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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지붕 / 장유정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그늘이 말을 걸다

 

nefing.com

 

 

 

[당선소감] 시의 공간에 가구 하나씩 들여놓을 것

 

아무 것도 없이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허허벌판은 텅 비어있음과 벌거벗음, 집의 출발점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만들어줍니다.

 

2009년 여름, 문예창작학회에서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상식 없이 따라나선 길, 주먹 크기만한 별들이 쏟아진다는 초원의 지도를 따라가는 버스는 열 몇 시간을 덜컹이며 달려갔습니다.

 

지친 방문객들에게 별은 깜빡 졸다 놓쳐버린 공연이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엔 드문드문 말과 양떼의 무리와 게르! 간혹 건너편으로 오색 무지개가 떴고, 비가 왔고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의 노을이 붉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지붕 밑에 누워 아궁이 같은 난로에 불 지펴 잠이 들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구조를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걸어 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 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계단, 단층뿐인 집.

 

여행에서 돌아와 숨차게 써내려갔던 시.

 

정확히 시가 무엇인지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조금만 더'라고 격려의 눈빛으로 일러주시는 김수복 지도교수님, 문학 지도를 펼치며 명작의 길을 안내하시는 박덕규 교수님,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하는 것으로도 그래도 복이다' 하셨던 강상대 교수님, 수업 시간에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철학적 눈빛으로 항상 물으셨던 이시영 교수님,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으로 예리한 김용희 교수님, 엉뚱함이 좋은 시를 쓰는 데 장점이 될 거라고 말하셨던 박샘, 시의 가지와 살을 냉정함으로 평해주는 혜숙샘, 처음 문학의 씨를 싹트게 해주셨던 경사대 교수님들과 동기들, 빛나는 시인과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 선배님과 동기들, 군포여성문학회 회원들, 사는 것에 항상 촌스러워도 따뜻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초등학교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내의 자리를 불평 없이 보듬어 주는 남편과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던 엄마를 도리어 인정해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봅니다. 며칠 전, 두세 개의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엄마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지붕을 둘둘 말아 하늘로 가신 지 꼭 일 년 기일. 당선통보를 받고 먹먹했습니다.

 

미성숙한 제 시 평가에 날개를 달아 주신 최동호 교수님과 김기택 시인님께 감사 드립니다. 감았다가 풀었다가 감고 감기는 실패처럼 둘둘 말았다가 펴는 시의 공간에 가구며 의자를 하나하나씩 들여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보이지 않는 것 읽어내는 힘 돋보여

 

본심에 오른 열 명의 작품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저마다 밤을 새운 듯한 치열한 절차탁마의 노력도 보였다.

 

떨어뜨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정성과 노고는 커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품들의 완성도가 자유로운 시 쓰기를 즐기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집념으로 자신을 학대하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당선작의 모델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의 형태와 창작방법과 사유를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듯한 태도가 여러 작품에서 보였기 때문이며, 어떤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깨뜨리고 시 쓰기를 즐기면서 자유로워져야 남들과는 다른 개성도 나오고 새로움도 나올 수 있다. 창작은 이래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는 시 쓰기를 괴롭게 만들고 나아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고사시킬 수 있다.

 

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당선을 축하한다.

 

박복영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다'는 평범한 대상에서 서정적 미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관찰력과 자연스럽고 차분한 어조가 돋보였지만, 상투적인 직유와 동어반복이 많아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남시우의 '리어카 화단'은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꽃의 이미지를 거리의 풍경으로 변주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개하는 시적 인식과 형식이 상투적이었다.

 

장서영의 '시소의 빨간 경사는 때때로 무료하다'는 당선작과 겨룰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상상력도 신선하여 호감이 갔지만, 신춘문예용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은 수준이 떨어져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 심사위원 : 최동호·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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