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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 하병연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다
스무사나흘 정도 살 맞대어 살다가
큰 논으로 분가하면
그때부터 다시 한달 보름 동안
자기 몸을 쪼개고 쪼개다 여름을 들인다
몸 낮추고 벼를 자세히 바라보면
이 여름 푸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눅눅한 장마철,
축축한 욕심 씻어낸 자리에
벼는 하늘과
시퍼런 사랑을 뜨겁게 해댄다
벼꽃이 피고 이삭이 영글고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 이삭이 혼자 익는 게 아니다
어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비우고 비워
탱탱한 사랑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 가을
미련없이 털어버리는 벼는
또다시 제 몸 썩혀 반년의 생을 접는다



 

매화에서 매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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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젊은 부부가 거기에 있었다. 남자는 구레나룻이 있는 용모가 수려한 젊은 청년이었다. 여자는 양털을 깎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양 한마리를 나에게 선물이라면서 주었다. 그리고는 조명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식사 대접을 받았다.


당선 소식이 들려왔다. 기자한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제 막 시(詩)의 종자가 발아하여 언어와 서정의 질서가 조금씩 엮이는 중이어서 당선 소식은 나를 어리둥절케 했다. 이제는 모판에서 본 논으로 이앙하라 한다.


지금까지 뿌리내린 상토도 털어내고 넓은 땅으로 가서 자신만의 서정을 이삭으로 영글라 한다. 막막하다. 그렇지만 본 논에 이앙한 벼들도 분얼을 하여 여름쯤에는 논 고랑이 보이지 않듯이 가장 낮은 자세로 시의 힘을 조금씩 키워나가려 한다.


이번 꿈은 오백만 농민들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 모든 영광을 호박 넝쿨이 무장무장 뻗어가는 이 땅과 벼에게 돌리고 싶다. 또한 시심을 이끌어주신 신병은 선생님을 비롯하여 갈무리 및 월요문학 회원들, 사랑하는 가족들, 특히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길 위의 핏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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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선에서는 〈희생〉(하병연), 〈소〉(도석생), 〈물거울〉(권미자), 〈들녘〉(하미애), 〈시집가는 날〉(김경철), 〈옻나무숲으로 들어가는〉(이주렴), 〈시어머니가 물고 온 이야기 하나〉(이선임), 〈모과〉(고영서), 〈내닫힌 문〉(진정희), 〈겨울바람〉(조일규), 〈자전거의 꿈〉(장용숙), 〈일기〉(조온현), 〈진짜 새는〉(신기용), 〈농심〉(유혜진)이 논의되었다. 이들 중에는 다른 곳에도 같은 작품을 ‘2중 응모’한 것이 있어 제외시켰다.


올해는 전반적으로 평년작은 되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하병연의 〈희생〉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쉽게 합의했다. 그 다음 논의된 작품은 〈소〉〈물거울〉〈들녘〉〈시집가는 날〉이었으나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개성과 구성·언어·미학·심상의 집중에서 허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선작 〈희생〉은 사람(농부)이 자연과 농작물에 경외감을 가지게 하는 농사 교감의 시로, 화자의 농사에 대한 경건함과 ‘벼’의 모성적 신비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선작 외의 다른 작품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해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뽑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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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김충규


나무가 잎사귀를 일제히 틔우고 있다
감겨 있던 무수한 눈들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나무 아래서 나는 나무를 읽는다
이 세상의 무수한 경전 중에서
잎사귀를 틔우는 순간의 나무는 가장 장엄하다
이 장엄한 경전을 다 읽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이 경전을 읽으려면
마음거울에 먼지 한 점 앉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마음거울은 너무 얼룩이 져 있다는 것을
닦아내어도 자꾸 더럽혀진다는 것을

새들도 이 경전을 읽으려고
나무의 기슭을 찾는 것이다
새들을 끌어당기는 나무의 힘!
나는 그 힘을 동경한다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화살과 창을 만들어 썼던 시대,
그 시대까지가 평화의 시대였다
나무 화살과 창에 맞은 짐승들은
죽는 순간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금속 화살과 창이 나오고부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무가 경전인 줄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나무는 자신을 희생하여 온갖 경전을 기록해 주기도 하지만
나무라는 이름만으로도 장엄한 경전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를 다 망치고 있는 것이다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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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지난 일년은 내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약을 먹어도 그치지 않는 무서운 기침과 함께 객혈이 쏟아졌고, 마침내 폐결핵이란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스무알이 넘는 독한 약을 매일 먹어야 했고, 계속되는 현기증과 싸워야만 했다.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내를 돈벌이의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꼬박 일년 동안 아내는 가장의 역할을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학이고 뭐고 내게는 다 사치 같았다.

무능력한 가장, 병치레나 하는 가장, 나는 절망 속으로 매일 침몰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한번도 나를 구박하지 않고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준 아내에게 가장 먼저 감사함을 느꼈다.

이제 폐결핵도 완치했고 이렇게 좋은 일도 생겼으니 다시금 가장으로서의 책무와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두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따뜻하게 맞이해준 농민신문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고향이 수몰되기 전 농부셨던 부모님, 그리고 나를 옆에서 지켜봐준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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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경희의 <우체국 가는 길>,오부제의 <추억은 적막의 숲에서 서식한다>,류지송의 <지노귀굿>,김충규의 <나무> 등 네 작품이 최종까지 남았다.

네 작품 모두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시를 빚는 능력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신인의 경우 이런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런 능력을 토대로 이 시대 현실이나 자연을 보는 이른바 신인다운 시각이 더욱 요구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신경희의 시는 이 시대 우리 농촌, 혹은 변두리 마을 풍경을 우체국 가는 길을 통해 차분히 노래하지만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오부제의 시는 멋과 흥이 있지만 이런 것들이 다소 상투적이고 자칫하면 감상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고, 류지송의 시는 우리의 고유한 삶의 풍속을 노래한 점이 돋보이지만 이런 풍속이 이 시대 우리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 점에서 김충규의 시는 나무를 노래하되, 이제까지 우리가 읽어온 그런 나무가 아니라는 것, 이 나무를 통해 산업사회적 가치를 승화시키려는 노력, 말하자면 이 시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분명하고, 시를 빚는 능력 역시 단단하다는 점을 높이 산다.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

심사위원 홍기삼 문학평론가, 이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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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서성이다 / 이궁로

 

 

기차가 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다
대합실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의자
일몰의 그림자 길어지면 차갑게 흔들리는
철로 주변의 측백나무 사이로 쓸쓸히 흘러가는 저녁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 지루한 표정
딱딱한 마분지 차표를 건네는 매표원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출발과 도착의 낡은 시각표
의미 없는 부호처럼 굴러 다니는 비닐 봉지
너무 일찍 나온 것이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보였지만
기차는 서지 않고 역을 지나쳐 간다
역을 지나쳐 가는 저 열차처럼
삶도 그냥 지나쳐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
대합실 밖에서 흔드는 이별의 손짓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과
재회를 꿈꾸며 사는 것도
열차가 다시 제 철로를 밟고 돌아오는 것처럼
생의 어느 지점에서 떠났던 사람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때에
한 번은 돌아올 것을 믿는 때문이고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침묵이
세상의 침묵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본다
수은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역 광장에
이별의 그림자처럼 서성이는 작은 별이 뜨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각이다, 기차가 오기에는

 

 

 

어둠은 밤의 너머에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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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에 대하여 / 성향숙


욕실 수채구멍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머리카락이 뭉쳐있다
많은 무리속에서 나약한 소외감으로
떨어져 버린,
뿌리잃은 생으로 한가닥씩
나뒹굴던 머리카락들
더 이상 꿈을 공급받지 못할
이미 버림받은 생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풀썩거리고
아주 작은 물 흐름에도
소용돌이로 휘말리며
여기 저기서 밟히고 뒤채이다가
그곳에 소외된 힘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한다
더러는 좁은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
전혀 다른 무리들과 섞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들에 잠시 붙어 있기도 하며
구석의 먼지라도 껴안고 뒹굴면서
안간힘을 써 보기도 하는,
그것들이 비로소 힘을 내기 시작하는가
구멍을 꼭 막고
거센 소용돌이를 정지시키는
힘이 발휘된다

 

 

 

 

 

엄마,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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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 상처받은 영혼 보듬고파”

아침 식후,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이 허리가 불편하신 어머니가  '아유-'신음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하신다. 침침한 눈과 기가 많이 빠져나간 손아귀의 힘으로 음식찌꺼기가 덜 씻겨져 매번 설거지를 다시 해야 하지만 유일한 노동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같아 몇번 만류하다 이제는 그냥 내버려둔다. 어쩜 힘은 들지만 꼭 해야만 될 것같은 늙은 어머니의 설거지. 내가 시(詩)를 하는 것이 꼭 그 행위 같다면 억지일까.

도립도서관 문예강좌에서 처음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아니 처음 말 배우는 아이처럼 되지도 않는 언어를 시라는 이름으로 내보였을 때 부정의 말보다는 내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고 건조한 시의 씨앗에 축축한 습기를 적당히 부어주어 싹 틔워주신 스승님과 무럭무럭 자라게 해주신 또 한사람의 스승님, 그리고 내 졸시를 처음으로 인정해 뽑아주신 농민신문에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시를 쓰고 싶고 매일 설거지를 하듯이 아주 개운한, 만족에 가까운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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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작은 것이 갖는 힘의 상징성 돋보여”

예심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어온 응모작품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유행적인 시풍을 답습하거나 요설증(饒舌症)이 흠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전종평의 <개미살이>, 신정민의 <석재소에서>, 최월강의 <늪에서 숲으로>, 연용호의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 이광수의 <석계里 봄>, 성향숙의 <무기력에 대하여> 등 여섯편이었다.

<개미살이> <석재소에서> <늪에서 숲으로> 등은 감수성이 보이지만 추상적인 분위기, 압축과 절제의 부족, 환경시의 한계점 등을 드러내고 있다.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보여준 풍속도이지만, 감각과 사고력의 깊이가 부족하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 <석계里 봄>은 면밀한 관찰을 통해 본 농촌의 풍경이 산문적으로 늘어져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무기력에 대하여>는 아주 작은 것이 갖는 힘, 쓸모없는 것이 갖는 힘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상징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삶의 진실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을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문덕수, 함동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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