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도* 외 4편
신 은 영
*마음의 지도 사람들이 찾는 마음의 지도가 어쩌면 발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 늘 밑바닥과 마주하며 넓어지는 발 한 번도 얼굴과 정면으로 서 본 적 없는 발바닥에 마음이 훤히 보이는 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은살 떼어내 지문이라도 사라지면 스스로 길을 헤매고 자꾸만 안쪽으로 혹은 바깥쪽으로 발바닥 부르트도록 걸을지도 모른다 움푹 파였지만 무엇도 고여 있지 않고 항상 비어 있는 자리 서걱이는 바람의 길목 앞에서 아치형의 발바닥이 지탱하는 삶의 무게가 아름답다 양팔저울의 저쪽에는 달이 기울고 발바닥도 없이 뒹구는 별들이 끄떡끄떡 다가오는 날에 둥근 봉분을 두 발 밑에 아스라이 밟고 사는 사람들 산언덕의 봉분을 차례로 밟으며 올라선 밤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는 별빛을 베고 누워 만날 수 없는 발밑을 생각하고 흐린 날이거나 개인 날이거나 좀처럼 얼굴 들지 않는 발바닥처럼 쏟아지는 별빛도 새벽녘의 안개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인 채 나도 이 시절을 지나볼거나 웅덩이에 물보라가 일듯이 하늘이 흐려지며 웅왕거릴 때 내가 가야 할 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생각하고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늘의 발바닥이 길을 보여주는구나 네 마음의 길은 또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다시금 상상해보며 안아볼 수도 없는 거대한 지도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얼마나 많은 길들이 아득한 내 마음 지탱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떠날 길을 내다보는 것이다
*빈센트 워드가 감독한 영화 제목
구름을 파는 상점
탁자 위에 구름이 한 잔 놓여 있다
갈증은, 잠시 참아야 한다 구름에 설탕을 넣고 흔들 때 하늘 가득 휘 몰아치는 솜사탕 릴리리 릴리리 입에 넣고 찰방찰방 씹는 어릴 적 물 장구치던 강물의 온도 침이 고인다 아, 지울 수 없는 물의 성질 다만 물 은 고여야 하는 것일까 흘러야 하는 것일까 꿀꺽, 침을 삼킨다
구름은 걸으면서도 마실 수 있다 양수의 기억은 언제나 나를 꿈틀거 리게 한다 구름을 들고 침대에 앉는다 출렁거리는 하늘, 넘칠 듯 냄비 를 넘실거리는 뜨거운 증기, 밤새 베갯잇을 적시는 이들을 위해 침대 위에선 구름을 쏟지 말자
나는 구름이 자욱한 이불 위에서 잠깨고 구름을 입고 외출한다 가는 곳마다 비를 몰고 다니는 구름의 정령이 된다
구름을 파는 상점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 내가 기다리는 이는 물로서 오실 것이다 형체 없이 걸어와도 절대 쏟아지는 법이 없다 눈 부처로 잠시 어리는 구름, 머문 흔적이 없다 마른 대지에 나가기 전 나 는 오늘도 구름 한 잔을 테이크아웃한다
밤의 노래
낮잠을 자면 가위로 하루를 잘라 먹는 것만 같아 노란 색 없는 무지 개, 손 하나 넣으면 쑥 빠지는 허공의 깊이, 빛을 질질 흘리며 하루해가 지고 말지
오래 전 사람들은 나라를 세웠어 성의 운명은 쇠약하는 것이지 쥐들 만 남아 찍찍거리는 성, 사람들은 성을 뛰쳐나와 혼자 살면서 부패하는 성을 남몰래 그리워하였어
오늘 성에서 노래가 들리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 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한밤중에 크레 파스를 들고 나는 그 성을 찾아갔지 크레파스로 잡목 숲에 길을 그렸 어 배가 고프면 산딸기를 그려 먹고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지 노란색 이 없어서 밝은 해는, 그릴 수 없었어
성에 들어가니 소녀가 쭈그려 앉아 울다가 고개를 들었어 크레파스 병정들이 그를 다치게 했어요, 나는 손에 있는 크레파스를 얼른 감추고 는 소녀 옆에 앉아 어둡고 축축한 성에서 함께 울었어
밖에서는 오래도록 비가 내렸어 지금, 혹시 네가 사는 곳에서도 그 비가 내리니? 네가 가진 노란색으로 해님을 그려봐 아름다운 화분을 키워볼게
오래된 농담
아, 아 내가 지금부터 몸 이곳저곳을 이야기한다고 나를 변태라고 생 각하지는 말아요 나 그냥 평범한 놈입니다
여자의 어깨에 살짝 삐져나온 브래지어 끈을 본 적 있죠? 레이스 달 린 브레지어 끈 옆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 살점들 그 주름과 옹골옹골 붉은 딱지와 그리고 숨결을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그녀는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려 입고 볼록 나온 아랫배에는 또 다른 씨앗이 굵어가고 있었지요 나는 씨앗의 숨소리를 들으며 스웨터의 보푸라기 아래 은밀한 집과 뻗어나가는 길을, 뒤뜰을 걷고 또 걷듯이 바라보곤 했답니다
때때로 숨겨 놓은 꿀 훔쳐 먹듯 그 몸을 더듬어보기도 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하루해가 저물도록 달달하고 불안한 맛이 목젖 깊숙이 후끈거 렸습니다
홍시처럼 오래 익으면 기어이 물컹해지는 여자들이 집집마다 잠들 어 있겠지요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이면 둥글게 말아지기도 하는 길을 끝내 한 번 안고 싶은 밤입니다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멀리 나가도 문득 선해지는 길에 눕습니다 몰캉몰캉한 살 만지며 잠들던 시절처럼
바람이 가는 길
여름밤 엄마와 나란히 누워 회전하는 선풍기 바라보면서 아, 바람도 쪼갤 수 있구나 생각한다 사과가 두 쪽으로 경쾌하게 갈라지듯 나 태 어나던 날 우리의 이별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사과가 품고 있던 씨를 도려내던 기억으로 나는 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꿈꾸고 있다 휘황한 바람의 결을 둘로 꼭같이 나누듯 나란히 누운 여자 둘의 슬픔 을 사과 쩍, 가르듯 나눠버리면 금세 한 귀퉁이 물렁거리며 썩어갈 텐 데 한 쪽으로 기울어야만 아스라이 버틸 수 있는 무게중심이 여기에 있다 서로 돌아눕는 저녁 바람에도 등이 있어 서늘한 길이 엎치락뒤치 락 땀을 식혀주는 것인데 좀처럼 제 집은 찾지 못하는 바람의 뿌리는 어디서 오는가 어느 뿌리이기에 우리를 감싸 보이지 않는 스산함에 가슴 떨며 이 밤 을 건너가게 하는가 어둠이 깊어지면 은밀한 바람 숨죽이며 지나가려 나 은하수 반짝이는 강물을 건너 캄캄한 발밑 더듬으며 디딤돌 밟을 때 저 멀리 반짝이는 것은 바람인지 뿌리인지, 간혹 어깨를 스치는 물 수제비에 놀라며 문득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짐짓 은하 수를 끌어다 풀어 놓으며 혼자서 은빛 기억을 경쾌하게 뛰어가기도 하 지만……. 그래, 오늘은 사과를 쪼개듯 김치를 젓가락으로 나누듯 머리를 양 갈 래로 땋아 내리듯 바람도 쪼개어 긴 여름밤 지날 수 있어 다행이다 밤 의 한편을 끌어안으며 내 눈썹을 쓸고 가는 바람의 손길은 자작나무로 자라 멀리 손 흔들며 반짝이네
□ 당선소감
시詩, 따뜻하고 아늑한 언어의 집
외로운 시절을 지날 때마다,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 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곤한 육신을 뉘일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지만 그 집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집이 생기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생각만 해도 따뜻하고 안온한 그 거처는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이 꽉 메어올 적마다 기댈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잃기도 하고 때 론 서로 할퀴기도 하니 육체가 깃드는 곳이나 영혼이 깃드는 곳이나 장만하기는 매한가지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는 시가 따뜻하고 아늑한 언어의 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벼린 날과 같아서 잘못 다루면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처럼 손에 가시가 박히지만 그 재료와 성질에 맞게 다듬으면 비를 피하고 눈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근사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가 지은 집에서 영원히 산다 하지는 않겠지만 눈보라 내리 치는 허허벌판을 지나다 만나는 허름한 여관이라도 며칠 밤 편히 쉬다 가 다시 한 번 보따리 질끈 동여맬 수 있다면, 그이의 뒷모습 한없이 바 라볼 수 있다면 내게는 그런 낙이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시를 마다 않고 읽어주신 이시영 선생님, 이름만 떠올려도 벅 찬 꿈이 되는 안도현 선생님, 시의 조형법을 가르쳐 주신 박종성 선생 님, 퇴고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신 김중일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 립니다. 초고를 맨 처음 읽어주던 미선언니와 곁에서 항상 자신감을 심어준 지나언니, 오랜 친구 송이, 함께 고생한 단국대, 우석대 문창과 학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첫 길을 열어준 《시인세계》에 감사드리며 별똥처럼 스치우는 시인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으로 마지막 한줌까지 타오르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