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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화 외 4편 / 최지원 

 

 잎이 넓은 나무일수록 잡음에 개의치 않는 무딘 청력을 타고났다

 

 그렇다고 나무의 귀가 아주 무딘 것은 아니다
 몸 밖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안테나는
 몇 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교신까지 스캔 뜬다는 사실을
 나무가 남긴 나이테를 보고서야 알았다

 

 몸 전체가 소리를 기록해 놓은 엘피판이라니

 

 나무에게 읽혀지지 않는 소리란 없었겠다
 낱낱의 사물, 우주의 섭리가 깊이 해독될수록
 셀 수 없는 문을 입에 문 나무
 일 년에 한 번만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마음까지 휘저어대던,
 호들갑 떨던 바람의 수다에 잠시 응대해주던,
 뾰족이 내민 시퍼런 말로 풋내를 풍기는 수화
 타고 오르는 넝쿨의 여린 눈망울들에겐 치명적이라는 것

 

 나무가 수도 없이 반복하던 동의어에도 귀가 어두운 나는
 추락의 끝이 뿌리의 끝을 간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들이 자꾸 쏟아낸다, 붉게 익은 말

 

 지나가는 버스 안, 그림자로 스며 든 나무들
 몸속 깊숙이 붉게 읽힌 수화가 번성할 때
 내 귀는 당나귀처럼 삐죽삐죽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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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의 시간


 

먹선이 비치는 수묵담채화 속으로
급브레이크 자국 남긴 고무

 

돌돌 말아 한참 꾹 쥐고 있어 본들
고무에게는 축소 해석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은 구겨질 리 없는 본성이다

 

사방팔방으로 쑤셔 본들 유추 해석에 휘말려들지 않아
한지 위에 찍힌 고무는 늘 긍정적이다

 

웅덩이 투성이 고무에게 웅덩이란 없는 법이다

 

가위에 잘려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므로
여전히 고무이던 고무

 

고무가 만난, 셀 수 없는 깃발들
시도 때도 없이 펄럭임도 고무 안으로 들어오면
눈 내린 풍경처럼 잠잠해진다

 

도대체 고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모든 일에 폭설처럼 태연자약한 고무

 

세상에 어떤 고무(鼓舞)적인 일을 만나본들
고무의 깊은 심중을 알 수 있을까

 

해답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늘만 먹고 살아 온, 거실 한쪽 구석 고무나무
제 몸속의 미로를 풀어놓은 채 부정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다

 

찢기 직전의 한지가 고무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본들
누군가 버리고 간 수묵담채화에게는
확대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지상의 모든 길을
눈이 덮었다

 

  

설원의 나무

 

 

위, 아래 좌우가 아슬한 경계에 히말라야시다가 산다

 

설원 꿈꾸다 부드러워진 가시
촘촘히 층을 이루었으나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뿔로 선다는 것은 여간 어지러운 일 아닐 것

 

그러나 나는 이처럼 순한 뿔을 본 적 없다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란 시간 밖의 경계라는 것을 아는
히말라야시다

 

위에 누르는 무엇을 치받고 싶을 때
나는 뿔 같은 그늘에 앉아
커피 마시고 불끈 솟는 힘으로 종이컵 구긴다

 

그러나 뾰족한 창날처럼 우뚝 서
누군가를 찌르기 전
소통의 깃발 흔드는 히말라야시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치는 자폐의 뿔이기보다
천천히 밀어 올리는 허공의 피 몸 안에 당겨 넣어
힘보다 순리를 앞세우는
당신의 승리에 잔잔한 박수를 보낸다

 

깊고 넓은 지반은 갖진 못했지만
설원의 꿈 단번에 꾸게 하는 착한 뿔이어서
히말라야시다, 나는 네가 좋았다

 

  

뱅크만의 달

 

 

 뱅크만을 지배하는 달은 거울의 방을 가졌다

 

 지구본에도 없는, 내가 명명한 뱅크만엔
 조수간만의 차가 예측 불허였고
 한 달에 한 번 잠깐 밀려오는 밀물마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한 번 빠져나간 썰물은 좀처럼 밀려올 줄 모르기에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썰물의 시간이 길어 말라가는 바닥 위로
 달이 던진 음모의 그물망에서 소금기 품은 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구멍에 숨어 두근거리는 가슴 붙들어 매거나
 간혹 두 눈 치켜들고 동정 살피는 뻘의 족속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울의 방 루이14세가 표독한 논리로 숨통 조여 올수록
 백이숙제처럼 완고하던 좌파 망둥어들마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손 더 높이 받들어‘옳소,옳소’외칠 때
 짱뚱어, 따개비 같은 여린 목숨들은 아예 두 손 치켜들고
 닭장 속의 알만 낳는 폐계라도 되고 싶어졌다

 

 루이14세와 유사한 추종의 무리들과 달의 힘으로 돌고 있는
거울의 방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야 환해 질 지상의 음모들

 

 뱅크만 달의 음모가 더 깊어지기 전에
 백이숙제를 위해 고사리 뜯다 손톱 새까매 진 내가
 거울의 방 안에 갇혀 눈물 닦던 소매로
 밀물의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쓱쓱 거울을 닦고 있다

 

 

 

괄호안의 이야기

 

 

쪼개지 않고도 여름을 통째로 파먹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를 유리성에 유배시켜 놓고
수박 속을 파낸 숟가락 끝에서
차갑게 식어 별똥별이 되어 질 목숨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곤 했었다

 

디비디바비디부, 으슥한 묘지의 쐐기풀 찾으러 갔으나
여린 목숨들의 온기가 식어 버린
해질 무렵의 바다, 눈앞에서 지울 수 없었다
중심문장에 부연설명 내리고 맛깔스런 묘사만 곁들여야하는 詩
도대체 쓸 수 없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벽시계 속 추가 되어 조바심 나게
반복과 기다림 사이를 똑딱똑딱,
신선한 이야기가 아니면
금방 고개 돌리고야마는 갑(甲)들의 식성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뱅글뱅글 상모까지 돌리게 했다
한번쯤
고개라도 끄덕여 주길, 박수까지는 아니라도

 

식어가는 별똥별 위해 느낌표 하나 뜨겁게 찍는 일이란
괄호 밖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오물거리던 슬픔 뱉어내던 곳에서
가을, 철모르는 수박이 넝쿨을 뻗는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에게 건 마법 속에서
수박의 껍질 안쪽은 점점 비워져갔다
오목한 거기 느낌표 같은 숟가락만
남았다, 덩그러니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읽다보면 언어가 말을 걸어오는 시가 있다는 말,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와 마음을 보여주면서 팔짱을 껴오는 시가 있다는 말. 보자기를 풀었을 때, 향기롭고 맛깔 나는 시의 선물이 펼쳐져야 심사자들의 눈도 더 밝아지는 거라는 이정록 시인의 기대 섞인 말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응모작 앞에 앉았다.   
 
 예심(153명)을 거쳐 일곱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어향숙의「다락방의 몽상」외 4편, 김수형의「야흐에 찍는 마침표」외 4편, 김수진의「사막의 역사」외 4편, 최지원의 「붉은 수화」 외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 외 4편, 조연재의 「완두콩」외 4편,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 합계 35편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해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응모작은 최지원의 「붉은 수화」외 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외 4편, 이이후의 「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이었다.

 작품마다 긍정적 에너지를 많이 품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시문법으로 쓰인 탓에 각 응모자들의 시가 개성적이기 보다는 서로 닮아 보인다는 우려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모은 결과 한인숙의「자작나무」외 4편은 자기호흡이 살아 있으나 산문적인 진술이 흠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감점 요인이었다.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은 이미저리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심생각’에 초점을 맞췄으면 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대상과의 거리유지가 적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기꺼이 최지원 시인의 응모작을 당선작으로 택했다. 물론「붉은 수화」(나무의 나이테를 엘피판 이미지로 보는 등)에서 알 수 있듯 최지원 시인의 시세계가 오직 최지원 시인만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염려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얼룩으로 소음으로 떠도는 세계의 파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몸으로 당겨와 충분히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 내는 감각과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지적한 약점을 너끈히 뛰어넘으리라 믿으며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안도현(시인) 이정록(시인) 류인서(시인). 대표집필 류인서

 

 

 

 
출처 : 송림산방
글쓴이 : 김욱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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