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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 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아부지

 

nefing.com

 

 


[당선소감]

어린 시절 열병으로 돌 위에서 잠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돌은 시원함으로 나를 깊은 잠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돌의 시원함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다시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욕망이 끓어올라 몸을 벌겋게 달구었습니다. 폐지 통에 처박혀 있는 원고 뭉치를 상상하며 또 하루를 뭉그적거리고 있던 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시원한 돌에 상기된 몸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어깨를 누르는 두려움의 무게를 느껴야 했습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반평생 자식 위해 홀아비의 고된 삶을 사시다 이름없는 들풀처럼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늦은 시작이지만 성대한 결실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좌절할 때마다 격려해주시고 지도해주신 정선생님,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늘 소박함으로 나를 채워주는 아내, 침착하고 정확한 거엽, 항상 여유의 웃음을 머금은 민엽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 영광은 먼 길 떠나실 때 시집 한권 넣어드리지 못한 아버님 영전에 바칩니다.

 

 

 

[심사평]

총 992편의 응모시 속에서 최종심사까지 오른 작품은 7편이었다. 〈봄빛의 모습〉 〈밥이 내게 말한다〉(추민규),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줄〉〈아버지의 낫〉(최종무), 〈아직은 뿌듯하게 차오르지 않았다〉〈논은 늘 파도를 담고 산다〉(나영미) 중에 어느 작품이 뽑혀도 상관없을 정도로 모두 수준급들이었다. 〈봄빛의 모습〉은 ‘어머니 걸어 나오신다’ ‘익사’ ‘세월’의 시어가, 〈밥이 내게 말한다〉는 ‘당신’(5회), ‘사정없이 올려붙인’ ‘식구’들이 문제가 됐다. 〈아직은…〉과 〈논은 …〉은 ‘바람과 햇빛과 시간’ ‘…다오’(4회) ‘기억·평화·전설·수직·기운…’과 같은 시어가 감점이었다. 결국 〈오래된…〉〈줄〉〈아버지의 낫〉 3편이 남았는데 〈아버지의 낫〉은 소재와 제목이 흔한 점이, 〈줄〉은 ‘이상한·허공·의문’들의 시어가 감점이었고, 주제가 좀 약했다. 그래서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를 뽑았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이미지의 직조가 돋보였다. 농촌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아버지와 아이들의 가족제도와 윤리 정신이 퍽 안정되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풍경의 시이다.

 

심사위원 신세훈, 이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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