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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 하차투리안 외4편

 

박은정

 

 


하차투리안은 네모난 박스를 들고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우거진 정글을 가볍게 턴을 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우년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네모난 박스는 죽은 인형들의 집합체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온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온다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아주 이상한 일들이 많은 날일 테니까
정오가 되면 하차투리안은 이불을 말고
흔들의자에 기대 낮잠을 잤다
귀가 먼 부랑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당신은 우리의 복화술사
당신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
멋쩍게 웃던 하차투리안이 잠시 코를 곤다
일상의 불운 따위는 개나 던져주라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수정 구슬을 들고 타로카드를 섞으며
내 목소리가 들리니
너는 지금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우리는 한때 불운을 즐기기 않았어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거룩하게 잠이 들텐데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지 오래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Fade Out*


오늘밤 액스트라 행인들이 지나갑니다
장렬하게 눈을 감는 건 오래된 기억을 더듬기 위한 신호입니다
막이 오르면 흑백의 그림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지요
잠깐,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오늘밤 오래 허락하신다면
망설이던 당신이 담배를 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동안
알몸의 각도가 되는 건 시간문제지요. 몸짓의 비주얼이 좋으니까요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토록 점멸하는 불빛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요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이 수즙게 멀어지고 있군요
멀어질수록 허상은 선명하게 반영됩니다
모든 증후군은 위독합니다 출근길 신호등은 막바지에 거룩하구요
나는 매일 똑같은 처방전을 받아 적습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수소문하는 동안
관객들이여, 위독한 추측은 당분간 보류입니다
이상하거나 어색한 부분들은 바로 배경이 될테니까요
아, 마지막 대사를 놓친 당신이 오버랩되는군요
당신의 수치심이 유머가 되는 경계를 생각합니다
망각으로 가는 노래는  모두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희미해져가는 것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천천히 어두워지며 암전 상태가 되는 것

 


출처 :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글쓴이 : 양귀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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