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등단시] 제15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기혁|┏등단·좋은詩

좋은소식 | 조회 4 | 10.03.08 08:11 http://cafe.daum.net/sechonsa/P4PB/27436 
//

제15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_기혁

 

                                                                          심사위원/ 김종해, 신달자, 장석주 시인

 

사춘기 아침 (외 4편)

 

  기 혁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주인공 B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방치되었다

대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들도 목적이 있었다

잡지를 접은 두 손이 비슷한 뉘앙스로 포켓에 들어간다

잠복한 형사들의 수만큼 일상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 없이 녹차가 썼고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지난 밤을 뒤졌다

스카치테이프로 개미를 잡는 엄마와

죽은 개미의 수만큼 악몽이 발견되곤 했다

개종한 다음날에도 신발에 껌이 붙는 이유를

젖꽃판에 털이 자라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의 속옷이 청바지에 물들고

물 빠진 청바지에 핑크색 얼룩이 남아도

햇살은 처음부터 색깔만 말려 주었다

주인공 B가 떠나가는 플랫폼에

장르에 없던 도둑고양이가 들어온다

도둑고양이를 발로 차는 누군가

C에게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1'이 울렁거림으로 희미해진다

식탁에 올릴 생선대가리 속으로

독이 든 저녁을 넣고 싶었다

무심코 껴안은 사람들과

지하철마다 부딪치는 그들의 성기가

두 눈을 예외로 만든다 나는

안개, 안개 같았다

 

-------------------------------------------------------

 

두 단어의 세계

 

 

에베레스트경이 초모랑마*를 발견한 뒤에도

늘어난 건 몇 방울의 잉크

핼리혜성이나 B612가 발견된 다음에도

몇 가지 수학공식이 늘어났을 뿐

노트 정리를 잘하면

곳곳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구십 퍼센트 바다생물도

약간의 여백이면 충분해

'모든'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고

조물주처럼 보살펴주고 있기에.

몇 번씩 전쟁을 치렀지만

지우개가루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반듯하게 접으면 작고 가벼워

죽은 친구의 이름이나

낯선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는 지구

가끔씩 글자를 혼동한 사람들은

바람과 지하철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울다가, 웃기도 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

그녀의 노트엔 보탤 수 없는 유머가 있다.

 

 

*초모랑마, 영국 측량기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에베레스트를 부르던 이름.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이 붙은 이 화석은 440만년 전 인류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보다 120만 년 정도 앞선다. 미국<사이언스>지 선정'올해의 10대 과학적 성과'1위.

-------------------------------------------------------------

 

비닐의 기원

 

 

   검정비닐을 들어 올린 바람은 자신의 손가락만 사용하려 들었어요 어린 가축의 혓바닥이나 토막 난 고등어 따위가 담겨 있던 검정비닐이에요 가슴을 받치고 손잡이 없는 주둥이를 벌리면 제 것 같은 핏물이 흘러요

 

   온몸이 찢겨져도 담지 못할 내용은 없었죠 계단을 오르고 새떼를 오르고 자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검정비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비닐이 묵직해졌어요 바람은 몰랐죠, 바스락거리는 목젖이 돋아날 줄은 사소한 시빗거릴 주워 담을 줄 말이에요 인류학자들의 논쟁거릴 삼켜버렸어요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기도 했구요

 

   검정비닐이 두려워요, 사람들은 호주머니 가득 목소릴 숨기거나 깊은 밤 고함을 지르고 도망 다녔어요 자신의 메아리에 놀라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신음을 낸 적도 많았죠 검정비닐을 들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 밤에는 사나운 풍문이 떼지어 몰려왔답니다 모국어와 전화기를 의심하다 눈짓과 몸짓이 뒤섞인 당신의 홍당무에도 바람이 들지 몰라요

 

   저기 검정비닐을 든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오네요 비닐을 벗고 심호흡하고 있어요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도 지을 수 있군요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속을 드러낼 시간이에요

 

----------------------------------------------------

 

네 번째 사과

 

 

   이곳에서 너는 사적인 공간이야. 나의 이빨과 혓바닥이 머물다 간 싸구려 호텔이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숙을 허락하는 거실이야. 붉은색 하드커버를 가진 너는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지.가장 은밀한 부위에는 신화를 숨기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나는 고전적 성교양식을 학습해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낯빛을 바꾸는데 일조했어요. 만유인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지구를 떠넘긴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럼으로써 당신은 지구의 종말 따위에 절망하지 않았어요.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 속에서 '달다'의 반대말을 고민하지도 않았죠. '사과'의 '맛'에 대해 사유하는 당신은 당신의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종족이에요.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오직 벌레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과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모릅니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은 동거인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먹은 그는 반으로 쪼개집니다. 그 속에 그의 사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

 

턱선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

출처 :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글쓴이 : 삼경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