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레비 스트로스의 청바지 / 김도언
물경 101세로 세상을 떠난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 Levi Strauss)가 무질서와 우연에 기댄 삶의 샘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같은 리바이스(Levi’ Strauss) 청바지를 입고 유인원의 유골을 채집하는 여행을 떠났다고 상상하자. 그에겐 제임스 딘 같은 늠름한 동행자가 없다. 그의 배낭 속엔 여벌의 청바지와 가죽신발, 지식의 풍속, 상상력의 논문집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인원의 유적을 찾는 데 성공했다. 통곡하는 열대와 희희낙락하는 냉대 사이에서 우리의 잠은 누구에 의해 보호되는가라고 물었던 유인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는 인류가 불면증에서 구원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인원의 불면증이 다음 날 자신의 치부를 무엇으로 가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시작됐을 거라고 추정했다. 레비는 자신의 생각을 친한 시인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그는 내 형제들과 부모들이 나누었던 언어가 해방시킨 것은 슬픔밖에 없다고 말한 유인원의 기록도 찾아냈다. 레비가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을 때 청바지 자락이 천막처럼 펄럭였다. 보풀이 일었다. 바람이 관통하는 세계 속에 얼마나 풍부한 결핍이 있는가, 얼마나 무한한 부재가 사는가. 레비는 청바지 호주머니에 유적지에서 채집한 작은 볍씨와 눈썹과 각질 조각을 넣었다. 그러자 청바지에 불룩한 푸른 힘줄이 생겼다. 레비는 죽기 직전에서야 리바이스를 벗었다. 문화의 근육으로 단단해진 청바지의 빛은 어지간히 바래 있었다.
스티븐스의 아침 / 김도언
스티븐스는 자전거를 닦는다
차가운 겨울 아침
스티븐스가 털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닦는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닦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일 테지만
스티븐스에겐 가장 스티븐스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털모자를 벗고
자전거 바퀴에 달라붙어 있는 거리들의
혈액을 털어낸다
혈액이 반짝인다
스티븐스가 지나간다
스티븐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가 닦은 자전거가 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자전거를 닦는
스티븐스의 아침은 겨울의 외부에서 돌아왔다
스티븐스가 털모자로부터 멀어진다
낙엽이 어슬렁거린다
스티븐스의 자전거는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다
그걸 이해한 자 역시 스티븐스뿐이다
K의 장애 / 김도언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K는 우울증과 관련해 그 어떤 징후도 가져보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콤플렉스를 꺼내 체중계에 달아보곤 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콤플렉스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나무의 고독을 경외하고 가족과 불화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 그것이 그의 고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동료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으며 우연히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에게 격렬한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K는 물론 가족에게 전화 같은 걸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착한 아이들을 칭찬하지도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날 때는 탁구장에 가서 탁구장 주인과 내기탁구를 쳤다. 그것이 그에게 있는 유일한 융통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잃어버렸다. 식초와 매운 것을 좋아했고 구두는 검은색만 신었는데 너무 자주 빨리 걷는 바람에 구두굽을 자주 바꿔야 했다. 언젠가부터는 식초에 흥건히 젖은 구두코를 빨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그는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병적으로 강을 좋아했다. 특히 수변에 지어진 수영장을 좋아했다. 수영장에 딸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젊은 여자들의 이름을 상상하다 보면 지루한 계절이 금방 지나갔다. 가끔 그의 상상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언어가 태어나곤 했는데 그는 그것들을 모두 시에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K는 가끔 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의 미각과 그의 상상력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시는 언제나 열심히 역부족이었고 그의 인격이나 건강을 호전시키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나쁜 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나쁜 시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젊고 어리석은 시인 몇몇은 그의 나쁜 시에 열광했다. K는 나쁜 시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K는 오랫동안 슬픔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경멸하고 조롱했던 것들을 용서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한테도 용서받지 못했고, 그것은 그를 용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그가 난폭하게 척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힘껏 용서에서 도망쳐 장애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너는 / 김도언
두 마리의 개가
차바퀴에 깔려 죽은
비둘기의 날갯죽지에 코를 박고
존재하지 않는
하늘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리고 너는
황홀하지 않아서
발가락이 시렵다
사랑 앞에 놓인 전치사를
지우던 밤
큰 눈이 내린 도시의 까마귀들처럼
불편한 신경질 때문이라고
그리고 너는
나를 바라보던 마지막 눈을 닦고
그리고 너는
귀를 파다가 죽었지
죽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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