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나무의 내력 / 서상규
숲에 꽂힌 책 한 권을 펼친다
자음과 모음의 광합성으로
푸른 음절을 엮어 잎맥을 틔운 나무에서
어머니의 일대기를 읽는다
가문 살림에 발톱이 닳도록 뻗어 내린
뿌리에서 길어 올린 샘물체를
꽃잎의 입술로 흘려보낸다
나비가 날갯짓으로 넘긴 페이지에
꽃가루받이로 맺은 풋과일,
어린 것을 배곯지 않게 하려고
글씨를 또박또박 파종한 가파른 밭고랑을
잎새의 호미질로 김을 맨다
굵은 땀을 발효된 거름으로 쏟으며
행간의 땅기운을 붇돋는다
온종일 노역에 무릎 저린 각운으로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식구들이 소복한 밥을 수저질 할 때
밥알이 둥둥 뜬 멀건 숭늉으로
나이테 속 공복을 달랜다
나무가 써나가는 고된 문맥에서
과일이 내재율로 과육을 부풀린다
생의 단락마다 옹이 박힌 관절로
나뭇가지가 단풍든 색연필로 밑줄을 그은
허공에 잘 영근 열매가 매달린다
마른 몸에 등줄기 굽은 어머니,
충만한 결실로 성장한 혈육을
산 너머 큰 세상으로 내보낸다
냉골인 빈방에 홀로 남겨진 마무의
낡은 표지를 가슴 시리게 닫는다
[동상] 할머니 나무 / 정미경
제주 어리목 산벚나무
단풍나무 어린 것들을 제 팔뚝에 키우고 있다
늙은 줄기 붙잡고 사는 어린것들은
산벚나무를 어미라 여길까
바람이 낳은 씨앗을 받아내 싹을 틔우고
빈 젖 물려 키우는 늙은 유모 산벚나무
높은 줄기 위에 목말 태우고 둥개둥개 얼러주며
어린 단풍 두 그루를 키운다
새소리 한 술, 발아래 산그늘도 한 젓가락
오물오물 받아먹고 자란다
고사리손이 자꾸만 빈 젖을 더듬는다
젖이 돌지 않는 할망나무
지나가는 먹구름 끌어다 치대
묽은 미음 쒀 먹이는 순간
후두두 빗방울 쏟아진다
새들마저 날아간 빈 가지
어린 단풍의 시린 발등을 이끼로 덮어주며
산벚나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늘마저 환해지는 봄날
바람에 장단 맞춰 춤추는 산벚꽃 속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한몸이 되어버린 저 단풍나무에도
다음 봄엔, 하얀 산벚꽃 피어날까
숲은 어미 없이도 그렇게 대를 잇는다
'국내 문학상 >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4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0) | 2015.01.11 |
---|---|
제13회산림문화작품공모전 입선 (0) | 2014.02.01 |
제13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 (0) | 2014.02.01 |
제12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 (0) | 2012.11.06 |
제12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입선 (0) | 2012.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