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림6호* /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당선소감] “시만 알던 나에게도 날개가…훨훨 날아 가야지”
시간만 켜켜이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신은 헛되지 않게 저에게도 뜻밖의 행운을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땅 밑 어둠 속에 갇혀 살던 매미 유충이 땅 밖으로 나와 우화(羽化)하여 날개를 파닥이며 건너편 나무 위로 화르르 날아가듯, 시만 알고 시만 쓰던 저에게도 이제 날개를 달 기회를 주셨으니 저 넓은 허공을 향해 훨훨 날아가야겠습니다. 더 좋은 시를 더 많이 쓰라는 것으로 알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에게 날개를 달아 주신 농민신문사에 감사드리며 제 시를 올려 주신 황인숙 시인님과 함민복 시인님 두 분께 큰절 올립니다. 저를 항상 올바른 시의 길로 인도해 주신 동작문화센터 시창작반 맹문재 교수님, 마경덕 시인님, 고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동작문학 문우들과도 기쁨의 시간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1400광년 밖 초록별로 먼저 간 아내에게도 감사드리며 아버지를 응원해 준 두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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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위축되고 시들어가는 현실속 희망의 응원가”
본심에 오른 20명의 작품 100여편을 읽었다. 연륜이 감지되는 일정한 수준작은 많았으나 태양과 달처럼 우뚝하거나 바늘 끝처럼 외로운 수작이 없어 선자의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씀바귀’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 ‘이동 만물상’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 ‘농림6호’를 놓고 선자들은 의견을 좁혀갔다.
‘씀바귀’는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한 사물을 통해 우리 삶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에 “낡은 일상을 토악질해 쓸려나간다”와 같은 상투적인 시구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은 “사각의 창틀엔 읽기도 전에 몇 장씩 겹쳐 넘겨지는/성경책의 얄팍한 책장 같은 햇살”을 비롯해 빼어난 이미지들이 도처에서 빛난다. 또한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공력을 쏟는가를 작품마다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 전개 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어(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응모작 4편의 시 결구가 ‘있다’로 끝난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작품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동 만물상’은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언어로 농촌마을의 현실을 잘 그려낸,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와 ‘농림6호’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라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높이 보았다.
제목이 당돌한 ‘농림6호’는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시안이 깊어 좋았다. ‘농림6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위축되고 찌들고 시들어가는 시대의 현실에 희망의 응원가를 들려주고 싶은 선자들의 마음도 작용했음을 밝혀 둔다.
축하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씨앗이 내년에는 축하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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