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없음
[심사평] 빈약한 상상력·모호한 주제들,당선작 못찾아
신인을 추천하는 심사의 자리라면 설렘인들 왜 없겠는가. 낯선 재능들과 만나는 기대와 예감으로 마음은 들뜨게 마련이다.
무릇 신인이란 녹록지 않는 패기와 자기만의 날카로운 촉수, 뜨거운 열정을 겸비한 열린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한계를 돌파하여 의욕에 가득 찬 신선한 경역(境域)을 펼쳐 보이는 것. 그런 까닭에 새로움을 체험하려는 모험심을 엿볼 수 없는 신인의 작품은 오히려 식상함을 가중시킨다. 신인들이 기존의 모방에만 급급해 한다면 우리 문학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올해의 응모작들은 그런 면에서 기대에 못 미쳐 안타까웠다. 요 몇 년 사이의 당선 시를 너무 의식한 탓일까.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면서도 사로잡은 시상이 별반 없는, 대체로 모작의 수준에 멈춰있었다.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약속이나 한 듯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줄글의 산문체는 어느새 우리 시의 피로가 여기에 이르렀나 걱정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만나는 비교적 활달한 상상력도 기성에 너무 감염되거나 유행처럼 생각을 비틀어 놓아, 선명하고 짜임새 있는 한 편의 시로 완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이 수습한 작품들은 아래 응모자의 것들이었다.
이경민의 시는 환상이 감싸 안는 설화적 풍경이 이채로웠다. 그럼에도 시적 구도를 이어주는 내밀성의 논리가 허술하여 상상력이 겉돌고 말았다.
권정희의 시편은 산문의 세필(細筆)로 다듬은 분위기가 독특했지만 생각의 결과 매듭이 산만하여 감동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최한의 작품은 사물을 투사하는 시선이 날카로웠으나 투여된 말과 의욕에 비추어 획득된 정서가 빈약하였다.
천수호의 시편은 건조한 문체에 어울리는 묘사가 볼 만했지만 상상력의 역동성을 살려 짜임새 있는 구조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김운영의 작품은 말의 파문이 자아내는 겹겹의 파장이 미묘한 시의 결을 느끼게 했으나, 그 수다에 비추어 좀처럼 응고되지 않는 주제가 문제였다.
김성규는 응모자 중에서 비교적 명확한 자기 주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딘지 낯익은 듯한 시구로 그만의 신선함을 보여주는데 실패하였다.
결점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편들 속에서 그래도 감추어진 당선작을 가려내려고 심사위원들은 응모작들을 거듭 숙독(熟讀)하였다. 여느 심사 자리보다 월등히 품을 들였건만 결과는 끝까지 곤혹스러웠다.
올해는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으면서도 결정에 앞서 심사위원들은 여러 번 망설였다. 우리들의 과류(過謬)나 눈 높이가 응모자 여러분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 민망함과 낭패감이란! 그렇다고 무턱대고 당선작을 선고할 수 없는 일, 이 한번의 거절이 신춘문예를 열망하는 미래의 응모자들에게도 쓴 약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신문사측에서도 “마지못해 당선작을 내기 보다는 단호하게 당선작을 내지 않는 것이 한국 문학 발전과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권위도 지키는 일”이라며 흔쾌히 우리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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