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혹한의 중심을 딛고 나는 건너가리니
고단한 삶의 누추를 단단히 얼리어 벽을 세우고
혹한의 맑음을 재단하여 창을 달아내면
그대의 이마에 징표처럼 돋아나는 분홍빛이여
내 삶의 남루들이 제각기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밤 깊은 겨울강의 단단한 얼음장 위,
한 무리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당선소감] “시 통해 사랑하는 법 배워”
세상을 후회 없이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 내게 다가온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일이 바로 시를 쓰는 일이었다.
단 한번, 그것도 잠시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고 그것으로 운명의 길을 지적해준 뒤 늘 기다림과 아픔만을 사월의 바람처럼 안겨준 여인처럼, 그렇게 시는 오랜 시간을 허무와 쓸쓸함의 가로등불 밑에서 기다림으로 나를 지치게 하였다.
문득 그 모든 것이 허무하여 다시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가슴을 베고 나면 어느새 한 줄기 담담한 안부를 묻듯 다가서는 도무지 떠나보낼 수 없던 여인처럼 시는 언제나 내 정수리쯤에 머무르다 내 걸음의 모든 방향을 지시하였었다.
때론 내가 시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시가 한사코 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을 안다. 나의 지극한 누추함과 고단함이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시는 늘 자상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깨닫게 하였고 나는 어느새 내게 다가온 모든 것들의 한 겹 뒤를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지도 시는 깨닫게 하였다. 지금 이만큼 걸어온 것이 전적으로 시의 따스한 피톨이 내 몸을 돌고있는 탓임을 잘 안다. 늘 한결같지 못했던 나를 한사코 떠나지 않은 시를 내 남루한 외투 속에 끌어안는다.
아침 창을 걷고 눈 내리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마음이 눈 속으로 걸어나가 마악 춤을 추려는데 당선을 알리는 전화가 공중을 가르고 내 낮은 방에 폭죽을 터뜨렸다.
천지의 눈발로 퍼져나간 폭죽의 불꽃 아래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웃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견디어 온 시간들에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작품을 뽑아 세상에 내보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
이제 정말 먼지 낀 창문을 깨끗이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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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휴머니티 담은 서정성 강점”
예심을 통과한 여러 작품 가운데서 최종까지 올라온 작품은, 정철웅씨의 `겨울강' 외 2편과 최혜경씨의 `헬로우 게바라' 외 4편이다.
작품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오랜 동안 시를 가까이 한 사람이라는 점, 그런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솜씨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응모한 3편 혹은 5편의 작품들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두 사람을 놓고 고민하다가 정철웅씨의 `겨울강'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최혜경씨는 무거운 소재도 밝게 소화해내면서 어휘와 리듬이 조성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바람이 세월세월하고 울'며(`갈대의 허리'), 여린 `순이 쿨렁쿨렁 자라고'(`순(筍)의 숨'), `우주의 등이 뻐끔뻐끔 빛을 피'우며(`목상(木像'), `실타래 같은 말이 샤갈샤갈 하고 내리는 밤'(`눈내리는 밤')이라고 최혜경씨는 노래한다.
독창적인 의성어와 의태어를 발견하여 그 미감에 빠지는 것은 시인이 아니고는 어렵다. 그러나 장점도 승하면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 낙천적인 해석이 시를 오히려 가볍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정철웅씨의 `겨울강', `눈내리는 저녁', `내 마음의 풍경'은 제목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서정성이 주도하는 작품들이다.
시의 본질이 서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의 한 편에서는 의도적으로 비서정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모색하는 실험적 작업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 와중에서 서정시는 구태와 진부의 징표인 것처럼 여기는 시각도 만만치 않으며, 그것이 일변도의 대책 없는 단순서정으로 계속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정철웅씨의 서정성은 휴머니티의 또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관류하는 서정을 조율하고 절제하면서 타자와 세계를 수용하며, 비정적 현실의 중심에 서서 서정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한편, 절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거기 경도되어 있거나 그쪽으로 쏠리기 쉽다는 말도 된다는 것을 유념했으면 한다. 정철웅씨의 장도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제 행장을 수습하고 결코 수월치만은 않은 시의 전정, 그 길로 매진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이향아 〈시인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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