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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달 소묘 조선의

 

 

한 끝을 힘껏 당겨 가만히 놓으면

다른 한 끝이 길이 된다

 

활시위는 지상을 향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과녁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한쪽 눈썹

마당 모서리에 반쯤 보이는 길고양이 꼬리

뒤꼍 항아리 돌아 핀 흰 철쭉꽃이거나

추녀를 넌지시 들어 올린 풍경소리거나,

어둠이 빛을 좇아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면

비어 있는 그늘에 풀씨들이 날아들어

지상의 벼랑 위에 피는 꽃들은

극한의 향기를 오로라의 남극으로 잇는다지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전리층의 프리즘 속으로 사라지고

한 시절 끝 간 데 없이 오로라와 연결된

달빛의 통로를 빠져나오면

활시위의 과녁 위다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풍경소리가 추녀 끝 아래쯤에서 멈추기를 기다려

당신의 눈썹으로 달을 그리는 일,

 

그 끝이 다른

한 끝의 길이다

 

 

 

 

당신, 반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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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의 흔들림 묵묵히 지켜본 아내에 감사

 

새벽 6농원을 향하여 차를 달립니다.

아침햇살과 첫인사를 나누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해보다 늦게 귀가하는 농부,

나무와 생활한 지 3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본격적으로 나무와 생활하기 위해 오래 몸담았던 언론사를 7년 전에 그만두고주목·영산홍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있습니다그러던 중 틈틈이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거부할 수 없는 글쓰기의 매력에 고단함도 잊은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삶의 늪 속에서도 여명처럼 밝아오는 그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나무는 땅에 심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심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뼈를 깎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하늘을 향한 나무가 하나의 몸짓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 나무 아래 수백 번 무릎을 꿇어본 사람은 압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기다림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글쓰기의 기초를 놓아주신 고 문도채 시인님과열린시 회원님들은 물론 기독신춘동인님들과 무엇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특히 나의 흔들림을 지금껏 묵묵하게 지켜본 아내(성경낭송가 김정희)와 두 아들 신언신의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납작하게 엎드려 겨울나기를 하는 농부,

 

초봄이 올 때까지는 좀 게으르고 싶습니다.

 

 

 

 

돌이라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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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대상에 대한 진술이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워

 

이번 신춘문예 시 부문의 본심에 오른 것은 모두 열두분의 응모작 60편이었다시적 형상성과 정서의 균형을 잘 지탱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하현달 소묘> <곡우에 들다> <내 이를 물고 간 새는 언제 오나등 3편이었다.

 

<곡우에 들다>의 경우는 시적 대상을 자기 방식대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그런데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비약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대목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시상의 흐름에서 어떤 균형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내 이를 물고 간 새는 언제 오나>의 경우는 일상의 경험을 민속의 세계와 연결하는 상상력의 기발함이 돋보인다그러나 지나치게 서술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시적 언어의 긴장을 해치기도 한다.좀 더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뽑은 <하현달 소묘>는 시적 대상에 대한 진술 자체가 섬세하면서도 날카롭다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동시에 포착해내는 시인의 언어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무엇보다도 우주적 공간과 그 질서에 대면하여 시적 주체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이렇듯 섬세하게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앞으로 더 좋은 시적 세계의 성취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김송배 시인권영민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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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사촌 / 조규남

 

 

내 발도 하늘을 문질러본 기억이 있다

나무이파리처럼 시원하게 흔들리며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본 일이 있다

바람이 건들대며 쓰다듬고 지나가면

구름도 덩달아 내 발을 슬쩍 신어보고 도망가던 자국이 자꾸 간지럽다

운동장 놀이기구에 몸을 기대고 물구나무섰을 때

아무리 참으려 해도 거꾸로 몰린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내려왔던 하늘이 되돌아가버리자

또 다시 땅을 딛고 온몸 받히며 살아가는 내 발

지금도 이파리가 되었던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누워 뒹굴면서도 무심히 하늘을 더듬어보고 걸어 다닐 때도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바람 느끼고 싶어 들썩인다

대낮에도 통로가 보이지 않아 눈물을 찔끔 훔치는 일도

최초의 천둥인 듯 크릉크릉 부르짖는 버릇도

내 속에 흐르는 구름의 피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

발이 간지러운 가로수가 몸을 비튼다

아무리 걸어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초록 발,

수많은 발바닥 활짝 펴 하늘을 닦는다

죽어서도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싶은 발

 

 

 

 

연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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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터널 속 빠져나온 듯…환해진 길 어리둥절

 

좁고 구불거리던 길이었다. 지루하고 더디게 느껴지던 길이었다. 대부분의 내 삶은 보통사람들의 라이프 사이클보다 매우 늦은 편이었다. 학과 공부도 그렇고 문학도 그랬다. 그래서 젊음을 가볍고 산뜻한 머리로 살아내지 못하고 늘 먹먹한 가슴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때로는 울분을 참지 못해 몹시 아팠고, 때로는 주저앉고 싶어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쓴웃음도 날려보고, 바닥에 누워 멀뚱멀뚱 뒹굴어보기도 했다.

 

한통의 전화를 받는 순간 길이 부풀어 올랐다. 뒤돌아보니 한달음으로 내달리는 직선보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구불텅거리는 길에서 맛본 미학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가난과 질병과 무지도 극복하려는 사람에 따라 불굴의 정신을 생성시키는 에너지가 될 수도, 절망의 나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환해진 길에서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숨차 올려다본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다. 여기는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곳, 다시 또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 길이 어렵고 힘든 몫이라 해도 숨탄 것으로 살아가면서 벅찬 기쁨 안겨 준 심사위원님들의 배려를 앉아서 꿀꺽 받아 삼킬 수 없는 일 아닌가.

 

가정일에 소홀함이 있어도 따뜻하게 배려해 준 가족들, 서로를 격려하며 글을 써 온 동인들 참으로 고맙고, 또 하나의 부푼 길 열어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핑거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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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발상의 신선함에 의견일치”

 

예심에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이름이 지워진 채 우편으로 보내온 본심 원고를 미리 읽고 심사위원 두 사람이 농민신문사에서 만났다. 예년에 비해 서정성은 강화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똑같이 내놓았다. 그만큼 참신한 언어가 드물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선작을 고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선작을 <구름사촌>으로 하자는 의견이 곧바로 일치하였다. 이 시는 먼저 발상의 신선함이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간의 시선을 나무라는 자연의 시선으로 확장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시라는 게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힘을 내장한 양식이라면 이 시야말로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옴마댁>의 ‘눈망울로 길의 태엽 감았다 풀기를 반복’한다는 빛나는 구절도 신인으로서의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손에 남은 <찔레차>는 ‘허기가 꽁무니까지 들어붙은 새들이 날아와 빨간 눈을 하나씩 몸에 달고 날아오른다’와 같은 감각적 표현이 일품이었지만 주제를 집약시키는 힘이 조금 부족해 보여 아쉬웠다. 또 다른 분의 작품 <깃털멧돼지>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발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게 흠이었다. 사족 하나. 최종 심사 대상 작품의 표절 여부를 검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했던 씁쓸함!

 

- 심사위원 이문재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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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단풍 / 김남이

 

 
사원식당 앞 은단풍나무,

어린아이 징검다리 건너듯 갸웃갸웃

자그마한 풍선이 포르르 날며 구르는 듯

조심스레 입 밖으로 걸어 나오는

그 소리 은은하고 맑아서

나중에 ‘은단풍’이라는 딸을 낳고 싶었던

 

그 나무 밑에서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비스킷을 먹었지

기계 소리도 작업반장도 없는 그 나무 밑에서 깔깔거리며

스무 살 부근을 와작와작 부셔 먹었지만

몇몇은 그 나무에 기대어 늙은이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사원식당 앞 은단풍

깨끗한 아침 햇살과

강해지려고 자꾸 다짐하는 한낮의 태양과

한쪽 뺨이 그늘진 노을도 골고루 먹고

큰 키로 수천의 반짝이는 잎들 흔들 때

내가 믿는 신처럼 올려다보게 하던

 

은단풍 은단풍 은단풍

그렇게 주문을 외면

 

내 안에서도 나무 한 그루 뚫고 나와 삐죽 솟던

그 나무에 무엇인가 자꾸 매달고 싶던…….

 

 

 

 

상처는 별의 이마로 가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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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응모 작품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올 때 몸도 마음도 텅 빈 듯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달콤한 빵을 샀다. 까칠한 혀로 빵을 우물거리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내게 타일렀다. 그런데, 내 이름을 확인한 목소리가 당선 소식을 전했다. 나를 달래야 할 때 시를 찾았다.

때로 시가 평온한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 위로 받고 싶을 뿐 시에게 잡히고 싶지 않아 찾아오는 시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랬음에도 시와 나는 서로를 탐닉했다. 이젠 정말 시를 따로 두고 내 삶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엄마, 아버지, 저세상에서도 응원하고 기뻐하시겠지요. 묵묵히 바라봐 준 남편과 비싼 운동화 신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미안했는데, 내 애쓴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어 기쁘고 고맙다. 시의 길로 안내해 준 해양 선배, 길의 초입에서 시 맛을 알게 해 준 서정윤·박윤배 선생님, 늘 채찍과 당근인 친구 기임이도 생각난다.

푸른방송 문화센터와 정화섭 시인을 비롯한 ‘시 만나러 가는 사람들’ 문우들과 언어를 타고 즐기며 한굽이 넘어가고 깊어지는 문학의 묘미를 일깨워 주신 문무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쩌면 쓰레기를 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소침해지기도 하던 최근의 날들에 당당할 수 있게 큰 힘 주신 심사위원님께 열심히 쓰겠다고 약속드린다.

 

 

 

 

[심사평] 해맑은 느낌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

 

22명의 작품이 본심을 통과했다. 우리는 응모자의 이름을 가린 원고를 읽었다. 지난해에 비해 좋은 시들이 훨씬 많아 시를 읽는 일이 즐거웠다.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뜻이리라. 향상된 작품의 수준도 우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탄탄한 시가 여럿이었다.

당선작 〈은단풍〉은 ‘은단풍’이라는 음성이 내장하고 있는 은은하고 맑은 느낌을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하여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의 해맑은 세계관이 활달한 어조에 실려 더욱 매력적이다. 정작 알맹이로서의 삶은 들어내고 언어만 난무하는 시가 유행하는 때에 좋은 귀감이 되리라고 본다. 축하를 드린다.

이밖에 우리의 주목을 끈 시로 〈하모니카 소리〉가 있었다. 당선작과 마찬가지로 발랄한 문체가 시에 생기를 더했다. 감각을 절제된 언어로 껴안을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를 ‘만드는’ 기술이 진정성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면 안된다.

또 하나 〈징검다리〉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다. 하지만 시적 깨달음은 남이 건너가지 못한 강을 건너가려는 고집에서 나온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무의 문〉 〈끈〉 〈붉은발농게〉 〈마늘〉도 유심히 읽었음을 적어 둔다.

시라는 양식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 그것도 재능이라는 것을 당선자와 모든 응모자에게 말해 주고 싶다.

 

심사위원 이문재,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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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 / 신준수

 


버려진 하천부지 고만고만한 뙈기밭 살붙이처럼 붙어있는데요 상추 파 쑥갓 고추 토마토 가지 시금치 얼갈이 오밀조밀 어깨 겨누고 있는 그게, 한 땀 한 땀 이어붙인 조각보입니다

 

꾸불텅꾸불텅 민달팽이
육필 선연한
푸진 밥상입니다

세상에 밥을 탐하는 것들

 

시장기 급한 여름이 확, 밥상보 걷어내듯 물길이 휩쓸고 간 지난해 덜 익은 것들 날것으로 쓸려간 밥상머리 몇 남은 건건이 일으켜 쿵쿵 지지대 박던 노인을 오늘 다시 봅니다

조심조심 밥물 맞추듯 푸성귀 매만지는 남루한 저 손길도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밥상처럼 위태위태합니다

허겁지겁 허기 속으로 잦아든 초록의 밥상이나 초록에서 여물고 있는 씨앗들 묵정밭 같은 저 손에 다시 씨앗 떨굴지도 의문입니다

 

비어있는 밭이라야 다시 씨앗 묻을 수 있듯 가보지 않은 저쪽 어디 빈 밭을 점찍어 두었을지도 모르지요

맨 처음 고개 숙이고 나오던 물음표 같은 떡잎처럼
저 노인 구부정한 것이 새싹을 닮았습니다
곧 어느 곳으로든 옮겨질 모종처럼 말입니다

 

 

 

 

매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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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쓰기 부질없다’ 생각할때 당선소식 들어

 

어린 날 잠에서 돌아오지 않는 새 한 마리를 땅에 심어준 적 있습니다. 낮달이 자주 걸려 있던 둥구나무 밑이었습니다. 새에게 나무는 존재 이유 중 가장 크게 흔들리는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두 손을 모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때 새의 육신에 잠시 머문 인연으로 이렇게 시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프거나 아프지 않아도 눈물이 날 때가 많았습니다. 심중의 말을 간곡하게 꺼내려 해도 울먹임이 앞섰습니다. 기쁘거나 간절할 때도. 하지만 툭하면 흐르던 눈물이 어느 날부터 안으로 스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깊은 수위의 공명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소리가 나든 이제 그곳을 향해 내가 가진 것들을 명심(銘心)으로 던지겠습니다.

시를 신으로 모신 시간이 길었습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눈발이 축복처럼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시밭을 일구어주신 어머니와 묵묵히 기다려준 남편, 엄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두 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설익은 제 시에 손을 들어주신 안도현, 이문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를 일깨워주신 도종환 선생님, 시인됨을 명예로 삼지 말라시던 임승빈 교수님, 문학에 있어 두 평행 레일인 '창작'과 '비평'을 일깨워주신 유성호 교수님, 부족한 시를 갈고닦아 빛나게 해 주신 박순원 교수님, 내 시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시의 지평을 열어주신 박해람 선생님 두고두고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시창작반 문우들, 경운서당 학동들, 새와나무 문우들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합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애드벌룬 같은 친구,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꽃나무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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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대상서 새로운 의미 발견능력 돋보여

 

첨단 과학기술이 문명을 이끌고 있는 이때, 농부를 시의 주체로 내세우려는 시도는 낙후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견해는 대단한 오해 혹은 무지의 소산이다. 전 지구적 생태위기에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있는 심사위원들은 ‘농민문학’이 인류의 미래를 열어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땅이 죽으면 인간이 죽고,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바탕한 응모작이 거의 없었다. 농업·농촌·농업인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았다. 결선에서 논의된 19명의 응모작 대부분이 농촌을 ‘늙은 아버지’로 은유하는 수준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심사결과 오명숙· 조영혜·김연자·백윤경·신준수씨의 투고작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 최종적으로 백윤경씨의 〈멜론〉 외 4편, 신준수씨의 〈조각보〉 외 4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백윤경씨의 응모작들은 발상이나 언어감각은 수준급이었지만 비유가 억지스러웠다. 반면 신준수씨의 〈조각보〉는 시적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시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계속 쓰면 언젠가 데뷔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시인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시는 근본·근원에 대한 상상력이다. 부디 지구와 생명의 미래를 궁구하는 ‘큰 시인’으로 커 나가기 바란다.

 

심사위원 이문재,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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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 속의 여자 / 강성남

 

 

1

 

화기를 가하는 건 늘 내부 쪽이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은 두꺼운 바닥을 투과하여

이마까지 달군다

속이 비치는 뚜껑

꽃망울처럼 부푼 목젖과

허파 밑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보인다

방울토마토 같은

레몬 같은

타이레놀 같은

둥근 시간들이 그녀 안을 떠다닌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제 속을 볼 수 없어 바닥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많다

 

2

 

바닥이 다층인 그녀

확 끓어올랐다 파르르 식어버리는 성깔이 아니다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함부로 열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날 선 빛 한줄기

옆구리에 박힌다

빛 날에 긁힌 기억 속으로

두레박줄을 풀어 내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파도치던 시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달콤한 시럽약 맛

쓰디쓴 가루약 맛

통증의 맛을 구분하는, 목구멍 씁쓸한 그녀

하얗게 불린 침묵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열에 들뜬 이마 점점 달아오르고

뿌옇게 흐려진 안부, 끓기 시작한다

내장 뜨거운 짐승이 푸른 눈을 뜬다

 

 

 

 

[당선소감] 그리움 더듬어 가니 시의 길이 있었네

 

눈을 뜨면 창에 길이 나 있곤 했다. 누가 어디로 가기 위해 낸 길일까 궁금해 하며 베란다를 유심히 살피는 날이 많았다. 단풍나무, 벤자민, 제라늄 잎새 뒤에 숨어 제 몸을 드러내지 않던 달팽이. 집주인 몰래 안방 베란다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밤마다 유리창에 길을 내며 위로 오르다 떨어지기라도 했던 것인지 길이 엉켜 있었다. 그가 몸으로 낸 실타래 같은 길이, 내 꿈속에서 무작정 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려온 절벽 같았다. 잡을 돌부리 하나, 나무뿌리 하나 없는 절벽. 길게 그어진 내밀한 길이 내 심연의 방을 비추곤 했다.

 

그리움이라는 더듬이 하나로 길 위에 선다. 시와 미끄럼을 타며 몇번의 겨울을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오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여름을 박스에 담는다. 집안 구석구석에 핀 곰팡이와 마음속 먼지들을 털어내고 화초에 물을 준다. 뿌리들이 꿀꺽꿀꺽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닫아두었던 창을 열고 햇살을 맞아들인다. 가슴 안팎이 따뜻하다.

 

세상으로의 첫발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시를 만나게 해주신 장석남 선생님과 마음으로 아껴주신 지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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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뛰어난 시적 상상력 돋보여

 

예심을 거쳐 넘어온 9명의 작품을 놓고 심의한 끝에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아쉬운 점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남용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시 작품 속에 산문적 진술이 과도하게 개입되면 결정적 흠이 된다.

 

예심을 거쳐 온 작품 중에서 산문적 진술이 덜하고, 시적 상상력이 뛰어난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까닭도 시어의 남용이 비교적 적다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근자에 와서 시가 점점 산문화되어가는 추세에 비춰 평범한 일상적 소재를 성공적으로 데포르메’(변형하다, 왜곡하다는 뜻)한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선외작인 소고기 국밥쌀 한 알에 담긴 풍경은 당선작에 비해 시적 발상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시어 선택과 비유법의 창의적 노력이 더해진다면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효치, 신규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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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당선소감] '호미 손잡이 빛낸 부모·이웃이 스승'


호미가 시의 선생님입니다. 호미의 손잡이를 빛나게 하는 아버지 어머니, 함께 땅을 파는 이웃들의 갈라진 손금이 시의 스승입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그려야 한다고, 팔순의 어머니 눈에 선하게 읽혀지는 시. 그 밑그림에 색만 덧칠하는 것이 저의 몫입니다.


시와 꽤 오랫동안 함께 걸었습니다. 내가 먼저 불평을 했고 이별을 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무거운 제 몸에 시가 날개를 선물합니다. 이제 내가 시를 등에 업고 이웃들에게 날아갑니다. 무디고 날카로운 세상의 일을 다 받아주는 땅으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당선 소식이 늦게까지 잠 못 이루게 합니다. 소주잔에 기쁨 반 두려움 반을 따라 마십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무장지대 동인들과 시의 라이벌 은기찬 형, 시 쓰기에 늘 격려해주신 이정록 형과 밤늦도록 술잔을 비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조준희 조은진, 아빠가 오늘처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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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호미와 도서관 카드 결합한 발상 참신'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이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을 버리고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가에 심사의 초점을 맞췄다. 시의 값은 세상과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비의(秘意)를 캐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경〉은 시를 다루는 솜씨가 퍽 세련돼 있다. 삶의 갈피에 품은 신비성과 아픔 등이 거슬림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소재의 진부성과 새로운 시각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2007 몽유도원도〉는 비교적 새로운 구성법과 다양한 상상력을 거느리고 있으나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어 최종선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가족〉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도서관의 카드목록과 농기구인 호미를 결합해 시를 구성한 발상이 매우 참신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가지의 사물을 매우 절묘하게 합성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새로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가족의 분열 현상으로 따뜻함을 잃어가는 현대의 을씨년스러움을 극복하고 가족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통해 가정의 포근함을 회복하려는 숨은 메시지도 이 시대에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도 구성의 단순성이 지적되었다. 좀더 많은 사유와 상상적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기른다면 매우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심사위원들은 믿는다.

 

심사위원 문효치·신규호·손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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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 그 기억의 방/ 최옥향

 


굴곡진 삶
지도위의 협곡같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안은 둥근 동굴의 소리를 듣는다
어디하나 싹 틔울 씨눈조차 보이지 않게
으스러져라 껴안고
골마다 바람도 없이 풍장되어 가던
깜깜한 벽속의 간극을 재어 보던 소리
늙은 동굴 같은 안방에선
언제나 할아버지의 깊은 시름을 알리는
염주 굴리던 소리가 났었지
손수 앉힌 마당의 징검돌을 건너면
그 끝에서 빛나던 항아리들처럼
한때는 고소한 젖빛 냄새로 흐르던 방들
다시는 정정한 한 그루 나무로 서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앉은뱅이로 홀로 견뎌야 했던
목수였던 당신의 호두빛 깊은 주름
달그락, 달그락
둥근 방문 고리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집 모퉁이에 서서 늙어 버린 지팡이처럼
언제나 마른 삭정이 냄새가 나던 그 기억의 방
툭,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에서 마지막 떨어져 구르다
목침 위에 나란히 놓였던
유난히 반질거리던 그 두 알의 호두
결코 소멸되지 않을 단단한 기억 하나가
지금 흔들리며 걷는 내 호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환한 밖을 기웃거리고 있다


 

 

 

도마뱀과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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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슬픔과 할아버지가 생각나”


오래된 아픔이나 슬픔을 만지작거리면 그것이 곧 구원처럼 시로 왔다
결코 먼지처럼 툭, 툭 털어 낼 수도 없는
이 딱딱하고 푸석거리던 상처들이 말랑말랑해 질 때까지
어떻게든 시에 매달려 볼 심산이었다

삼각형도 아닌
사각형도 아닌
그렇다고 원통형도 아닌
그 어떤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수없이 접었던 자욱만이 어지럽게 널린 내 어줍잖은 필력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당선 통보를 받고 한동안 두려움으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창 밖엔 잔설 위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유년의 집 마당을 가로지르던 징검돌
제삿날이면 나박김치에 분홍물을 우려내던 맨드라미가 핀 장독대
그곳을 생각하면 늘 아릿한 슬픔과 함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고향에 홀로 계신 팔순의 내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

시민대학의 이지엽 교수님 그리고 항상 옆에서 술 친구가 되어준 최재연·박연순 문우님, 구본홍 시인님과 뜸 시회원에 고마움을 전하며

졸작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심사평] “내면심리 형상화 솜씨 뛰어나”

단 한편의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작품이 구조적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고, 참신성과 독창성, 그리고 시어 선택의 적절성 등을 중시해서 심사하기로 하였다.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을 놓고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심사위원 간의 의견을 집약한 결과, 〈호두, 그 기억의 방〉 〈오래 된 꽃상여〉 〈민들레〉 〈심전도〉 〈아버지의 봄〉 등 5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그 중에서 〈아버지의 봄〉과 〈심전도〉는 농촌의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현실 문제를 호소력 있게 다룬 점이 돋보였으나, 주제가 단조롭고 지나치게 서술적인 점이 눈에 거슬렸다. 〈민들레〉와 〈오래 된 꽃상여〉는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비범하고 서정성이 짙었으나, 시의 구조가 평면적이어서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시대적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최종적으로 〈호두, 그 기억의 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호두, 그 기억의 방〉은 호두 자체의 내밀한 구조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입체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과거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복잡한 내면 심리의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나,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신규호, 문효치, 손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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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해설가 / 권지현

 

 

휘돌던 매 부리내린 능선에
나무구름 풀구름 흐르고
바위틈 얼비치는 물빛 건너온
숲 해설가 어깨에
날아와 앉는,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
산초나무 나란히 사람들 멈추어선다

 

저기 양 팔을 층층이 펼친 건 층층나무구요,
이건 누리장나무, 뒷간에 심어 냄새를 중화했지요
잎을 뜯어 냄새 맡아보세요

 

산뽕나무 가지에서 머리 들고 돌아보는
구름표범나비 애벌레, 눈 사이 일렁인다
잎새 건네받은 얼굴에 푸른 수액이 돌아
촉지도 읽듯 나뭇결 더듬대며 쓸어보는 사람들,
양평 봉미산이 들어올린 잣나무 사이로
다래덩굴 타고 내린다
은빛 가지 틈틈 부신 해, 머리 위에서 화선지를 펼치고
바람에 결 다듬은 잎새를 뒤집는 숲으로
호랑지빠귀 푸르르르 날아올라
촘촘히 타래 풀리는 빛,
나무뿌리 밑으로 플러그를 꽂는다
산 아래 굽어보던 자작나무가
비탈 얽어내린 뿌리를 땅껍질 위로 차고 오른다

 

 

 

 

작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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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세상과 이어진 길들을 걸어들어가는 데 저는 늘 늦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총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사리분별에 지혜로웠더라면… 그 길들이 쉽게 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우수수 흰 눈발에 묻혀 떨어져 내리는 오후에 저는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사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창작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으로의 잠행을 지상 최고의 자양분이라 생각하며 퍼즐 같은 언어의 사원에 발디딤을 이제 막 즐기게 된 참이었습니다. 탁 트인 세상과 정신으로 올곧게 나아가 사물과 사람들 틈으로 내려서겠습니다. 그리하여 풍경과 사물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묘사와 이미지가 되고 서사 구조가 되고 의미 있는 반향이 되는, 생기 도는 시를 빚겠습니다.

아픈 저를 다독여 사람답게 빚어주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정현언니, 숙현이, 성현이, 수민이, 성순이, 은정이, 국민대 학우들과도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족함 많은 저를 선해주신 신세훈·이근배·손해일 세 분 심사위원님, 모교의 큰 스승이신 신대철 선생님, 주종연 선생님, 황동규 선생님께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돌올한 언어와 정신으로 문학의 새 장을 펼쳐 보답하는 길을 가겠습니다.

 

 

 

 

[심사평] “57편 본심 … 깊이있는 성찰 높이사”

많은 응모작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것이 57편이었다. 이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숲 해설가〉 〈신명〉 〈귀농일기:방아꽃 밭에서〉 〈착각 혹은 능청〉 〈무청다듬기〉 〈벌초〉 등 6편이었다. 각기 신춘문예투의 시류를 벗어난 참신성과 뚜렷한 개성으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고민 속에 〈숲해설가〉 〈신명〉 〈귀농일기〉 3편으로 압축했다.

다시 최종 논의와 숙고 끝에 권지현의 〈숲 해설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대화체를 깔끔하게 안배한 표현의 묘와 감칠맛 나는 언어 조탁 능력을 높이 샀다. 당선자의 다른 응모작 4편도 고르게 수준이 높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조훈성의 〈신명〉은 탈춤과 마당놀이의 신명을 사설조의 질퍽한 언어로 잘 형상화했으나 언어의 과잉과 간추림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박형권의 〈귀농일기〉 역시 농촌 현장을 실감나게 포착한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가 돋보였으나 너무 현란한 사설이 언어 절제 면에서 흠이 됐다. 아쉬움 속에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신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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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 / 최종무

 

 

보름 달빛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러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여물 냄새를 풍기며 올랐다
봉당 무너져 내린 틈으로 구렁이 허물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얏나무가 뒤울안에 새까만 알들을 수북이 낳아 놓았다
달빛이 알들을 품고 있었다
방에서 아버지 마른 기침소리가 났다
쪽문이 열렸다
이제 왔니

네 기둥은 비스듬히 개울을 향해 누워있었다
함석지붕에 베인 손바닥에서 붉은 녹물이 흘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파상풍을 앓고 있었다
덧난 생채기에서 바람이 나고 있었다
바람은 집을 감싸고 휘 돌았다
마당귀 미륵 바위 그늘에서
질경이 씨가 여물고 있었다
달빛이 녹슨 괭이 날을 노랗게 벼렸다
오는 봄엔 굵은 물푸레 자루를 박고
비탈 밭을 팔 수 있을 거라고
널빤지 부엌문 앞에서
짤순이가 벌건 쇳물을 짜내고 있었다
보름 달빛 술렁이는 오래된 집에선
까만 알들이 부화되고 있었다
집이 일어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뚫린 창호지 안에서 까만 눈의 아이가 마당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왔니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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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어린 시절 열병으로 돌 위에서 잠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돌은 시원함으로 나를 깊은 잠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돌의 시원함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다시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욕망이 끓어올라 몸을 벌겋게 달구었습니다. 폐지 통에 처박혀 있는 원고 뭉치를 상상하며 또 하루를 뭉그적거리고 있던 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시원한 돌에 상기된 몸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어깨를 누르는 두려움의 무게를 느껴야 했습니다. 소식을 듣는 순간 반평생 자식 위해 홀아비의 고된 삶을 사시다 이름없는 들풀처럼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늦은 시작이지만 성대한 결실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좌절할 때마다 격려해주시고 지도해주신 정선생님,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늘 소박함으로 나를 채워주는 아내, 침착하고 정확한 거엽, 항상 여유의 웃음을 머금은 민엽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 영광은 먼 길 떠나실 때 시집 한권 넣어드리지 못한 아버님 영전에 바칩니다.

 

 

 

[심사평]

총 992편의 응모시 속에서 최종심사까지 오른 작품은 7편이었다. 〈봄빛의 모습〉 〈밥이 내게 말한다〉(추민규),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줄〉〈아버지의 낫〉(최종무), 〈아직은 뿌듯하게 차오르지 않았다〉〈논은 늘 파도를 담고 산다〉(나영미) 중에 어느 작품이 뽑혀도 상관없을 정도로 모두 수준급들이었다. 〈봄빛의 모습〉은 ‘어머니 걸어 나오신다’ ‘익사’ ‘세월’의 시어가, 〈밥이 내게 말한다〉는 ‘당신’(5회), ‘사정없이 올려붙인’ ‘식구’들이 문제가 됐다. 〈아직은…〉과 〈논은 …〉은 ‘바람과 햇빛과 시간’ ‘…다오’(4회) ‘기억·평화·전설·수직·기운…’과 같은 시어가 감점이었다. 결국 〈오래된…〉〈줄〉〈아버지의 낫〉 3편이 남았는데 〈아버지의 낫〉은 소재와 제목이 흔한 점이, 〈줄〉은 ‘이상한·허공·의문’들의 시어가 감점이었고, 주제가 좀 약했다. 그래서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를 뽑았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이미지의 직조가 돋보였다. 농촌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아버지와 아이들의 가족제도와 윤리 정신이 퍽 안정되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풍경의 시이다.

 

심사위원 신세훈, 이승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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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 / 이여명


고삐를 당겼다 팽팽하게 공중에 줄을 치며 외줄로 잡아당겼다 말뚝은 말뚝대로 소는 소대로 잡아당겼다 소가 한 번 잡아당기면 말뚝이 한 번 잡아당겼다 소 힘만큼 말뚝에게도 힘이 있었다 소가 바깥으로 끌어당기면 말뚝은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쪽에서 놓으면 저쪽에서도 놓았다 서로 모르게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검게 박힌 말뚝으로부터 소는 달아날 수 없었다 말뚝도 한 발 움직일 수 없었다 서너 발 거리에서 말뚝은 소를 소는 말뚝을 바라보았다 말뚝이 없으면 소 없고 소 없으면 말뚝 없었다 이 말뚝에 소뿔때기를 오래 비빈 적 있었을 것이다 그때 말뚝도 제 뿔때기를 소뿔때기에 비벼대었을 것이다 소가 스스로 고삐를 맬 수 없듯 말뚝도 스스로 땅을 뚫지 못했다 말뚝이 땅에 박혀 있지 않으면 말뚝이 아니었다.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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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마음이 오히려 무덤덤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에게 목표지점의 설레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탓일까.


나는 내 글에 대하여 온전한 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쓰다가 지우고 다 쓰고는 이게 무슨 글인가 하고 처음부터 다시 쓰곤 하였다.


내 딴에는 되었다 싶을 때도 자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내 생각대로 쓰다가 너무 오버하는 것 등,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깊이를 내 안목으로 모르듯 시의 깊이를 어찌 알겠느냐고 자신을 질타하곤 했었다.


처음부터 시를 쓰겠다고 나서진 않았다. 20여년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주민들을 만나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 사는 것과 지역의 풍물들을 느끼며 무언가 기록하여 퇴직할 때 한 권 책으로 만들고자 시작한 게 별나게 시로 태어날 줄이야.


나이가 들수록 시가 어렵다고들 하나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한다. 이제 〈말뚝〉처럼 한 곳에 박혀 시의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스스로 시의 〈말뚝〉을 치고자 한다.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창과 지도교수 서지월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목마시’ 동인 여러분들이 늘 가까이에서 격려해주신 덕분이라 생각하며, 대구시인학교 회원여러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가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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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1,000편이 넘는 응모작중 〈즐거운 늪〉〈아카시아〉(정경희), 〈봄에 온 편지〉(우경화), 〈별 하나에 세상의 눈빛이 젖어 있다〉(이상윤), 〈추풍령 소망교회〉(하재청), 〈할머니의 부르튼 손〉(박정일), 〈복날〉〈개구리 소리〉(조훈성), 〈봄동〉(조영현), 〈말뚝〉(이여명) 이렇게 8명의 10편이 심사위원들의 논의 대상이 되었다. 낡은 시어가 거듭 들거나, 수사에 무리가 있거나, 소재나 주제가 평범하거나, 형식이 구태의연한 작품들은 걸러내기로 했다. 따라서 주제가 새롭고 시어 꾸림이나 형식이 기성 문인들과는 변별성이 있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세웠다.


탈락 작품이 하나하나 가려지고, 〈아카시아〉와 〈말뚝〉이 최종선에 올랐다. 〈아카시아〉가 토속적인 말로 깔끔하게 꾸린 대화법이 뛰어났으나 기교에 비해 주제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뚝〉이 남았다.


원래 제목은 〈빈 말뚝〉이나, 심사위원들은 〈말뚝〉이란 제목을 쓸 것을 조건으로 ‘당선’에 합의했다. 산문시로 비교적 개성이 뛰어나고, 너와 나(나+타자)의 존재성을 암유하는 기술이 감각적으로 돋보여서 뽑았다.

심사위원 신세훈, 최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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