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젖은 책을 읽다 / 김종인
별장 앞에 두꺼운 책 한 권 파란 글씨들이 움직인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글자들 저마다 수군거린다 키 큰 나무가 무엇인가 찾아 두리번거린다
손에 침을 묻힌 빗방울 쪽수를 확인한다 이리저리 글씨를 흔들어본다 마른 글씨들을 찾고 있다 조심해 아차하면 책장이 찢기니까 맨 앞줄에선 글씨가 소리친다 누군가 페이지를 북 찢어간다 그 바람에 쪽수가 달라지고 숨겨둔 향기가 한 움큼 날아간다
젖은 머리가 싫어요 ‘울음’이라는 글씨가 도리질을 해요 난 목이 말라요 ‘갈증’이란 글자가 마른 침을 삼켰어요 살살 만져요 ‘겁쟁이’라는 글자가 겁을 먹고 파랗게 질렸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라는 글씨가 가시를 세웠어요
그 많은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없나봐요 맨 뒷장 키 큰 나무가 벌컥 물을 들이켜고 옷이 다 젖었어요 꺾인 고개가 어깨까지 흘러 내리고 아, 비가 그쳤어요 책 한 권이 흠뻑 젖고 퉁퉁 불은 글자들이 떠내려와요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책,
나는 저 숲이라는 책을 말려서 다시 읽을 거예요
동상
낙엽을 따라가다 / 조영민
나는 낙엽의 정기구독자입니다
우울을 송금해보세요 전국 어느 곳이나
발행부수가 최대인 잡지가 배달됩니다
가격에 비해 페이지가 가볍다고요
이별을 다룬 책의 요약본쯤으로 생각들 하시지만
잘 보시면 맛집 추천, 지도, 겨울옷 입는 법 등이 있습니다
저는 부록 같은 지도를 즐겨봅니다
지도를 펼칠 때는 조심하세요
이 세상과 다른 길이기에
가끔 길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작은 잎맥길은 세상 길들의 압축이에요
사람이 만든 지도는 집으로 길을 잡아나갑니다
낙엽은 그런 집과 신호등을 버립니다
사람들은 큰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샛길을 없애 버리기도 하지만
크기만 다를 뿐 발행처가 같은 낙엽들은
저마다 큰길이 작은 길을 일으키고
작은 길들은 큰길을 일으킵니다
계곡물이 잎을 지워도 다음 해 봄까지
그 길들은 생선가시처럼 뚜렷이 남습니다
사람들은 영영 낙엽의 길을 가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길일수록 가장 가기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풀잎은 아예 한 줄로만 그어져 있네요
낙엽은 해안의 파도를 따라가든 구름을 따라가든, 길은
하나의 거대한 출입구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곳에서 내 생의 저녁까지 난 길을 찾습니다
가을날 낙엽책을 손에 든 누군가가 그 길을 따라
말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동상
숲을 위한 기도 / 임종훈
검봉산(劍奉山) 오르다 보았다.
하늘 향해 쳐든 푸른 칼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의 발치에서
허리까지가 온통, 화상(火傷) 자국인 것을.
산불이 숲을 휩쓸 때 나무들은
제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선 채로
생살 타들어가는 고통에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했을 것이리.
키 큰 나무들, 손 뻗어
두려움에 떠는 어린 나무들
번쩍 들어주지 못해
순식간에 화르르, 타는 것을
안타까이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리.
불 탄 자국, 가만히 어루만진다.
고맙게도 나무는, 제 안 깊은 곳에
맑은 바람과 싱그러운 향기,
심지어 메아리조차
푸른 기억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불길이 지나가고 난 후 나무는
안간힘 다해 그것들을 다시
울울한 잎들로 피워 올려
숲은, 여전히 숲인 것이다.
지금 나무를 쓰다듬는 나의 손길이
비록 치유(治癒)의 묘약은 아닐 것이라도
사나웠던 불길에의 고통이 나무의
흉터로 각인되지 않게 하십시오.
햇살에 반짝이는 잎들의 푸른 잎맥이
숲의 뭇 생명들에게 온전히 이어져
내내 푸른 목숨이게 하십시오.
숲이 늘 거기에 있어
때로 우리들이 그 공덕(功德) 잊을 것이라도
안으로, 안으로만 삭이는 숲의 침묵이
우리들의 삭막한 마음 저 깊은 곳에 이르는
청정(淸淨)한 메아리이게 하십시오,
크나큰 울림이게 하십시오.
산불 났던 숲에 들어
어쩐지 발화(發火) 지점이
내 안 어딘가인 듯만 여겨져
사죄(赦罪)를 청하듯
숲을 위해 기도한다.
타버린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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