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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굴참나무를 읽다 / 김희현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새 꺽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은상] 나무의 경전 / 윤신애

 

달이 부풀 때마다 새들이 내려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새들이 무거운 신발을 벗어놓고 나무에 깃들면
밤새 널어놓고 간 지문을 떠왔다.
산의 어깨를 짚고 내려와 시키지 않아도
선문답 같은 낱글자들을 숲에 그려놓는 수고에 새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고르게 지문을 남기는 버릇 때문이었다.
해질녘까지 교대로 산의 정수리에 다가가 나무를 끓일
제대로 된 불을 얻어오려다가 날개를 태워먹기도 했는데,
촘촘한 자간에 그을린 깃털이 남아 있기도 했다.
물비린내가 산을 감싼 날은 새들이 먼저
수평선까지 다녀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는 순서를 기다렸다가 소금물로 얼굴을 씻고
맨 나중에 온 새소리도 씻었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가 행간과 여백으로 통과시켜
가지마다 더도 덜도 없이 23행 14글자로 나뭇잎들이 경작되었다.
내장을 남김없이 비워야 깊이 울리는 목어(木魚)가
산을 흔들어 깨울 때 팔만 개의 경판이 숲을 뒤덮고 있었다.
닥나무를 헹궈 놓은 한지 위에
산이 스스로 진하게 고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의 족적으로 천천히 번졌다.

 

 

 

 

[동상] 나무 한 권 / 유택상

 

붉은점모시나비기린초 온종일 풀잎과 타전하고있다
은방울꽃 방울방울 종을 울린다
이슬이 눈물을 떨군다
개울물에 아침을 씻는다
까막닥따구리가 갈참나무에 앉아
딱다그르르 음율을 높인다
미나리아제비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을 읽는다
멧새의 울음이 계곡물 사이로 들린다
바람이 애기똥풀 질경이의 꽃들을 펼쳐 놓는다
푸름 잎들이 음색을 낸다
자작나무가 나뭇잎을 흔든다
숲길은 꽃들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삭정이로 불 지피면 잉걸불에 단감나무 붉은 등불을 켠다
산에 들면 알록달록 옷 입은 호랑나비떼 
그러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이름들 
행간이 울퉁불퉁한 마디마디에
길 위에서 사색을 꿈을 꾼다
산을 오르는 동안 
새들이 개울물에 밑줄을 긋고 햇볕이 다녀간 
굴참나무 오리나무에 귀가 먹먹하다
초록이 무르익어 갈 무렵에는 
나무가 읽어 내려간 문장이 새롭다
새의 주소도 꽃잎의 향기도 게절속에서 
열매를 키운다
그럼 어디쯤일까
구름을 몰고 온 눈동자에 숲의 나날을 읽는다
풀잎과 나무사이 생의 어혈들 족적으로 가슴 시리다
햇볕이 내리자 앉은뱅이꽃 꽃잎 하나
툭, 떨군다

 

 

[동상] 느티나무 그늘 

지금은 매미소리가 한창입니다
나무 밑으로
오이 호박 가지 고추 옥수수 토마토 참외 주렁주렁 뒹글고
구철초 상사화 백일홍 갖가지 꽃으로 고봉으로 잔치를 합니다
산새들이 한가롭게 산을 넘고
땅은 무성해지는 동안 아이들은 눈망울로 자벌레의 눈물을 세어보고
어머니는 햇살을 풀어 물레를 돌리고 날마다 낡은 옷을 꿰멘 자리
그늘 아래 서면 우물가에서도 
반질반질 삶은 되살아나 언 땅을 녹이고 있습니다.
저무는 길 끝으로 창을 내고
시린 길 끝으로 건초처럼 메말라가던 물살처럼 생이 무거웠던 가슴들
그늘은 달빛에 젖어 노을처럼 아름다운 가을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내 유년 시절 시골 버스는 깊은 골짜기를 몇 굽이씩 휘돌아 나오고
해맑은 아이들은 일상이나 고전 등에서 수집해 온 초목에 촉수를 세우고
어느노래라도 불러서 신명나게 춤을 추고나면
질긴 목숨하나 옷소메에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이젠, 가래질 하던 이미소도 쇠스랑도 탈곡기도 도리깨도 삽도 잠잠합니다.
다만 굽은 등으로 일궈 온 들깨 밭이 동내 어귀 들길마다 가득합니다

느티나무 그늘아래 서면 
산과 숲이 나무와 나무가 꽃과 꽃이 진열장입니다
매미울음이 박혀 있는 자리 폭염이 고요하게 잔잔한 무렵
부추꽃이 하얗게 피어습니다

 

 

 

 

[동상] 나무를 태우는 시간 / 한교만

 

마당에 나무가 누워있습니다
이십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지난 태풍에 일생이 베어진 뒷산 느티나무입니다
아버지가 도끼로 몇 차례 토막을 낸
기울기가 사라져 편안해 보이는 자세군요

어머니가 아궁이에 땔감으로 밀어 넣습니다
느티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갑니다
타닥거리며 몸을 뒤트는 의성어는
제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을까요

저녁연기는 오늘 밤 굴뚝을 비집고
얼마간의 무게로 허공을 밀어 올리겠지요
방이 데워지고 가마솥이 끓을 동안
어머니는 저고리 안의 땀을 훔치며
나무로부터 얼마쯤의 무게를 덜어 냈을까요
나무는 얼마나 가벼워 졌을까요

세 시간 뒤 나무 한 채가 사라졌군요
2킬로그램의 숯과 숯 주변을 떠나지 않는 20그램 남짓한 재
30그램이 조금 넘는 꾸불꾸불한 저녁연기와
5킬로그램 쯤 되는 가마솥의 열기
어머니 젖무덤 사이로 흘러내리던 땀 20그램을 남긴 채
나무는 흩어진 제 무게를 참아냅니다

저녁 내내 부엌 주변을 서성대다
20그램의 날갯짓으로 퍼덕거리는 새 한 마리는
느티나무에 둥지를 틀었던 후투티일까요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무들의 타고남은 영혼의 무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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