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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사려니 / 길덕호

 

시커먼 짱돌 하나 가슴에 쑤셔 놓고
사려니* 숲에 왔다.
절망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삼나무 숲 그림자
화사한 온기는 그늘의 힘에 밀려나고
축축한 음지의 걸음으로
나에게로 들어왔다.

비자나무 바둑판의 눈금 위
단수에 걸린 새 한 마리
파닥이다 쓰러진다.
이번 생의 마지막은
이곳에서 비자목의 주름으로 살련다.
허방에 빠진 발목도 접질리는 삶이었다.
설문대할망*도 물에 빠져 죽어 버린
한이 맺혀 들끓는 가마솥의 죽이었다.

물찻 오름을 걸으면서 삼나무를 본다.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껍질이
상처를 싸매 해진 붕대처럼
오래된 절망의 시간을 감고 있었다.
절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보듬어
항아리에 담아서 곰살맞게 발효시키는 것
줄기와 가지의 가느란 지문에도 햇살이 깃들어
삼나무가 삶나무로 한 발 뭉클 다가선다.

사려니 오름을 오른다.
한 발 두 발 절정에 다다르면서
땀에도 젖지 않는 새의 부리로
그 이름을 읊조려 본다.
사려니 사려니 하다가
살려니 살려니 한다.

삼나무, 비자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상처 입은 나무들이 옹이가 되어
더 깊이 더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허방에 빠진 발목에서 뿌리가 나고
줄기는 학의 둥지를 틀었다.

사려니 오름에서 해오름이 있었다.

 


* 사려니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신로에 있는 제주 오름들이 한눈에 보이는 오름 사려니 숲, 사려니 숲길로 유명하다.
* 설문대할망 :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우수상] 뿌리의 반경 / 이정희

 

나무들은 흔들리는 반경만큼
뿌리를 뻗는다
흔들리는 반경은 나무들의 사회
그 안에 이웃이 있고 음지와 양지를 배치하며
태양의 입사각을 준비한다
새순을 밀어 올리는 일도
알고 보면 철저한 교육 뒤끝인 셈이다
어느 쪽도 편애하지 않고
둥근 지구를 닮은 반경에 순응하라는
바람교육헌장을 배우는 것이다
숲엔 나뭇가지들이 미명처럼 긁어놓은
생채기들이 맑은 날에는 다 보인다
수없이 바스락거리며 주고받던 귓속말
뿌리의 비명인 듯 말줄임표
바람 길에 납작 엎드린 빠른 체념
어느 땅속도 알고 보면 우주의 한 귀퉁이쯤
뿌리들의 사회가 아닌 곳이 없다

말도 반경을 가진다
햇살 같은 말은 샌들 바깥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을 간질이고 봉인지 뜯긴 소문은
반경을 한참이나 벗어나지만
흔들리다 다시 중심을 찾는 반경들은
살짝만 비틀면 서로 겹치기 일쑤다
바람의 입김에 맞서는 뿌리가 없듯
늘 그 반경 안에 발을 묻고 있다
하물며 지구와 달도 중력이라는 반경을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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