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안 남자 /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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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마음 속 갈등 절묘한 표현 돋보여"
이번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대체한 얄팍한 생태주의, 깊은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감상주의에 머무른 많은 내면의 시, 그리고 판타지들을 보면서 괴로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행히 주명숙의 '즐거운 제국', 강혜원의 '카나리아',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 라는 시편들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주명숙의 시에서는 주방을 '즐거운 제국'으로 보고 거기서 '장기집권'을 누리는 주부 입장에서 "잘 버무려진 식단은 제국을 견인해 나갈 크레인이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발성법이 발랄하여 오래 눈길이 갔다. 강혜원의 시는 새장에 갇힌 아이새와 엄마새의 논전을 통해 아이새의 위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응하는 엄마새의 안일한 통찰을 대조적으로 드러내 세대간의 갈등과 소통을 말하고자 한 상상력이 빛나는 시였다.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엔 반전이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 이래 여자의 '손톱'은 성적코드였다. 이 손톱에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하는 남자의 요구에 부응한 메니큐어칠 행위는 남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노예가 되어가는 여자의 안쓰러운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반전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진술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남자의 '조종'을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은 어느새 나도 그를 조종하고 싶은 성적욕망 말이다.
위 시들 중에 한 편을 골라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예심자를 불러 상의했으나 결국 나의 결정은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둔 송해영이었다. 송해영은 다른 시편들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서 믿음이 갔지만 표현의 평이함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를 보완하면 좋은 시인이 될 걸로 믿어 당선으로 민다.
-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 광주ㆍ전남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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