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수락산, 도서실 / 변심학
밤 독서를 즐기는 이슬이 다녀간 나뭇가지마다
침 바르고 읽은 흔적이 촉촉하다.
벌써 산새들, 오리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낭독소리
숲가에 무덕무덕 핀 망초들이 경청한다.
바람은 키 큰 느릅나무에 앉아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속독의 바람이 계곡의 물소리와 손잡고 합주를 이룬다.
도서관 맨 윗자리로 내려온 흰 구름,
향나무에 앉아 긴 수염으로 향내 맡으며 묵독 중이다.
어느 등산객은 제비꽃 방석을 깔고 앉아
표지가 하얀 자작나무 펼치고 주줄주절 그늘을 읽는다.
이곳 도서관은 대여를 해주지 않는다.
표지가 예쁜 미니 북을 절도(竊盜)해 가는 이를 본다.
연지 솔 같은 엉겅퀴꽃을 뿌리 채 뽑아가는가 하면
주근깨 아가씨, 산나리와 주렁주렁 복주머니를 달고 있는
금낭화 등, 야생화가 서가에서 뽑혀나간다.
도서관 사서인 태양은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아주지만
뽑힌 서가의 빈 무덤에 눈물이 고일 듯 움푹움푹 아프다.
음이온 문장들로 빽빽한 책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언제 불량한 독자가 책갈피 한 장 북 꺾어갈지
표지에 예리한 칼, 펜으로 기념비 같은 낙서를 해댈지,
전날에 그어놓은 숱한 낙서의 흔적이 몸피마다 아프다.
은상
지리산 시편 / 김찬순
봄 햇살들 활시위 팽팽히 당기는데,
탱크 뚜껑 같은 그루터기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재선충에 병든 몇 그루의 소나무 숲속에서
팔이 잘린 상이군인처럼 고로쇠나무 몇 그루도 서 있었다.
돌무지에 모가지가 눌린
풀들이 비명을 질렀다.
살갗이 벗겨진 음나무와 팽나무도 신음을 뱉고 있었다.
절룩절룩 발목을 절면서
걸어내려오는 전나무들이
잠시 등 굽은 나무 등걸에 기대서
구름 흐르는 하늘을 오래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안개붕대를 칭칭 감은
지리산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불이 일렁이듯
진달래 철쭉꽃이
맞불처럼 번져가고
총구멍처럼 송송
옹이가 빠져 나간
고로쇠나무 숲에서
우윳빛 아침으로 세수한
이슬들이 툭툭
지리산 이마 위에 떨어졌다.
동상
라디오 속의 숲 / 김예슬
밤마다 할머니는 라디오 속에서 숲을 꺼낸다
전파를 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잎사귀들이
어두운 방 안 가득 채워지고
할머니는 허공에 손을 뻗어
오래된 나무의 살결을 더듬는다
라디오에 잡음이 서릴 때면
숲은 바람을 맞이한 듯 낮게 흔들리고
덩달아 떨리기 시작하는 할머니의 호흡
할머니와 숲의 비밀스러운 소통은
포클레인이 나무들의 긴 목을 부러트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라지는 숲을 힘 없는 몸으론 지킬 수 없어,
할머니는 나뭇가지 사이에 녹음기를 걸어두었다
개발공사가 잠시 멈춘 밤이면
상처 입은 나무들의 신음소리부터
그것을 위로하는 주변 나무들의 고요,
흐르는 바람이 연주하는 풀들의 푸른 음역들,
잎 새들이 땅 속으로 삭는 소리까지 녹음되었다
할머니는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나무들을 위로하듯
오늘도 천천히 숲을 펼치신다
테이프에 새겨진 바람의 결이 천천히 흘러내리며
방 안 곳곳에 숲의 내음을 퍼트린다
할머니와 함께 자라난 오동나무 장롱에도
어린 나무들이 솟아오를 것만 같이 환하게 결이 빛나고
계속해서 잎사귀를 뱉어내는 라디오
할머니의 방을 넘어 거실까지 점점 번져오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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