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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제목 / 오정순(금상)



 책 한 권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산다. 바람과 새소리와 들꽃, 천둥 번개와 추위의 문양이 숨결처럼 퍼져 있는 활엽 그늘의 주름은 넓고 깊다. 책을 펼치면 한 장 한 장마다 터져 나오는 메아리 나무가 자랐던 숲이 활자로 촘촘히 박혀 있다. 굳은살 박힌 글자들이 문신 같다. 베어질 때마다 천둥소리 같은 울음이 파고들어 침엽의 뾰족한 지침들이 푸르다.


 누군가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면 멀리서 씨앗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까만 활자들.


 상수리의 페이지에서 도토리가 굴러 떨어진다. 침엽이라는 말에서 북풍이 분다. 목책이 되었다가 흰 연기의 예각을 불러오는 모닥불이 들어 있기도 한 책 한 권. 나무는 단단한 표피를 꿈꾸며 긴 시간의 이야기를 채워간다. 다 쏟아 부은 창백한 얼굴이 가시처럼 날카롭다. 우듬지마다 팔랑거리는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숲, 각자 제목을 단 나무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어지러운 나이테의 문양을 걸어 누군가 한 그루의 나무를 대출해간다.





별에게 부치는 편지 / 우년구(은상)


안압지 주변을 달리는 창문 틈으로

가만히 손을 내밀면

저마다의 산을 이룬 벼 싹 보리 싹의 사연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다그닥다그닥 바람을 타고

맑고도 갈기처럼 기품 있게 날아든다

논과 밭 저 끝자락으로부터

석양이 향긋하게 숯불처럼 피어오르고

듬직한 보름달이 밤풍경을 풀어놓으면

소리저수지 앞에 가만히 서서

어둑한 저편에서 빤히 날 쳐다보는 등대 빛에게 자랑한다

매미울음 달빛 수풀 벼 보리들의 이야기

저녁 내내 철판 뒤집느라 고기기름 배인 오라비들의 구슬땀

동생들의 하하 호호 웃음소리들을

한 줌 반짝임도 안 남기고 훌쩍 떠나

긴 여행길에 올라 있을 너희에게 보내리

하나하나 돌아와 저 넓고 높은 곳에

조용하고 밝게 비출





산을 들다 / 정미정(동상)


발부리에 닿는 풀잎의 소곤거림이

마른 귀를 적셔 닦아내는 아침

휘파람새가 새 노랠 연습하고 있어요 라, 라, 라

경쾌한 리듬을 타고

소나무가 고갤 까딱거리면

촘촘하게 내리는 햇살

굴참나무 허릴 껴안고 원스텝 투스텝

가빠진 호흡에서 산소가 퐁퐁 솟지요

휘파람새 노래에 아침이 조금 늦었나요

산자락을 두른 갈퀴현호색 서둘러 파란 불꽃을 지피네요

어머, 조팝나무들 금세 호르르 끓어 하얀 밥물

질금질금 넘치고 있어요

벌써 출출하시나요

산밭머리 할미꽃이 접힌 허릴 끄르고

이파리에 맺힌 이슬방울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요

슬슬 산등성이 오르는

이 구수한 냄새 라, 라, 라

골짜기를 한 바퀴 돌고 오는 휘파람새 메아리

산봉우리에 솥뚜껑처럼 얹힌 구름 슬쩍 밀쳐놓아요

뜸이 다 든 뜨끈한 산

속까지 든든해지는

사월의 산

 

 

 

관계 / 김경구(입선)


햇살 한 뼘 들어오고

사람들의 신발만 오가는

반 지하 벽지에 곰팡이 꽃이 필 쯤

늘 내가 만든 또 다른 틀 안에 뒤척였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눌린 채

숨 한 번 들이쉬고 내 쉬는 것이

때론 어려웠다


밤마다 단내 나는 몸 새우처럼 웅크리다

피곤한 웃음 가슴 울린 날

차를 타고 무작정 달린다

덜커덩 덜커덩 울먹거리던

낡은 차도 힘들다


맑은 강 일렁이고

푸른 산 든든한

그 곳은 선다, 나를 품어준다

오래 전 어머니의 탯줄은

나를 다시 이어주고

줄줄줄 멈출 줄 모르고 사랑을 넣어준다


난 곰실곰실 숨을 고른다

멈췄던 더러 정지하려던 심장이

꿈틀꿈틀 꿈틀꿈틀

움츠렸던 손도 발도 한 번 펴본다.

입도 벌려본다


금수산-

다시 길 떠나는 날 향해

따듯한 눈으로 손을 흔든다

오래전 마을 어귀 신작로에서

먼지 풀풀 내며 떠나는 버스

꽁무니가 점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내내 손을 흔들던 어머니처럼


단내 나는 고단한 삶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 가슴 또아리를 튼

희망이란 싹 하나

푸른 혈관에 움튼다


눈부신 여름 하늘 숲속을 지난다, 새소리 바람소리 감겨와

내 귀를 간질인다, 미소가 속살거린다.






도어즈 오브 라이프(doors of life) / 송옥선(입선)


유월의 어느 날, 나는

고봉산 숲길에서 나무들의 춤을 보았다.

퉁퉁하게 물이 오른 집게손가락으로

사뿐, 초록의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서

‘도어즈 오브 라이프’

우아한 왈츠 선율에 맞추어

뱅글뱅글 라인댄스를 추고 있었다.

생명의 문을 향하여 나선으로 기어오르며

나무들이 산을 고봉으로 퍼 올리는 중이었다.

펑퍼짐한 토기 위에 한 알 한 알

밥알을 쌓아 올리듯이

고봉의 산을 만들어 가는 무희들.

그들의 발엔 수없이 공이가 피었지만

오늘도 무희들은 춤을 멈추지 않는다

낯을 붉히며 하루가 영글고

봉긋봉긋 고봉으로 밥이 쌓이듯

나무의 몸에 또 한줄 결이 생기는 시간

솨르르 물소리가 들려왔다.

무희들이 목을 축이며 산을

고봉으로 고봉으로 키우는 소리

고봉산 산허리는 지금 라인댄스가 한창이다.

열려라 하나 두울 셋

‘도어즈 오브 라이프(doors of life)'


 

 



싹트는 행간 / 신준수(입선)



줄공책입니다 씨감자 파종하기 좋게 보습 지나간 자리 햇살 머무는 곳마다 거름 냄새 가득합니다 쓰고 그리기에 맞춤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에게도 빽빽하게 잎 나부끼던 밭이 있었습니다


가락지 같은 얼음이 우물 안에서 자라던 날 이랑에서 이랑으로 흘러 다니던 한 농사꾼 며칠 앓던 신음을 데리고 감자밭 귀퉁이에 파종되었습니다 품앗이 하듯 모여들어 한겨울의 이른 파종을 마치고 이삭 줍듯 유품을 정리하다 거기, 씨앗 묻듯 또박또박 눌러 쓴 농사일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자가 싹을 틔우고 어느 페이지에서는 논에 피를 뽑고 또 어느 페이지는 가뭄으로 속이 타고 수십 장에 적힌 곡식들만으로도 겨우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까요? 손끝,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페이지가 얇습니다


행간마다 온갖 씨앗이 발아하는



 

 

 

국수나무 / 윤옥란(입선)

 

  골목길을 지나 숲속을 들어섰다 펄펄 끓는 솥뚜껑을 누가 열어 놓았을까 안개에 휘감긴 국수나무 김이 모락모락 난다 오늘 이 숲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숲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국수 한 그릇 말아 내민다 밤새 고아낸 우윳빛 육수에 사리사리 담아낸 안개국수, 산사나무 이파리와 찔레순과 발갛게 익은 버찌를 고명으로 올려놓았다 잔치국수를 만다는 소문에 일찌감치 아랫목 차지한 나방 서너 마리와 능청맞게 갓 쓴 버섯양반도 집 앞에 당도했다 개울 건너 무당벌레도 곧 참석하겠다는 전갈에 국수나무 손길은 마냥 바쁘다 숲은 종일 국수를 끓여 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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