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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 / 이서영 

 

 

고유의 방식으로 꿈은 형태를 지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다르게 아무데서나 지우고 싶은 것부터 지운다 깨끗하게는 아니고 주변을 쓱쓱 뭉텅뭉텅 어떤 부분은 둥근 빵덩어리로 보이다 만지려 하면 밀가루처럼 아늑해져서 모양이 참 막연해져서 무엇이었더라 말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수업을 들었는데 어떤 칭찬을 받았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뭐였더라 그것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희미함 무게도 감촉도 없지만 분명 거기 있는 알갱이들 나는 안개로 건물을 짓고 지붕을 뚫은 철근을 보고 낙서가 적힌 흑판을 본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과 일을 하다 싸움이 나고 또 금방 화해한다 맥락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과 내기를 하고 나는 지략을 세워 크게 승리한다 다만 칭찬이 무엇의 결과였는지 명확치 않다

 

 

 

 

[당선소감] “내 여물지 못한 아픔 선별해주신 분께 감사”

 

자기 전에 발바닥에 바셀린을 발라두었는데 밤새 신발도 없이 어디를 헤맨 것처럼 발바닥이 아팠다. 깨어나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었던 건 아니겠지. 내가 헤맸을 골목들 어둠들…. 오랫동안 만진 생각이 있었다. 조금씩 수정하면서 눕거나 앉거나 습관에 기대어 조금씩 변경하면서. 대부분 좋지 않거나 쓸모없어서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밖의 용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 용도보다 훨씬 앞선 것, 거기 있을 뿐이라는 듯. 커튼이 항상 묶여 있는 것처럼,

시를 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주문을 언제부터 받았던가. 나를 넘어서기 위해 조금만 더 해야 한다는데 난 그 조금만 더를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손도 못대고. 어쩌면 조금만 더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일지도 몰라. 죽을 때까지 조금만 더 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 어쩌나, 나는 정말 어쩌나, 이 가여운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누가 와야 이 습관의 나는 대체되는 것일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나의 밤들이 말들이 그것인 채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래, 시를 더 써보겠느냐고, 마치 꿈처럼 연락이 왔다. 다른 호흡 다른 표정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영 같은 불확실감에 휩싸여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내 여물지 못한 아픔을 선별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시로 이어져 긴 시간의 터널을 함께 걸어온 ‘생오지문예창작촌’,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문우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다. 늘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셨던 박순원 교수님, 김성철 교수님, 유홍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엄마, 어머님, 이 기쁨은 온전히 두 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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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일상의 감각 잡아채려는 의지 돋보여”

 

한 해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 해 동안 내면으로부터 쉼 없이 길어 올린 언어들을 대면하는 일은 축제 같았다.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삶의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시는 삶의 어떤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 형식 안에는 삶의 여러 단면들을 통해 즐겁거나 기쁘고, 아름답거나 시린 우리네 조용한 비명들이 녹음되어 있었다.

이번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된 시들 중에는 ‘사람과 언어가 만나 전류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숨이 찼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현이령은 조근조근하고 잔잔해서 뭔가 있을 듯하여 아주 여러 번을 읽지만 결국 분위기만 읽혔다. 김완두는 발랄함과 특이한 시선이 개성이 무기인 듯하지만 의외성과 유아적인 밑그림을 받치고 있는 것은 허무함이었다. 김영숙의 시는 일상적이며 사변적인 틀에 걸려 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홍여니는 읽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지막까지 내 손을 떠나지 않은 건 이서영과 엄경은의 시. 이서영의 ‘뭉클’과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뭉클’은 선명해서 맑게 다가온다. ‘잊다…’는 숨기면서, 드러내면서, 은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또한 특유의 건조함이 세련된 미학을 만들고 있다. 엄경은의 ‘기본과 기분’은 무엇이 시로 탄생되는지를 잘 아는 숙련된 예비 시인의 작품이라 감탄했다. 하지만 ‘기본’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다가 ‘기분’을 언급하면서 맺는 한 줄이 시 전체를 단번에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이서영의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자칫 흘러버리기 쉬운 일상의 감각을 잡아채려는 의지와 선명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환대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화법이 아름다웠다. 당선을 축하하며 칙칙하기만 한 세상에 더 많은 울림들을 차려놓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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