입질을 계속했다
입을 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내밀었다가
말아 넣었다가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게만큼이나 짓눌리는 액체의 부력을
최대한 친화적으로 참아내려
붕어는 정확한 발음이라는 걸 하려다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을 불행함에 몰입했다
턱의 기억이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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