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대상] 오디가 무르익을 무렵 / 이병일

  

오디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누에씨의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오고 있다는 걸 안다

 

그늘 밑의 저수지 빛이 새파랗게 바뀌는 동안

뽕잎이 모으고 있던 부채 바람이 흰 빛으로 날리고

아이들이 피어 있는 난간의 가지마다

갈증 포개고 앉은 검은 입술만이 계속 오물거리고

오늘도 입술 사이에 들과 날의 숨소리가 묻어 빛나지만

 

뽕잎 꽁무니에 붙어 있는 누에의 운명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디가 익어 있는 높이로 떠 있는 아이들은

운명을 네 번이나 벗어내고 꽃 피는 잠실을 펼쳐낸다

그때 아이들의 몸이 검푸르게 투명해지고

급기야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누에들이 몸을 비트는 소리 깊다

날개를 가두고 공중을 생각하는지, 오줌을 찔끔찔끔 누기도 했다

아이들은 희고 캄캄한 침묵 속에서 아름다운 봉분이 되었다

푸르게 걸어온 길이 끊어진 곳마다 고치들이 우아하게 피었다

 

아이들의 하늘은 가장 가까운 뽕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다고

나는 믿었다 오늘도 비탈진 야산을 넘어온 아이들의 웃음들은

뽕나무 그늘 속에서 주린 배를 오디로 달랬고

저녁이 올 때까지, 땅 밑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디가 무르익을 무렵,

나방이 된 아이들은 끈적끈적한 흰빛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728x90

 

당귀꽃에 눈물 떨구다 / 오문경

 

명개리 원시의 빽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여태 숲에 가려져 있던 통마람골
시원한 얼굴을 드러낸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멧돼지 녀석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정적이 감돌자
내 등골은 쭈뼛쭈뼛 서오고
그렇게 희푸른 속살 드러낸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을까,
순하게 흐르던 물줄기 양옆으로
갑작스레 기암절벽이 솟아났다.
깊은 소와 담으로 이어지는 비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너럭바위다 싶으면 어느새, 자갈톱.
물옷 입는 바람 소리 친구 삼아 얼마쯤 걸었을까.
높다란 반석 위에 올라 짙푸른 소를 내려다보는데
아니, 팔뚝만 한 그 무엇이 쏜살같이 바위 밑으로 숨는다. 열목어였다
낯선 물고기들이 날랜 유영을 뽐내자,
흰 구름 뒤에 숨어 호시탐탐 이쪽을 엿보던 햇살,
슬그머니 나와 온몸에 물을 끼얹고
은빛 물고기와 연거푸 물장구를 쳐댄다.
불바라기 약수터 가는 길목,
털북숭이 멍덕딸기 하얀 웃음보 터뜨리고
길모퉁이 산뽕나무 다소곳이 까만 오디 물고 서있다.
능선 따라 자줏빛 종덩굴 가뭇가뭇 조막손 내밀어오고
미천골인가 계곡에서 본 듯한 찰피나무,
깃털 같은 햇살 주워 담으려 노란 입술 헤벌리고
먼 산 보던 수수꽃다리도 덩달아 하얀 가슴 부풀리며
길을 나설까 말까 망설이는데
어디선가, 코끝을 자극하는 순한 내 음…
아뿔싸, 아무것도 준 것 없는 이 몸의 발아래,
여태 나를 만나는 기다림으로 버티어 온 양
하이얗게 매달려오는 당귀꽃 사태.

 

 

728x90

 

산불감시원 홍씨 / 황경순

 

묵정밭 감나무
빈 가지 뜨거워지는 봄날이면
산불감시원 홍씨 몸에도 경계경보가 켜진다
부리부리한 눈, 쩌렁쩌렁 들녘을 울리는 목소리
오토바이를 타고 산등성이 오르면
새소리 울창하던 숲도 숨을 죽인다
행여나, 불씨 한 줌 흘리지 않았나
레이더망처럼 비추어보는 눈
숲 속을 누비는 산짐승처럼
온종일 영역을 지키는 남자
그런 그도 때로는
등나무처럼 휘어져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예고 없이 펑펑 터지는 노린내 나는 세상의 불길은
정작, 끄지 못해 잉걸불로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묵묵히 삭여내는
나무 등걸처럼 우직한 사내
가난한 살림 빈손인 듯 헐겁지만
수백만 평의 나무를 거느린 남자
첩첩산중에 갇혀 살아가지만
산봉우리에 걸친 해룰 품고
굽이굽이 달리는 남자
그의 어깨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이
산등성이를 푸르게 일으켜 세운다.

 

 

728x90

 

소사나무 숲에서 / 박인숙 

- 나무로 살아가는 법

 

영흥도 바닷가
바람 길목에 선 한 무리 소사나무를 본다
얼마나 강렬하게 해풍에 맞섰는지
어디 하나 휘어지지 않은 곳 없었다
단지 꼿꼿하게 버티려고만 했다면
꺾이고 찢기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나
그들은 강한 바람을 조금씩 자신의
뼈를 휘고 뒤틀어 받아낼 줄 알았던 것인데
정작 그들은 단단하게 키운 건 바람이다
저렇게 온몸을 뒤틀어 고통을 받아낼 줄 알아야
생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되겠지 싶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스미고 썩인다
어떤 바람이 등짝을 후려쳐도
나무는 뿌리를 끊고 걸어가는 법 없다
이윽고 나도 그들 사이로 들어가 가만히 서 본다
구불구불 세찬 바람이 만드는
경이로운 음악에 귀 기울인다
이리저리 바람을 피해 온 나의 길 바람에 맞기면
어디 하나 곧은 곳 없어 더 강한
발밑으로부터 소사나무 한 그루
뼈를 뒤틀며 내 안으로 올라온다

 

 

728x90

 

밤 / 남태현

 

따뜻한 공간에 한 사내가 들어 있다
그 속은 햇살이 말랑말랑한 속살을 데우고
껍질을 단련시키고 있다
몰캉한 벽들이 사내를 에어백처럼 지탱하고 있다
처음부터 공간을 배정받은 사내는 혼자였고
바람조차 들어갈 수 없는 한 칸의 방
좁은 공간에서 육체의 부피를 그리고 근육을 키운다
사내는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탈출을 포기했는지도 모르지만
가지에 매달려 포만감으로 채워진 집은
날마다 가시가 칼칼해지고
한 계절이 지나가면서 몸집을 통통하게 불려주었다
수만 개의 가시에 포위된 껍질 안에서 산통이 시작되었다
터질 듯 통증과 함께 분만이 시작되었을 때
거꾸로 떨어진 한 사내가
머리 빡빡 깎은 채로
언덕을 까칠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728x90

 

나무들의 제목 / 오정순(금상)



 책 한 권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산다. 바람과 새소리와 들꽃, 천둥 번개와 추위의 문양이 숨결처럼 퍼져 있는 활엽 그늘의 주름은 넓고 깊다. 책을 펼치면 한 장 한 장마다 터져 나오는 메아리 나무가 자랐던 숲이 활자로 촘촘히 박혀 있다. 굳은살 박힌 글자들이 문신 같다. 베어질 때마다 천둥소리 같은 울음이 파고들어 침엽의 뾰족한 지침들이 푸르다.


 누군가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면 멀리서 씨앗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까만 활자들.


 상수리의 페이지에서 도토리가 굴러 떨어진다. 침엽이라는 말에서 북풍이 분다. 목책이 되었다가 흰 연기의 예각을 불러오는 모닥불이 들어 있기도 한 책 한 권. 나무는 단단한 표피를 꿈꾸며 긴 시간의 이야기를 채워간다. 다 쏟아 부은 창백한 얼굴이 가시처럼 날카롭다. 우듬지마다 팔랑거리는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숲, 각자 제목을 단 나무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어지러운 나이테의 문양을 걸어 누군가 한 그루의 나무를 대출해간다.





별에게 부치는 편지 / 우년구(은상)


안압지 주변을 달리는 창문 틈으로

가만히 손을 내밀면

저마다의 산을 이룬 벼 싹 보리 싹의 사연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다그닥다그닥 바람을 타고

맑고도 갈기처럼 기품 있게 날아든다

논과 밭 저 끝자락으로부터

석양이 향긋하게 숯불처럼 피어오르고

듬직한 보름달이 밤풍경을 풀어놓으면

소리저수지 앞에 가만히 서서

어둑한 저편에서 빤히 날 쳐다보는 등대 빛에게 자랑한다

매미울음 달빛 수풀 벼 보리들의 이야기

저녁 내내 철판 뒤집느라 고기기름 배인 오라비들의 구슬땀

동생들의 하하 호호 웃음소리들을

한 줌 반짝임도 안 남기고 훌쩍 떠나

긴 여행길에 올라 있을 너희에게 보내리

하나하나 돌아와 저 넓고 높은 곳에

조용하고 밝게 비출





산을 들다 / 정미정(동상)


발부리에 닿는 풀잎의 소곤거림이

마른 귀를 적셔 닦아내는 아침

휘파람새가 새 노랠 연습하고 있어요 라, 라, 라

경쾌한 리듬을 타고

소나무가 고갤 까딱거리면

촘촘하게 내리는 햇살

굴참나무 허릴 껴안고 원스텝 투스텝

가빠진 호흡에서 산소가 퐁퐁 솟지요

휘파람새 노래에 아침이 조금 늦었나요

산자락을 두른 갈퀴현호색 서둘러 파란 불꽃을 지피네요

어머, 조팝나무들 금세 호르르 끓어 하얀 밥물

질금질금 넘치고 있어요

벌써 출출하시나요

산밭머리 할미꽃이 접힌 허릴 끄르고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요

슬슬 산등성이 오르는

이 구수한 냄새 라, 라, 라

골짜기를 한 바퀴 돌고 오는 휘파람새 메아리

산봉우리에 솥뚜껑처럼 얹힌 구름 슬쩍 밀쳐놓아요

뜸이 다 든 뜨끈한 산

속까지 든든해지는

사월의 산

 

 

 

관계 / 김경구(입선)


햇살 한 뼘 들어오고

사람들의 신발만 오가는

반 지하 벽지에 곰팡이 꽃이 필 쯤

늘 내가 만든 또 다른 틀 안에 뒤척였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눌린 채

숨 한 번 들이쉬고 내 쉬는 것이

때론 어려웠다


밤마다 단내 나는 몸 새우처럼 웅크리다

피곤한 웃음 가슴 울린 날

차를 타고 무작정 달린다

덜커덩 덜커덩 울먹거리던

낡은 차도 힘들다


맑은 강 일렁이고

푸른 산 든든한

그 곳은 선다, 나를 품어준다

오래 전 어머니의 탯줄은

나를 다시 이어주고

줄줄줄 멈출 줄 모르고 사랑을 넣어준다


난 곰실곰실 숨을 고른다

멈췄던 더러 정지하려던 심장이

꿈틀꿈틀 꿈틀꿈틀

움츠렸던 손도 발도 한 번 펴본다.

입도 벌려본다


금수산-

다시 길 떠나는 날 향해

따듯한 눈으로 손을 흔든다

오래전 마을 어귀 신작로에서

먼지 풀풀 내며 떠나는 버스

꽁무니가 점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내내 손을 흔들던 어머니처럼


단내 나는 고단한 삶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 가슴 또아리를 튼

희망이란 싹 하나

푸른 혈관에 움튼다


눈부신 여름 하늘 숲속을 지난다, 새소리 바람소리 감겨와

내 귀를 간질인다, 미소가 속살거린다.






도어즈 오브 라이프(doors of life) / 송옥선(입선)


유월의 어느 날, 나는

고봉산 숲길에서 나무들의 춤을 보았다.

퉁퉁하게 물이 오른 집게손가락으로

사뿐, 초록의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서

‘도어즈 오브 라이프’

우아한 왈츠 선율에 맞추어

뱅글뱅글 라인댄스를 추고 있었다.

생명의 문을 향하여 나선으로 기어오르며

나무들이 산을 고봉으로 퍼 올리는 중이었다.

펑퍼짐한 토기 위에 한 알 한 알

밥알을 쌓아 올리듯이

고봉의 산을 만들어 가는 무희들.

그들의 발엔 수없이 공이가 피었지만

오늘도 무희들은 춤을 멈추지 않는다

낯을 붉히며 하루가 영글고

봉긋봉긋 고봉으로 밥이 쌓이듯

나무의 몸에 또 한줄 결이 생기는 시간

솨르르 물소리가 들려왔다.

무희들이 목을 축이며 산을

고봉으로 고봉으로 키우는 소리

고봉산 산허리는 지금 라인댄스가 한창이다.

열려라 하나 두울 셋

‘도어즈 오브 라이프(doors of life)'


 

 



싹트는 행간 / 신준수(입선)



줄공책입니다 씨감자 파종하기 좋게 보습 지나간 자리 햇살 머무는 곳마다 거름 냄새 가득합니다 쓰고 그리기에 맞춤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에게도 빽빽하게 잎 나부끼던 밭이 있었습니다


가락지 같은 얼음이 우물 안에서 자라던 날 이랑에서 이랑으로 흘러 다니던 한 농사꾼 며칠 앓던 신음을 데리고 감자밭 귀퉁이에 파종되었습니다 품앗이 하듯 모여들어 한겨울의 이른 파종을 마치고 이삭 줍듯 유품을 정리하다 거기, 씨앗 묻듯 또박또박 눌러 쓴 농사일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자가 싹을 틔우고 어느 페이지에서는 논에 피를 뽑고 또 어느 페이지는 가뭄으로 속이 타고 수십 장에 적힌 곡식들만으로도 겨우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까요? 손끝,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페이지가 얇습니다


행간마다 온갖 씨앗이 발아하는



 

 

 

국수나무 / 윤옥란(입선)

 

  골목길을 지나 숲속을 들어섰다 펄펄 끓는 솥뚜껑을 누가 열어 놓았을까 안개에 휘감긴 국수나무 김이 모락모락 난다 오늘 이 숲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숲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국수 한 그릇 말아 내민다 밤새 고아낸 우윳빛 육수에 사리사리 담아낸 안개국수, 산사나무 이파리와 찔레순과 발갛게 익은 버찌를 고명으로 올려놓았다 잔치국수를 만다는 소문에 일찌감치 아랫목 차지한 나방 서너 마리와 능청맞게 갓 쓴 버섯양반도 집 앞에 당도했다 개울 건너 무당벌레도 곧 참석하겠다는 전갈에 국수나무 손길은 마냥 바쁘다 숲은 종일 국수를 끓여 내야 할 것 같다

 

 

 

 

728x90

 

 

대상



사다리병창 / 고은희


세렴폭포 환하게 열리고

치악산 무지개 생강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노란 꽃분냄새 뒤쫓아

사다리병창*을 오른다


금강송이 연주를 한다

그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암벽

가야금병창이 울려퍼진다

갓 나온 싹들

바람의 보폭만큼 목청을 돋운다


가파른 암벽을 중중모리장단으로 올라간다

바람의 꼬리뼈에 하악하악

추임새를 넣는다

빠르게 한 박자만 넘어가면 비로봉인데


정상을 눈앞에 두고

엇박자의 폭설이 쏟아진다

완창

그 마지막 마디에서


툭, 끊겨버린 휘모리장단


* 사다리병창 : 치악산 세렴폭포를 지나 비로봉 직전까지의 험한 등산로




은상



숲에 잠들다 / 오명숙


다리 부러진 의자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가는 풍경들을 쳐다보며


마을 다녀 온 바람 소리에

날마다 귀가 떡갈잎만큼 자란다


홀로 어둑해지는 산

바람과 노을이 앉았다 가고

풍경소리와 참나무

이파리 한 장이 쉬었다 간다

벌레울음이 발목을 타고 오르는 저녁

낡은 의자에는

가벼운 것들만 앉았다 간다

곁에 서 있는 애기나리들

의자의 깨진 무릎을 호호 불어준다


먼 길을 걸어온

한 그루 나무였던 의자

한 생을 숲속에 내려놓고

산 한 자락을 껴안고 잠들고 있다.


산책 나온 밤하늘 직녀별이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다.




동상



자작나무 / 윤민숙


검거나 혹은 붉은 나무들 천지인 세상에 문득 회칠을 하고 서 있는 자작나무 수피에서 가을 하늘의 밀지(密旨)를 받아 적는다.


밤하늘 사선으로 흘러가던 달빛에 비춰 보면 몰락한 제국의 연대기를 낱낱이 기술하고, 액막이 굿판에서 사설을 풀어내던 무당의 주술도 빼곡하다가, 먼 옛날 석기시대 이전의 한 문명인이 별 무더기 하나둘씩 선을 그어 우주의 항로를 새겼을 자작나무 수피 사이 행간은 이미 넓다.


누렇게 퇴색하는 계절도 제 빛깔을 찾아가는 시간, 천마도장니* 속 푸른 말 울음소리

들리는지 또 한 겹 세월을 털어내고 가을 길을 여민다.


* 천마도장니 : 국보 제27호,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5세기 말의 마구장비(馬具裝備) 장식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다.



산은 맛있다 / 김미숙 입선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산

먼 길을 돌아온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상처럼

맛있는 성찬을 차려놓았다

오늘의 메뉴는 아름드리 굴참나무정식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천천히

꼭꼭 씹어 음미한다

햇빛 소스가 뿌려진 이파리 샐러드는

아삭아삭 싱그러운 맛이다

후식으로 나온 꽃들

금낭화, 초롱꽃, 개별꽃, 바람꽃

향기롭고 달보드레한 맛이 난다

새소리, 물소리연주까지 곁들여진

눈과 코와 귀로 먹는 즐거운 만찬

다음엔 자작나무를 먹어볼까

아니, 매콤한 생강나무와 입안이 환한 산초나무도 괜찮을 거야


올 때마다 상차림이 달라지는 걸

눈 밝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

가끔씩 별미도 곁들여 주는

오감을 열어 놓아야 맛볼 수 있는 산,

신이 차려놓은 밥상이다

그 밥상 한상 받고 나면

한 그루 나무가 되고 풀꽃이 되어

누구나 푸른 실눈 뜨게 되는,

난, 산을 오를 때마다 온몸에 침이 고인다

 

 

 

 

728x90


대상



젖은 책을 읽다 / 김종인


별장 앞에 두꺼운 책 한 권 파란 글씨들이 움직인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글자들 저마다 수군거린다 키 큰 나무가 무엇인가 찾아 두리번거린다


손에 침을 묻힌 빗방울 쪽수를 확인한다 이리저리 글씨를 흔들어본다 마른 글씨들을 찾고 있다 조심해 아차하면 책장이 찢기니까 맨 앞줄에선 글씨가 소리친다 누군가 페이지를 북 찢어간다 그 바람에 쪽수가 달라지고 숨겨둔 향기가 한 움큼 날아간다


젖은 머리가 싫어요 ‘울음’이라는 글씨가 도리질을 해요 난 목이 말라요 ‘갈증’이란 글자가 마른 침을 삼켰어요 살살 만져요 ‘겁쟁이’라는 글자가 겁을 먹고 파랗게 질렸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라는 글씨가 가시를 세웠어요


그 많은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없나봐요 맨 뒷장 키 큰 나무가 벌컥 물을 들이켜고 옷이 다 젖었어요 꺾인 고개가 어깨까지 흘러 내리고 아, 비가 그쳤어요 책 한 권이 흠뻑 젖고 퉁퉁 불은 글자들이 떠내려와요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책,


나는 저 숲이라는 책을 말려서 다시 읽을 거예요





동상



낙엽을 따라가다 / 조영민


나는 낙엽의 정기구독자입니다

우울을 송금해보세요 전국 어느 곳이나

발행부수가 최대인 잡지가 배달됩니다

가격에 비해 페이지가 가볍다고요

이별을 다룬 책의 요약본쯤으로 생각들 하시지만

잘 보시면 맛집 추천, 지도, 겨울옷 입는 법 등이 있습니다

저는 부록 같은 지도를 즐겨봅니다

지도를 펼칠 때는 조심하세요

이 세상과 다른 길이기에

가끔 길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작은 잎맥길은 세상 길들의 압축이에요

사람이 만든 지도는 집으로 길을 잡아나갑니다

낙엽은 그런 집과 신호등을 버립니다

사람들은 큰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샛길을 없애 버리기도 하지만

크기만 다를 뿐 발행처가 같은 낙엽들은

저마다 큰길이 작은 길을 일으키고

작은 길들은 큰길을 일으킵니다

계곡물이 잎을 지워도 다음 해 봄까지

그 길들은 생선가시처럼 뚜렷이 남습니다

사람들은 영영 낙엽의 길을 가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길일수록 가장 가기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풀잎은 아예 한 줄로만 그어져 있네요

낙엽은 해안의 파도를 따라가든 구름을 따라가든, 길은

하나의 거대한 출입구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곳에서 내 생의 저녁까지 난 길을 찾습니다

가을날 낙엽책을 손에 든 누군가가 그 길을 따라

말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동상



숲을 위한 기도 / 임종훈


검봉산(劍奉山) 오르다 보았다.

하늘 향해 쳐든 푸른 칼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의 발치에서

허리까지가 온통, 화상(火傷) 자국인 것을.

산불이 숲을 휩쓸 때 나무들은

제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선 채로

생살 타들어가는 고통에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했을 것이리.

키 큰 나무들, 손 뻗어

두려움에 떠는 어린 나무들

번쩍 들어주지 못해

순식간에 화르르, 타는 것을

안타까이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리.


불 탄 자국, 가만히 어루만진다.

고맙게도 나무는, 제 안 깊은 곳에

맑은 바람과 싱그러운 향기,

심지어 메아리조차

푸른 기억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불길이 지나가고 난 후 나무는

안간힘 다해 그것들을 다시

울울한 잎들로 피워 올려

숲은, 여전히 숲인 것이다.

지금 나무를 쓰다듬는 나의 손길이

비록 치유(治癒)의 묘약은 아닐 것이라도

사나웠던 불길에의 고통이 나무의

흉터로 각인되지 않게 하십시오.

햇살에 반짝이는 잎들의 푸른 잎맥이

숲의 뭇 생명들에게 온전히 이어져

내내 푸른 목숨이게 하십시오.

숲이 늘 거기에 있어

때로 우리들이 그 공덕(功德) 잊을 것이라도

안으로, 안으로만 삭이는 숲의 침묵이

우리들의 삭막한 마음 저 깊은 곳에 이르는

청정(淸淨)한 메아리이게 하십시오,

크나큰 울림이게 하십시오.


산불 났던 숲에 들어

어쩐지 발화(發火) 지점이

내 안 어딘가인 듯만 여겨져

사죄(赦罪)를 청하듯

숲을 위해 기도한다.

타버린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728x90

 

 

 

대상

 

 


수락산, 도서실 / 변심학 


밤 독서를 즐기는 이슬이 다녀간 나뭇가지마다

침 바르고 읽은 흔적이 촉촉하다.

벌써 산새들, 오리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낭독소리

숲가에 무덕무덕 핀 망초들이 경청한다.

바람은 키 큰 느릅나무에 앉아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속독의 바람이 계곡의 물소리와 손잡고 합주를 이룬다.

도서관 맨 윗자리로 내려온 흰 구름,

향나무에 앉아 긴 수염으로 향내 맡으며 묵독 중이다.

어느 등산객은 제비꽃 방석을 깔고 앉아

표지가 하얀 자작나무 펼치고 주줄주절 그늘을 읽는다.

이곳 도서관은 대여를 해주지 않는다.

표지가 예쁜 미니 북을 절도(竊盜)해 가는 이를 본다.

연지 솔 같은 엉겅퀴꽃을 뿌리 채 뽑아가는가 하면

주근깨 아가씨, 산나리와 주렁주렁 복주머니를 달고 있는

금낭화 등, 야생화가 서가에서 뽑혀나간다.

도서관 사서인 태양은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아주지만

뽑힌 서가의 빈 무덤에 눈물이 고일 듯 움푹움푹 아프다.

음이온 문장들로 빽빽한 책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언제 불량한 독자가 책갈피 한 장 북 꺾어갈지

표지에 예리한 칼, 펜으로 기념비 같은 낙서를 해댈지,

전날에 그어놓은 숱한 낙서의 흔적이 몸피마다 아프다.





은상



지리산 시편 / 김찬순


봄 햇살들 활시위 팽팽히 당기는데,

탱크 뚜껑 같은 그루터기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재선충에 병든 몇 그루의 소나무 숲속에서

팔이 잘린 상이군인처럼 고로쇠나무 몇 그루도 서 있었다.

돌무지에 모가지가 눌린

풀들이 비명을 질렀다.

살갗이 벗겨진 음나무와 팽나무도 신음을 뱉고 있었다.

절룩절룩 발목을 절면서

걸어내려오는 전나무들이

잠시 등 굽은 나무 등걸에 기대서

구름 흐르는 하늘을 오래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안개붕대를 칭칭 감은

지리산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불이 일렁이듯

진달래 철쭉꽃이

맞불처럼 번져가고

총구멍처럼 송송

옹이가 빠져 나간

고로쇠나무 숲에서

우윳빛 아침으로 세수한

이슬들이 툭툭

지리산 이마 위에 떨어졌다.





동상



라디오 속의 숲 / 김예슬


밤마다 할머니는 라디오 속에서 숲을 꺼낸다

전파를 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잎사귀들이

어두운 방 안 가득 채워지고

할머니는 허공에 손을 뻗어

오래된 나무의 살결을 더듬는다

라디오에 잡음이 서릴 때면

숲은 바람을 맞이한 듯 낮게 흔들리고

덩달아 떨리기 시작하는 할머니의 호흡


할머니와 숲의 비밀스러운 소통은

포클레인이 나무들의 긴 목을 부러트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라지는 숲을 힘 없는 몸으론 지킬 수 없어,

할머니는 나뭇가지 사이에 녹음기를 걸어두었다

개발공사가 잠시 멈춘 밤이면

상처 입은 나무들의 신음소리부터

그것을 위로하는 주변 나무들의 고요,

흐르는 바람이 연주하는 풀들의 푸른 음역들,

잎 새들이 땅 속으로 삭는 소리까지 녹음되었다


할머니는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나무들을 위로하듯

오늘도 천천히 숲을 펼치신다

테이프에 새겨진 바람의 결이 천천히 흘러내리며

방 안 곳곳에 숲의 내음을 퍼트린다

할머니와 함께 자라난 오동나무 장롱에도

어린 나무들이 솟아오를 것만 같이 환하게 결이 빛나고

계속해서 잎사귀를 뱉어내는 라디오

할머니의 방을 넘어 거실까지 점점 번져오는 숲!

 

 

 

 

728x90


대상



봄꽃 피는 산을 오르며 / 안태현


오후의 햇살을 비벼

슬쩍 색깔을 풀어놓는 꽃나무들로

온몸이 푸르고 붉어진다

봄꽃이 피는 산

삶의 자투리가 다 보이도록

유연하고 느리게

산의 허리를 휘감아 오르며

나는 한 마리 살가운 꽃뱀 같다

오랫동안 몸 안에 담아 두었던 어둠 벗어버리고

바람이 뽑아낸 연둣빛 새순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푸른 하늘이 내다보이는 산마루까지

달맞이 같은 추억을 끌고 오른다

고즈넉한 이 꽃길에

모두들 마음이 순해진 건지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다

길을 내주고 기다려준다

꽃뱀 한 마리

겁도 없이

봄꽃 피는 산을 홀로 차지하고 오른다





동상



식목제 / 송유미


흰 눈이 내리고 나무들 숲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구겨진 달빛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들, 저만치 앞서가는 오솔길 따라, 나무들 숲으로 사라졌다. 나는 문득 눈 속으로 사라진 나무를 생각했다.


옛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심었다는 아그배나무, 경을 새기기 위해 물 속에 삼 년을 담갔다가 그 희디흰 살결에다 팔만대장경을 새겼다는 산벚나무와 자작나무의 껍질을 말갛게 벗겨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천수만 장의 천마도를 밤을 새워 신라 여인들이 수를 놓아 새겼다는 장니와 죽은 자의 떠도는 유혼을 달래기 위해 정원에다 편백나무를 심었다는 선사들의 깊은 뜻과 태양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불을 숨겼다는, 회양나무 속으로 나는 잉걸불처럼 깊이 걸어 들어갔다.


우우우 불씨가 날리고 불탄 나무들이 눈에 덮여 살아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힘찬 발굽 소리와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잎잎이 푸르른 경을 품고 뿌리째 훌쩍 날아가 버릴 듯 차오르는 우듬지 끝들이 불탄 사람들과 함께 흰 눈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걷고 또 걷다가 한 그루 나이테가 되거나 나무속에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한 그루 나무로 태어날 수 있다면… 붉은 달이 내 심장처럼 가시나무에 걸려 뻐꾸기처럼 우는 밤이면.





동상



가을나무 / 김계숙


나무는 애초부터 물동이였다 눈물샘이었다


나무들 죄다 제 몸의 수분을 모조리 빼내고 있다

곧 지상에 뛰어내릴 나뭇잎 아프지 않도록

살면서 거쳐 온 봄과 여름을,

복수 차오른 슬픔과 아픔까지도 길을 내어 흘려보내고 있다

철새들의 이주로 밤새 수런거린 새벽녘,

한숨도 자지 못한 눈으로 숲을 바라보면

가을 숲은 물안개 자욱한 유리성이 되어 있다


가을 내내 지난날의 이력을 빨래 말리듯

시난고난 습기 찬 시름 한 자락 꼬덕꼬덕 말려버린 나무들,

그 눈물 흘린 흔적 감추기 위해 안개집을 지은 것이리라

안개의 길을 따라 나선 햇살이 제 붉은 볼을 살짝

잎사귀에 그려 놓았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햇살의 볼이 뽈고족족 가장 붉은 열꽃으로 필라치면,

그때서야 제 하늘을 제 살을 고요히 땅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가을나무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