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음이 길어질 때 /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 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당선소감]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 욕심이 찼다. 욕심을 비워야지 하면 적막이 찼다. 시의 여정이 그러했다.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언제부턴가 도서관 계단을 세는 버릇이 생겼다. 송이에서 포도를 한 알 두 알 빼 먹듯이.
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송이에서 저를 떼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광주일보 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상상력을 지지해주시고 충고와 격려 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얼굴 모르는 구성원이 되어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경희사이버대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리며 나의 당선을 기원하며 촛불을 밝혀주신 분들과, 마음을 모아준 친구 시인들, 그리고 스터디 선배님들, 일일이 이름 거론하지 않아도 제 마음 속에 각인 되어 있는 것 아시죠?
저녁 무렵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여보세요 혹시 진혜진씨 아닌가요?”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한다.
[심사평] “만남과 헤어짐의 진부한 사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다”
시는 가끔 속인다. 속이는 주체는 시 자체다. 쓰는 사람도 속이는 줄 모르고 속이고, 읽는 사람도 속는 줄 모르고 속는다. 시가 때로는 쓰는 사람을 초과하고 읽는 사람을 홀릴 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시의 위력이자 위험이다. 그러니 단 한 편의 수작만으로는 시인을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이 시인이 아니라 시 자체의 능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상현 씨의 ‘기다리는 여자’ 외 5편은 체험과 관찰에서 서정적 순간들을 이끌어내는 기예가 능숙했다. 이봄 씨의 ‘빙하기의 식사’ 외 2편은 부드러운 묘사와 딱딱한 진술을 교직하는 능력이 강점이었다. 이서영 씨의 ‘암전’ 외 4편과 이재민 씨의 ‘두근두근 동물원’ 외 4편은 삶의 내막을 투시하는 시선이 깊다는 점이 닮았다. 전자의 ‘10년 후’와 후자의 ‘간지’ 같은 작품은 여느 앤솔로지에 포함되어도 손색없을 수작이었다. 장수연 씨의 ‘나무의 표정을 빌리다’ 외 3편은 화술의 나이가 젊은데 특히 ‘비닐하우스’의 발랄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분들에게서는 가장 좋은 시 한 편을 선뜻 골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숙 씨의 ‘선잠’ 외 3편과 진혜진 씨의 ‘먼지의 결혼식’ 외 4편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김기숙 씨는 감정을 냉철하게 통제하고 정교한 언어의 구조물을 만드는 일에 실패가 없었고, 진혜진 씨의 작품들 역시 발상과 화술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두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중 진혜진 씨의 작품, 특히 ‘통화음이 길어질 때’가 선택된 것은 심사자의 취향이 개입한 결과다.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진부한 사건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는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진혜진 씨에게 보내는 축하만큼의 진심을, 김기숙 씨에게 보내는 위로에도 담고 싶다.
심사위원 신형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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