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나무 / 김충규


나무가 잎사귀를 일제히 틔우고 있다
감겨 있던 무수한 눈들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나무 아래서 나는 나무를 읽는다
이 세상의 무수한 경전 중에서
잎사귀를 틔우는 순간의 나무는 가장 장엄하다
이 장엄한 경전을 다 읽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이 경전을 읽으려면
마음거울에 먼지 한 점 앉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마음거울은 너무 얼룩이 져 있다는 것을
닦아내어도 자꾸 더럽혀진다는 것을

새들도 이 경전을 읽으려고
나무의 기슭을 찾는 것이다
새들을 끌어당기는 나무의 힘!
나는 그 힘을 동경한다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화살과 창을 만들어 썼던 시대,
그 시대까지가 평화의 시대였다
나무 화살과 창에 맞은 짐승들은
죽는 순간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금속 화살과 창이 나오고부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무가 경전인 줄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나무는 자신을 희생하여 온갖 경전을 기록해 주기도 하지만
나무라는 이름만으로도 장엄한 경전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를 다 망치고 있는 것이다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nefing.com

 

 

[당선소감]

지난 일년은 내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약을 먹어도 그치지 않는 무서운 기침과 함께 객혈이 쏟아졌고, 마침내 폐결핵이란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스무알이 넘는 독한 약을 매일 먹어야 했고, 계속되는 현기증과 싸워야만 했다.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내를 돈벌이의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꼬박 일년 동안 아내는 가장의 역할을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학이고 뭐고 내게는 다 사치 같았다.

무능력한 가장, 병치레나 하는 가장, 나는 절망 속으로 매일 침몰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한번도 나를 구박하지 않고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준 아내에게 가장 먼저 감사함을 느꼈다.

이제 폐결핵도 완치했고 이렇게 좋은 일도 생겼으니 다시금 가장으로서의 책무와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두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따뜻하게 맞이해준 농민신문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고향이 수몰되기 전 농부셨던 부모님, 그리고 나를 옆에서 지켜봐준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nefing.com




[심사평]

신경희의 <우체국 가는 길>,오부제의 <추억은 적막의 숲에서 서식한다>,류지송의 <지노귀굿>,김충규의 <나무> 등 네 작품이 최종까지 남았다.

네 작품 모두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시를 빚는 능력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신인의 경우 이런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런 능력을 토대로 이 시대 현실이나 자연을 보는 이른바 신인다운 시각이 더욱 요구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신경희의 시는 이 시대 우리 농촌, 혹은 변두리 마을 풍경을 우체국 가는 길을 통해 차분히 노래하지만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오부제의 시는 멋과 흥이 있지만 이런 것들이 다소 상투적이고 자칫하면 감상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고, 류지송의 시는 우리의 고유한 삶의 풍속을 노래한 점이 돋보이지만 이런 풍속이 이 시대 우리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 점에서 김충규의 시는 나무를 노래하되, 이제까지 우리가 읽어온 그런 나무가 아니라는 것, 이 나무를 통해 산업사회적 가치를 승화시키려는 노력, 말하자면 이 시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분명하고, 시를 빚는 능력 역시 단단하다는 점을 높이 산다.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

심사위원 홍기삼 문학평론가, 이승훈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