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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문서 / 김하연

 

아버지가 밭을 매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래 소유권은 땅을 기름지게 한 거름의 몫이라며

아버지 헛기침 소리 깊어진다

워낭소리로 구두 계약 맺은 황소의 증명은

오래 전부터 게으름 피운 죄로 시효가 지났다

하지만 저 태양의 도장밥을 들고

마음이 기울어지는 해거름 등기소에 붉은 날인을 받자

지독한 진드기 등에 얹고 길을 내던 황소도

밭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직계존속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질세라 쑥대밭을 만들던 잡초도 눈독 들이며

분할 청구를 시도한다

하지만 잡초를 이겨낸 앙증맞은 강낭콩 꽃과

울타리가 되어 준 돌담과

땀을 훔쳐 주던 갈바람에 잠재적 지분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했다

어느새 드렁 칡이 내려와 일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럴 때는 믿을만한 법적 후견인이 필요하다

얽히고설킨 감자밭과 고구마 밭이 입담을 거들고 있다

아버지는 흙을 닮아 분쟁 없는 포슬포슬한 성정을 가졌기에

별도의 판단이 필요해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그러기 이전에 부양의 의무를 다한 수수, 보리, 귀리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한다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여 어머니의 푼돈이 되기도

손주들 용돈이 되어주었으니

아버지는 그들에게 마음을 더 쓰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에게 되돌려 줄 게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던가

아버지 된장에 풋고추 찍어 새참을 드시더니

몹쓸 탄저병으로 돌연 떠나보낸 여럿 자식들을 그리며

 매운 맛 하나 그들의 몫으로

밭 한가운데 그렁그렁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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