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강의실에 상주하는 분필씨는요
평소엔 친절함 속에 뿔을 감추고 있지만
앉기 거부하거나 행동지침을 어기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날 길들이려 하죠
동강동강 제 몸 관절 부러뜨리며
어김없이 날카로운 뿔을 꺼내 위협해 와요
나는 뿔이 무서워 의자에 몸 구겨 넣고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분필씨 생각대로 답하고
분필씨 습관대로 따라 행동하죠
가끔 경직되고 고루한 생각에
내 뿔 꺼내 맞서볼까 생각도 하지만요
그의 뿔은 워낙 완고해
내 같은 여린 뿔로는 감히 어림 없다나요?
그래서 나만의 대항 법을 터득했는데요
강의 내용 자장가 삼아
잠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창 밖 딴 세상 꿈꾸면서 그 뿔 숫제 무시해보죠
그러다가 뿔을 타고 밖으로 나가
강 건너고 구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발걸음 멈추고 비행기 접어 날리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뿔을 먼저 달아준 건 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적이고 당당한 그 뿔이 멋스러워
스스로 닮아가려 애쓰는 건지도
쉿, 분필씨 다시 뿔을 꺼내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긴장하네요
[당선소감]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이었으면
오래도록 나무로 서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는 져서 어둠은 짙건만 걸음을 뗄 수 없는 시간들이 두툼한 낙엽으로 쌓였습니다. 자꾸 목이 마르고 뿌리 내릴 수 없는 조바심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 아, 총총히 박힌 별이라니…. 인적이 끊긴 어느 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 짖는 소리로 길을 잡아 새벽녘에야 사립문에 다다랐을 때의 안도감 같은, 아, 눈망울 맑은 별들의 반짝거림이라니…. 나의 시도 그렇게 위안 받고 또 그렇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선물이었으면 하고 되뇌이던 주문이 기적처럼 하얗게 날아왔습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가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속삭이는 별을 머리 위로 올려다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입문하도록 등 떠밀어주고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당선 소식에 놀란 눈으로 나를 끌어안던 두 아들에게 먼저 사랑을 전합니다.
은유와 시의 본질을 깨우쳐주신 김영남 선생님, 덕분에 이름 없는 것에게 이름 붙이고 말 거는 일이 한결 쉬웠음을 고백합니다. 시가 곧 삶인 삶을 살라하시던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오랜 시간 시의 발등에 쓴 잔을 들이부을 때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이기홍, 최가예 시인님, 덕분에 칠전팔기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도반이 있어 외롭지 않게 길 떠날 수 있었던 정동진회원과 문학아카데미 문우들, 먼 길 돌아가는 뒷모습 지켜봐준 어우름 회원과 제 이름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도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저앉아 시의 끈을 놓아버릴 순간 손잡아주신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그렇게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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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성세대 권위 상징 '뿔' 기발해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구사하던 시들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시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을 제외하고 나니 수준 높은 시들이 한 소쿠리나 되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있던 시들은 6명의 작품인데 하나같이 읽을 만했다. 최영화 씨의 '갯고둥'은 시적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낸 뒤에 얻은 사유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어인 '길'이라는 단어를 이십여 차례 이상 등장시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은정 씨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참신한 소재로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시였다. 시의 중반부 이후 동어반복이 지루해서 좀 더 다른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주명숙 씨의 '꽃시계 좌담'도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뒤가 약했다. 대비의 기법을 왠지 서투르게 구사하는 느낌이다. 김수예 씨의 '아토피'는 활기찬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나아름 씨의 '누가 냉장고를 열었을까?'와 정경희 씨의 '위풍당당 분필씨'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발상, 거침없고 자유로운 표현 방식이 일품이었다.
앞의 작품은 상상의 보폭이 넓어 때로 엉뚱해 보이는 것도 매력이었다. 시는 이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 적절한 대화의 삽입으로 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그런 장점들이 이 사람이 응모한 시편에 지나치게 많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선작으로 고른 '위풍당당 분필씨'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뿔'로 설정한 상징적 장치가 매우 기발하다.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의 난감함을 이처럼 능숙하게 표현하는 일은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함께 응모한 시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어 즐거웠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빛나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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