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조각보 / 신준수

 


버려진 하천부지 고만고만한 뙈기밭 살붙이처럼 붙어있는데요 상추 파 쑥갓 고추 토마토 가지 시금치 얼갈이 오밀조밀 어깨 겨누고 있는 그게, 한 땀 한 땀 이어붙인 조각보입니다

 

꾸불텅꾸불텅 민달팽이
육필 선연한
푸진 밥상입니다

세상에 밥을 탐하는 것들

 

시장기 급한 여름이 확, 밥상보 걷어내듯 물길이 휩쓸고 간 지난해 덜 익은 것들 날것으로 쓸려간 밥상머리 몇 남은 건건이 일으켜 쿵쿵 지지대 박던 노인을 오늘 다시 봅니다

조심조심 밥물 맞추듯 푸성귀 매만지는 남루한 저 손길도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밥상처럼 위태위태합니다

허겁지겁 허기 속으로 잦아든 초록의 밥상이나 초록에서 여물고 있는 씨앗들 묵정밭 같은 저 손에 다시 씨앗 떨굴지도 의문입니다

 

비어있는 밭이라야 다시 씨앗 묻을 수 있듯 가보지 않은 저쪽 어디 빈 밭을 점찍어 두었을지도 모르지요

맨 처음 고개 숙이고 나오던 물음표 같은 떡잎처럼
저 노인 구부정한 것이 새싹을 닮았습니다
곧 어느 곳으로든 옮겨질 모종처럼 말입니다

 

 

 

 

매운방

 

nefing.com

 

 

 

[당선소감]  ‘시쓰기 부질없다’ 생각할때 당선소식 들어

 

어린 날 잠에서 돌아오지 않는 새 한 마리를 땅에 심어준 적 있습니다. 낮달이 자주 걸려 있던 둥구나무 밑이었습니다. 새에게 나무는 존재 이유 중 가장 크게 흔들리는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두 손을 모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때 새의 육신에 잠시 머문 인연으로 이렇게 시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프거나 아프지 않아도 눈물이 날 때가 많았습니다. 심중의 말을 간곡하게 꺼내려 해도 울먹임이 앞섰습니다. 기쁘거나 간절할 때도. 하지만 툭하면 흐르던 눈물이 어느 날부터 안으로 스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깊은 수위의 공명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소리가 나든 이제 그곳을 향해 내가 가진 것들을 명심(銘心)으로 던지겠습니다.

시를 신으로 모신 시간이 길었습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눈발이 축복처럼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시밭을 일구어주신 어머니와 묵묵히 기다려준 남편, 엄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두 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설익은 제 시에 손을 들어주신 안도현, 이문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를 일깨워주신 도종환 선생님, 시인됨을 명예로 삼지 말라시던 임승빈 교수님, 문학에 있어 두 평행 레일인 '창작'과 '비평'을 일깨워주신 유성호 교수님, 부족한 시를 갈고닦아 빛나게 해 주신 박순원 교수님, 내 시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시의 지평을 열어주신 박해람 선생님 두고두고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시창작반 문우들, 경운서당 학동들, 새와나무 문우들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전합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애드벌룬 같은 친구,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꽃나무가 중얼거렸다

 

nefing.com

 

 

 

[심사평] 시적 대상서 새로운 의미 발견능력 돋보여

 

첨단 과학기술이 문명을 이끌고 있는 이때, 농부를 시의 주체로 내세우려는 시도는 낙후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견해는 대단한 오해 혹은 무지의 소산이다. 전 지구적 생태위기에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있는 심사위원들은 ‘농민문학’이 인류의 미래를 열어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땅이 죽으면 인간이 죽고,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바탕한 응모작이 거의 없었다. 농업·농촌·농업인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았다. 결선에서 논의된 19명의 응모작 대부분이 농촌을 ‘늙은 아버지’로 은유하는 수준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심사결과 오명숙· 조영혜·김연자·백윤경·신준수씨의 투고작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 최종적으로 백윤경씨의 〈멜론〉 외 4편, 신준수씨의 〈조각보〉 외 4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백윤경씨의 응모작들은 발상이나 언어감각은 수준급이었지만 비유가 억지스러웠다. 반면 신준수씨의 〈조각보〉는 시적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시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계속 쓰면 언젠가 데뷔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시인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시는 근본·근원에 대한 상상력이다. 부디 지구와 생명의 미래를 궁구하는 ‘큰 시인’으로 커 나가기 바란다.

 

심사위원 이문재, 안도현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