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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봄꽃 피는 산을 오르며 / 안태현


오후의 햇살을 비벼

슬쩍 색깔을 풀어놓는 꽃나무들로

온몸이 푸르고 붉어진다

봄꽃이 피는 산

삶의 자투리가 다 보이도록

유연하고 느리게

산의 허리를 휘감아 오르며

나는 한 마리 살가운 꽃뱀 같다

오랫동안 몸 안에 담아 두었던 어둠 벗어버리고

바람이 뽑아낸 연둣빛 새순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푸른 하늘이 내다보이는 산마루까지

달맞이 같은 추억을 끌고 오른다

고즈넉한 이 꽃길에

모두들 마음이 순해진 건지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다

길을 내주고 기다려준다

꽃뱀 한 마리

겁도 없이

봄꽃 피는 산을 홀로 차지하고 오른다





동상



식목제 / 송유미


흰 눈이 내리고 나무들 숲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구겨진 달빛처럼 바스락거리는 이파리들, 저만치 앞서가는 오솔길 따라, 나무들 숲으로 사라졌다. 나는 문득 눈 속으로 사라진 나무를 생각했다.


옛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심었다는 아그배나무, 경을 새기기 위해 물 속에 삼 년을 담갔다가 그 희디흰 살결에다 팔만대장경을 새겼다는 산벚나무와 자작나무의 껍질을 말갛게 벗겨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천수만 장의 천마도를 밤을 새워 신라 여인들이 수를 놓아 새겼다는 장니와 죽은 자의 떠도는 유혼을 달래기 위해 정원에다 편백나무를 심었다는 선사들의 깊은 뜻과 태양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불을 숨겼다는, 회양나무 속으로 나는 잉걸불처럼 깊이 걸어 들어갔다.


우우우 불씨가 날리고 불탄 나무들이 눈에 덮여 살아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힘찬 발굽 소리와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잎잎이 푸르른 경을 품고 뿌리째 훌쩍 날아가 버릴 듯 차오르는 우듬지 끝들이 불탄 사람들과 함께 흰 눈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걷고 또 걷다가 한 그루 나이테가 되거나 나무속에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한 그루 나무로 태어날 수 있다면… 붉은 달이 내 심장처럼 가시나무에 걸려 뻐꾸기처럼 우는 밤이면.





동상



가을나무 / 김계숙


나무는 애초부터 물동이였다 눈물샘이었다


나무들 죄다 제 몸의 수분을 모조리 빼내고 있다

곧 지상에 뛰어내릴 나뭇잎 아프지 않도록

살면서 거쳐 온 봄과 여름을,

복수 차오른 슬픔과 아픔까지도 길을 내어 흘려보내고 있다

철새들의 이주로 밤새 수런거린 새벽녘,

한숨도 자지 못한 눈으로 숲을 바라보면

가을 숲은 물안개 자욱한 유리성이 되어 있다


가을 내내 지난날의 이력을 빨래 말리듯

시난고난 습기 찬 시름 한 자락 꼬덕꼬덕 말려버린 나무들,

그 눈물 흘린 흔적 감추기 위해 안개집을 지은 것이리라

안개의 길을 따라 나선 햇살이 제 붉은 볼을 살짝

잎사귀에 그려 놓았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햇살의 볼이 뽈고족족 가장 붉은 열꽃으로 필라치면,

그때서야 제 하늘을 제 살을 고요히 땅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가을나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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