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신문에 제 시가 놓이게 된다니 마음에 창 하나 빛나게 되네요

 

대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창이 나 있었습니다. 늘 한쪽 창의 불이 꺼져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했던 때가 있습니다. 어둔 방에 불을 켭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고 빈방에서 저와 아버지에 대한 시를 씁니다. 월미도 유람선에서 쓴 시를 교실 뒷벽에 붙여놓았던 고등학교 2학년에서 어느덧 미끄러져 서른을 훌쩍 넘겼습니다. 신문에 제가 쓴 시가 놓이게 된다니 제 마음에 창 하나가 밝게 빛나게 되네요.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번 생일이 1월 1일인데, 생일 선물을 너무 거창하게 받네요. 밖에 내놓은 아들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그 곁에 함께 하는 분당 아버지께도 감사드려요. 최원식 선생님, 김명인 선생님을 비롯한 인하대학교, 대학원 선생님들과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탁경순 선생님, 꼭 찾아뵐게요. 강영숙 선생님, 이름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금 옆에서 절 응원하고 같이 웃어주는 그녀, 고마워요.

그저 말 많은 선배에서 그래도 신춘문예 당선된 선배로 남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네요. ‘멋진수요일’, ‘청하’, ‘시선’. 대학 때 만난 학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숱한 세미나와 술자리들이 모두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곁을 함께 한 선후배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즐겁게 시, 쓰겠습니다.

 

 

 

 

이곳의 안녕

 

nefing.com

 

 

 

[심사평]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최고 작품에 대한 설레는 기대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좋은 시의 덕목으로 꼽을만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껍질을 깨라! 도약하는 힘을 보여라! 마치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 그렇듯이.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고, 사물의 새로움과 내면의 고매함을 융합하며 붉은 보석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발레리, 「석류들」) 상상력은 늘 그렇게 독자를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이모의 가까운 해변」「골목을 들어 올리는 것들」「향리의 저녁 일지」「발의 원주율」「어제의 인사」「끌어안는 손」「오늘 너의 이름은 눈」「친구들」「가난한 오늘」「迷路庭園」「밀의 기원」「꽃 앞의 계절」 등을 최종심에서 읽었는데, 그것은 개성과 환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서 무르익어 스스로 내면을 깨고 터져 나오는 시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서정을 찾기 힘든 대신에 낯선 감각과 의도된 착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흐름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는 서너 편의 시를 손에 쥐고 오래 망설였다.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체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풂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싯구와 싯구 사이에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난한 오늘」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 심사위원 장석주, 장석남 시인

 

728x90

 

 

나의 고아원 /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시 앞에서 용기 있는 사람 되리라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도망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언어의 시작이 되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시를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의 오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정현 덕분이다. 내가 의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말로 다 할 수 없게 고맙고 미안하다.

 

힘껏 미워하고, 힘껏 사랑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의 벗, 사랑과 버들에게, 나를 믿어주는 은정에게, 항상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정숙 언니에게, 곁을 지켜주는 슬기에게, 나보다 나의 잘됨을 더욱 기뻐하는 진희 언니에게, 부케처럼, 바통을 넘긴다. 나은아. 내 옆에 있어 준 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원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했다. 깊고 단단하게,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명지대 교수님들과 부족한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 앞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무서운 손으로.

 

 

 

 

 

nefing.com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 묻지 않은 목소리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장석주 시인, 장석남 시인

 

728x90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 하고 놀래주고 싶어요. 간질이고 꼬집고 싶어요. 점점 더 철없어질 거야. 그건 자신이 있어요.

 

무서운 게 없지만 못난 시 쓸까 봐 두려웠어요. 이제 즐겁게 걱정할래요. 마음껏 뛰어 다닐래요.

 

책과 한 우리에 넣어준 엄마 아빠께 감사해요. 그게 아니었다면 뭐가 되어 있을까. 늑대소녀 정도가

 

아닐까. 늦은 입학에 등록금 보태주신 할머니, 쓰니와 우리 공사판 인부님들, 예대 동기 언니들과

 

멋진 형부님들, 사리와 엉식 식구들, 발상 스터디원들과 심화과정 학우들, 고맙습니다.

 

이효영 군의 소설은 제일 재밌어요. 효와 함께 걸어갈 생각에 즐거워. 김혜순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황병승 선생님의 네 목소릴 내라는 말씀은 잊지 않고 있어요.

 

청강생으로 받아주신 이원 선생님은 시인은 예언의 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 자신을 예언하자면, 오래오래 철없는 시인이 될 거예요. 박성원 선생님은 단점보다 장점을 살려

 

주셨어요. 글을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은 그때 생겼답니다.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려요. 도망치지 않고 오래 서 있겠어요. 못생긴 저를 예쁘게 길러주신 조동범

 

선생님. 기쁨이 되는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철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서 미안해요. 이제 막 태어난 어른이에요. 어느 시에서처럼,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어요.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728x90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 유병록

 

 

,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대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꽉 쥔 주먹처럼 의지 견고하게 할 것

 

나는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커다란 손도 있다 한 번 휘두르면 길이 나고 바다에 띄우면 그대로 배가 되는 손, 그 계곡에서는 물줄기가 흐르는데, 역사라고 불린다는데

 

이 조그만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은 연약한 도구에 불과하다 오므려보지만 물 컵으로 삼기에도 작다 흘러 다니는 운명이라고는 고작해야 목을 축이기에도 부족한데 겨울 산에 오르자, 폭포가 꽝꽝 얼어붙어 있다 길게 펼쳤던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쥔 폭포, 울퉁불퉁 힘줄이 솟은 물의 팔뚝, 안쪽으로 흐르는 뜨거운 혈관

 

즐거운 한때를 어루만졌던 손을 씻고 주먹을 쥔다 더 이상 운명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지를 움켜쥐었을 때의 주먹은 견고하다 이제 일격으로 몽상의 호숫가에서 물 마시는 저 물소들을 때려눕힐 시간이다

 

꽉 쥔 주먹을 가끔 펼친다면 가족과 친구들의 손을 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제자를 격려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결점 많은 작품을 위해 기꺼이 통곡의 벽이 되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nefing.com

 

 

 

[심사평] 생물의 마지막 순간 끈질기게 천착

 

예심에서 골라준 시 작품들 가운데서 다섯 분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거론했다. 성동혁의 렌터카를 타고4편은 장식적이거나 매끄럽지 않은 조립이 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유희로 전환하는 유머가 돋보였다. 안웅선의 미션스쿨의 하루4편은 간혹 서사를 기록할 때 어색한 문장들이 들어있는 시편이 있었지만 미성숙한 사춘기 화자를 내세워 오히려 내면적 고투의 나날이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다. 강윤미의 소심한 소녀의 소보루 굽기4편은 암시성이 확장하는 폭은 좁았지만 지루한 일상에 발랄한 리듬과 어조의 고명을 얹어 아기자기한 서술이 되게 하는 상쾌함이 장점이었다. 박은지의 서랍의 눈4편은 시에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언술들이 섞여 들었지만 한 가지 사물이나 현상을 끈질기게 해석해 보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가 눈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유병록의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4편 모두가 절명의 순간에 바쳐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생물의 마지막 그 한순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간혹 상투적 해석이 불필요하게 첨가되었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단연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작품들 간의 질적 수준의 균질함,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 등이 탁월했다.

 

- 심사위원 최동호 시인·김혜순 시인

 

728x90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조금 더디어도 주저앉진 않을 것

 

누군가는 만남에 대한 어휘가 가치 있다 했지만 나는, 미래의 이별들을 모으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령, 눈이 오면 눈의 일부처럼 만남을 맞고, 흩날리거나 녹아 없어지는 눈을 보며 이별이 아팠다. 그러한 내력으로 연연해하며 살았다.

 

연연의 목록이 추가될 때마다 구덩이를 팠다. 얕기도, 넓기도 한 연유들이 둥글게 고인 구덩이들. 그 속에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녹아 없어지지 않을 삶의 문제를 대신해 스르르 몸을 녹였다. 그 구덩이 안팎에서 만만한 한 을 들여다보려 시를 썼다. 게으름과 무책임을 가책으로나마 아플 수 있는 시간. 이제 서른이니 뭐라도 하나는 구원해야 하지 않을까, 골몰하는 밤이 앞으로도 길겠다.

 

은 어린 새의 퍼덕임이라고, 날기 위한 연습에 멈춤이 있어선 안 된다 알려주신 장석남 선생님, 다른 시선은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하다 가르쳐 주신 권혁웅 선생님께 인사 올린다. 통증의 마디인 어머니, 일평생 소슬함의 자루를 메고 가는 아버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근원 창수 창현 창미 세 형제들, 많은 것의 동기가 되는 민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이리, 내 모든 풍경의 흉곽인 달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아가는 연습을 하도록 어깨를 두드려주신 이시영, 남진우 선생님께 조금은 더디어도 주저앉지 않을 거란 다짐을 드린다.

 

 

 

 

희치희치

 

nefing.com

 

 

 

[심사평]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성 포착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눈길을 끈 이들은 술빵 냄새의 시간등을 투고한 김은주와 꽃 피는 일등을 보내온 류화, 두 사람이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과 돌파력이란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새벽녘 시장에서 돼지 잡는 장면을 다룬 꽃피는 일은 동물의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처참한 장면을 복사꽃이 피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는 것과 중첩시킴으로써 기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탐미적 시선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조형 능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질서를 투시하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깊이를 내장하고 있었다.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이 있는 대신 단조롭게 여겨지는데 비해, 김은주의 작품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듯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 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로는 바람 부는 날의 모과의 박은지, ‘흰 개와 바다의 이현미, ‘구불구불거리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의 진유경 등이 있다.

 

- 심사위원 이시영, 남진우 시인

 

728x90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최초의 시는 시의 몸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가 아닌 것에서 시의 속살을 만나다니, 새삼 ()()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살의 아이는 어느 날 고분의 등잔 사진을 보게 된다. 복숭아모양의 등잔을 보는 순간 몸 안의 혈액들이 출렁, 그 후 어두운 무덤 내부가 등잔 빛에 환히 열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혹시, 저것은 시가 아닐까 자문하는 날이 길었다. 시를 알기 전 시적인 것에 생의 운율이 출렁이다니.

 

영혼의 심지에 불을 놓았을 어느 손길. 불빛으로 한 생의 삶의 폭을 넓히겠다는 기원과, 한기에 영영 얼지 말라며 다독였을 시정(詩情)이 거기 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겠지. 그 주문은 언어이면서 언어의 배후. 침묵은 언어의 배후로 알맞지, 꽃의 배후가 허공인 것처럼.

 

누군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시는 무엇인가. 새삼 ()()이 아닐 수 없다.

 

늘 존재 자체로 시이신 고재종 선생님과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객지에서의 새움을 틔우는데 도움을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족들과 바람으로라도 가닿고 싶은 정처(定處)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의 나와 도약의 지점에 대한 약속을 맺는다. 머리맡에 시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이다. 그 밤들을 생이 함께 지새워줄 것.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들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 시를 떠받치는 인식이 아무래도 소품 지향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경전)’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잠언풍의 시는 자칫하면 시적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함정을 잘 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 (예심 박형준 김선우)

 

728x90

 

 

 

당선작 없음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시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하필이면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 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릇 한 사람이 문학 작품, 그중에서도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 고뇌 속에서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자신만의 문장, 어법, 이미지를 발견하고 발명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임의 해바라기 모텔등은 시의 대상이 된 부조리한 상황을 능청스럽게 제시하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시에 나타난 국면들엔 구체성이 부족했다. 박혜정의 흑백의 목련나무등은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과 청각적 이미지가 눈에 띄었으나 인생에 대한 해석이 헤프거나 상투적 상상력의 전개가 있었다. 문정인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등은 외국인 노동자의 비감을 경쾌하게 다룬 부분이 눈에 띠었으나 상투적 비유들, 묘사를 위한 묘사 문장들이 시의 신선함을 가라앉혀 버렸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단 한 편의 완성도가 있는 작품,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작품, 가능성을 배태한 한 시인을 찾지 못했다.

 

- 심사위원 김명인 시인·고려대 교수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교수

728x90

 

 

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컨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 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365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일곱 명의 왕자가 있었지요 마녀가 그들을 백조로 만들어버렸는데 차가운 밤바람 불어요 생각들은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돌아눕네요

집집마다 꿈 한 자락 배달 나온 달이 가볍게 노크하는데 고양이가 꼬리에 한 가닥 감아말고 저 너머로 사뿐 사라지네요

저 너머로 쫓겨난 왕자들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어린 공주는 쐐기풀로 실을 자았는데요 묘지에서 자란 쐐기풀은 침묵의 푸른 옷이 되어 차곡차곡 어두운 바구니에 담깁니다

빈 밤거리 거역할 수 없는 붉은 문장 같은 정지등이 가득해요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금지와 가능의 경계가 거북하네요

마녀에게 씌웠던 모자만큼이나 큰 낙엽들 몇 장이 굴러와요

어린 공주는 화형장으로 끌려갔지요 일곱 벌의 옷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는데 요란한 머플러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지나가요 덜컹이는 수레에 실려가는 공주를 보세요

몇몇이 공주의 손에서 남은 쐐기풀을 앗아갔어요 대신 욕설과 침을 던져 주었죠

12시 시곗바늘처럼 화형목은 서 있고 시간은 이제 자정을 지나려 합니다 어린 공주 푸른 옷 높이 던졌고 일곱 마리 백조는 날개소리로 그녀의 침묵을 받아들였어요

흰 깃털 목이 메이도록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며 쓰는 이야기

딸들이 더 어리신 따님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한쪽 날개 그대로 간직한 왕자가 하늘을 나는 대신 날개팔로 공주를 안아주었어요

바람이 새로워요

신호가 바뀌었네요 고마운 이름을 휘파람처럼 불러요

 

 

 

 

관목들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통하여 본심에 합류한 시들은 산문성이 농후하였다. 시는 다른 장르의 특징을 시적인 것으로 포용하여 그 장르적 영토를 변용시켜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 쓰기 방법은 시를 다른 장르, 산문에 복속시켜 버리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본심 작품들 중에서 세 사람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운성의 ‘황금나무 밑을 간다’ 외 4편의 시는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각, 그에 따른 해석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거나 산문적 전개가 거슬렸다.

주영중의 ‘시조새’ 외 6편의 시는 응축된 이미지들의 전개로 하나의 국면을 조성하는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응모된 여타의 시들에서 읽을 수 없었던 낯설고 신선한 표상을 시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언술이 전개되는 중에 이미지가 비약하거나 소홀히 처리되고만 시들이 지적되었다.

곽은영의 ‘양철인형’ 외 5편의 시들은 치밀한 표현, 선명한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능숙하게 서사적 전개 속에 배치하는 형상화 능력들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응모된 작품들 모두가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우리는 응모된 모든 시들 중에서 ‘개기월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하였다.

‘개기월식’은 정육점 여자, 살코기, 월식 중인 달과 아이의 요의와 배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면서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 속에 숨은, 생의 비의 하나를 그려내고 있다.

 

- 심사위원 최승호 시인 김혜순 시인 / (예심: 반칠환 권혁웅)

728x90

 

 

단단한 뼈 / 이영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함께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밖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내 외로웠던 시들아!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문제는 늘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본 죽음이란 것은 또 하나의 완벽한 실존이었다. 그는 뼈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바람의 울음을 듣고 있었다. 세상의 빛들은 일순간 그를 위해 적막해졌다.

 

나는 너무 일찍 알아버린 삶과 죽음의 근사치에 대해, 근접해 있는 존재와 소멸의 함량에 대해, 세포처럼 끊임없이 분열하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 T S 엘리엇은 말했다. 시는 언제나 모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면 나의 도전은 무모했다. 시의 중심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난 후, 성탄 캐럴이 울리는 번잡한 거리를 혼자 걸었다. 마치 동굴에서 탈출한 크로마뇽인처럼. 나는 그날, 화석 속에서 튕겨져 나온 구석기인처럼 외로웠다.

 

나를 믿고 지켜봐 준 남편과 자신감을 뿌리 깊게 심어주신 하현식 교수님, 이재무 선생님, 감사합니다. 호된 비평가인 딸 다혜와 아들 정빈이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두 분께 내 안의 혹독한 다짐을 바친다.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nefing.com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을 거듭 읽고 검토한 끝에 남은 작품이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9편과 이영옥의 단단한 뼈4편의 시들이었다. 다른 응모시들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 결함들이 이들 시에서는 극복되고 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까닭 없는 우회나 굴절이 야기하는 몽상의 어눌한 언어들을 자제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에 빠져 시를 수다스러운 설명으로 이끌거나, 대상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독단의 왜소성으로부터 깔끔하게 벗어나 있었다.

 

장고 끝에 우리는 이영옥의 돛배 제작소단단한 뼈로 의견을 압축했다. ‘돛배 제작소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선 안과 밖을 하나로 짚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호감이 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같은 대목 말이다. 그러나 단단한 뼈에서 더욱 중요한 대목들을 확인했다. 짧은 분량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자재로움과 절제된 감정이입을 통해 죽은 것들을 또 다르게 살려내는 전환의 힘, 그 핵을 이 시는 지니고 있다.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는 비극적 삶의 전력에 대한 암시도 놀랍지 않은가. 이 시를 읽고 나면 섬쩍지근한침묵 같은 것이 남는다.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등은 언어의 활달성, 또는 뜨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한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천착도 돋보였다. 그러나 표현의 조밀함이 모자라 적잖이 설명으로 기운 흠이 있었다. 지니고 있는 정열의 운용에 따라서는 새로운 시를 열 가능성이 보인다.

 

- 심사위원 황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시인, 정진규 시인 (예심 반칠환. 박형준)

 

728x90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한 소년이 검은 배를 띄운다. 눈을 감고 바다의 폭을 가늠해 본다. 노을이 지자 닻을 올린다. 며칠 동안 노를 저어가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닻을 올렸을 때와는 바다의 깊이와 폭이 다르다.

 

여러 번 낙선을 하고 당선통지를 받았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바라본다. 시를 쓴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이중성을 파헤치는 것, 인간의 아름다움과 비참함을 노래하는 것,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초라함을 불평하는 것,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려다 실패하는 것.

 

어두워지는 물결을 떠다니며 소년은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될까. 얼마나 왔으며 또 얼마를 더 가야하는가. 처음 출발할 때의 소년은 이미 청년이 되었고 소년이 닻을 올렸던 해안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기 위해 닻을 올린다.

 

자식을 구원하려다 이제는 반백이 되어버린 부모님께 밥 한끼라도 차려드려야겠다. 같이 표류하고 있는 문학회 친구들, 부족한 제자를 다독여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시가 부족함에도 돛을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함부로 닻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nefing.com

 

 

 

 

[심사평]

당선작을 골라내지 못했던 지난해의 부담 탓일까? 예심을 거친 스무 명의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선자(選者)들은 공연히 긴장되고 조바심이 났다. 작년에 비추어 올해의 응모 시편은 시적 진지함이나 다양성에서는 확연히 향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탓인지, 작품의 개성이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서는 별다른 진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문 투의 엇비슷한 넋두리도 여전하였으며, 한 두 편 돋보이는 응모 시만으로는 그 가능성 또한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한 시편은 최동일, 이상훈, 주예림, 정구영, 문신, 김성규 제씨의 작품들이었다.

최동일씨의 시에서는 삶의 풍경과 굴곡을 읽어내려는 투명한 시선이 살펴졌다. 그러나 「할머니를 바라보다」외에는 시야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훈씨와 주예림씨의 경우는 소외된 삶의 애환을 능숙한 솜씨로 공들여 시화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어딘지 모르게 낡았다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정구영씨의 응모 시들은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시어의 선택도 비교적 선이 굵고 선명하다. 그럼에도 직조된 시상이 다소 작위적이어서 시의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똑같은 지적은 문신씨의 응모 시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응모자는「우리들의 생활」과 같이 범상한 일상성을 따뜻하게 갈무리하는 작품도 함께 묶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결국 신춘의 지면을 장식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김성규씨의「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된 단점들이 비교적 적게 살펴졌던 까닭이다.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들간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겠다. 축하와 함께 분발을 당부한다

 

- 심사위원 유종호(문학평론가) 김명인(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