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시인세계》신인상 당선작_ 최라라
비를 맞는 자세 (외 4편)
최라라
너를 위하여
푸른 세탁소가 자전거를 탄다
빗방울이 닿는 순간 푸른은 잠시 푸른을 잊는다
작정한 듯 세탁소는 흠뻑 젖는다
자전거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 젖어주는 것이 젖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자전거만 모를 뿐이다
소리 혹은 소음
엄마가 쪽진 머리 자르고 파마를 했다
아버지는 저녁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숟가락 끝이 부르르 떨렸다
엄마는 쩝쩝 소리 나게 밥을 먹고
오빠와 나는 씹지도 못한 밥을 삼켰다
빗방울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딪혀 깨진 파편들이 땅바닥에 떨어져내렸다
비의 바깥에서 비를 맞는 저녁은
손톱 밑이나 발톱 밑이 먼저 젖는다
어떤 보고서
페이지를 넘기기 전 나는 생각한다
비의 직립은 겨울나무의 성립과 병행하는 걸까
나무는 비의 형태로 서 있고
비는 나무의 자세로 내린다
사람의 직립과 비할 바는 아니다
무엇이든 피하고 보는 사람과는 달리
비가 어깨 움츠리는 자세를 취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어느 날, 우연히,
진숙이 할머니는 허리 구부러진 채로
큰오빠는 똑바로 누운 채로
세탁소 김씨는 자전거 위에 앉은 채로
비를 맞는다
혹자들의 의견,
두 팔 벌리거나
고개 한껏 젖혀 하늘로 향하는 포즈는
빗속으로 들어가기에 가장 좋은 자세
우연히, 비가 당신에게 온다면
무작정 끌어안고 볼 일이다
젖은 다음의 당신과 악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신발장에서 뱀장어 찾기
1
케이, 너 정말 내 뱀장어 못 봤어?
그가 바지주머니에서 파란 별똥별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사라졌다던 그 별이었다
케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2
장화 사러 갔다가 뱀장어 한 마리 샀다 수족관이 좁아서 꼬리가 나선 모양으로 감긴 뱀장어였다 길이가 긴 플라스틱 통을 사서 풀어주었다 꼬리가 펴지지 않아 통은 길이만 긴 바지 같았다 장화를 살 걸 그랬다 뱀장어에rps 옷보다는 뚜벅뚜벅 걸어갈 장화가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뱀장어 파는 가게는 신발 가게에 살짝 걸쳐져 있다 신발 진열대와 수족관 끝부분이 겹쳐 있어서 뱀장어와 신발이 가족 같다 신발 보러 갔다가 뱀장어 사는 일은 자연스런 우연이다 장어! 장어! 신발 주인이 쇳소리 치는 순간 주인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잇을 뿐 뱀장어처럼 움직이는 신발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일이다
3
깜빡 잠든 사이 뱀장어가 사라졌다
101번 타고 오다 109번으로 환승해서 온
그 길을 뱀장어가 돌아갔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동화적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졋다는 건
순순히 누군가를 따라갔다는 뜻
저녁 내내 뱀장어와 얘기하던 케이가 있었다
4
케이의 별은 입구가 좁고 통로는 넓었다
별 한가운데서 만난 케이는
뱀장어 꼬리 신발을 신고 잇었다
활짝 펼쳐진 꼬리를 보려고
나는 동전을 꺼내 신발 위로 던졌다
5
케이의 별에 뱀장어가 산다는 건
누구나 믿을 만한 사실이 되었다
잃어버린 신발들이
케이의 별에 가득하다는 것도
아무도 본 적은 없지만
증명된 사실이 되었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일은
케이의 별에서 오래된 금기사항 중 하나
뱀장어를 찾는 일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카메라 루시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라는 생각에 눈 맞추지 말아요
굳이 무엇이든 봐야 한다면 당신을 보세요
한 시간 전쯤의 당신이면 어떨까요
금 간 거울 속 당신이나
깜빡 잊어버린 순간의 당신이라도 상관없어요
카메라는 가장 아름다운 당신을 향해
신호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두 팔 꼭 붙일 건 없어요
지금은 슬픈 타조처럼 날개를 활짝 펼칠 때,
사진 속 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틈이니까요
거기엔 당신과 당신 사이가 들어 있답니다
웃으면서 흘렸던 눈물과
미안해, 사과부터 하고 싶던 생일날의 입술
혼자 먹는 밥상을 차리던 손끝
사진엔 그런 것들이 숨김없이 찍혀 있지요
참고로 나는 사진 찍을 때
그를 부른답니다 그 순간
한 시간 전의 내가 얼마나
환하게
따뜻하게
불려오는지,
나는 나를 충전한다
삐딱하게 걸린 수건은 안정적이다
창을 흔드는 바람은 지나치게 고요하고
허리 쪽이 덜 마른 스타킹은
어제까지 적적햇을지도 모른다
작은 때수건은 긴 때수건을 덮치고
방해받지 않은 시간은 방해받을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실리콘에서 자란 곰팡이를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 사이를 관계라고 해도 될까
물방울은 사라진 게 아니라
유리에게 먹힌 거라는 결론을 얻기까지
나는 자꾸 발밑으로 침을 뱉는다
대칭을 잃으려고 허리 구부리는 순간
먼저 갸우뚱해지는 벽을 타고
물 흘러가는 소리
나는 미동도 없이 흔들린다
나는 빈틈없이 안정적이다
때밀이 변천사
돌멩이로 때 밀던 어릴 적이 있었다 둥글고 가볍고 매끄럽고 까칠한 돌멩이를 찾느라 오래 강가를 빙빙 돌곤 하던 날이 있었다 그 돌멩이가 어느 날 이태리타월이 되었다 돌멩이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쓸 만하다고 내 등을 밀면서 엄마는 말하곤 했다 손바닥을 쏙 집어넣던 이태리타월이 펼친 수건 모양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셀프 등밀이였다 슬쩍슬쩍 눈치 보다 등 미실래요? 타이밍 맞춰 말 건네면 아무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 등 돌리고 앉은 순간이 참 고맙고 편안한 시절이었다 요즘은 목욕바구니마다 긴 이태리타월 하나씩 담겨 있다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등을 맡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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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라라 : 본명 최영미. 1969년 경주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제18회 신인작품 공모 본심에 오른 21명 권수진 「어떤 눈」 외 9편
김서주 「기린 씨에게 보내는 편지」 외 9편
김지훈 「수취인불명」 외 9편
박경주 「계란이 왔어요」 외 9편
신지영 「내정자」 외 10편
안명하 「자본 속의 카스트」 외 14편
유병현 「갈멜 수도회 부활절 장엄 미사」 외 9편
유지원 「모래시계」 외 9편
이명예 「붉은 집」 외 9편
이수진 「의자」 외 9편
이어진(본명 이혜순) 「케익이 된 사람」 외 10편
이예진 「불의 언어」 외 9편
이현일 「디펜드 하세요」 외 10편
임민경 「디데이 토마토」 외 9편
전경심 「당신의 메밀꽃 필 무렵」 외 10편
전영관 「밀입국」 외 14편
정동재 「태양을 붙잡는 끈」 외 9편
조유선 「나는 당신을 암기합니다」 외 9편
조혜경 「의자」 외 18편
최라라 「비를 맞는 자세」 외 10편
하수옥 「주사위」 외 9편
<시인세계> 2011 여름호 신인상 심사평
_ 심사위원 : 김종해, 장석주, 정효구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읽고 내가 고른 것은 김서주 씨의 「기린씨에게 보내는 편지」 외 9편, 이수진 씨의 「의자」 외 9편 등이다. 두 사람은 언어 감각, 상상력의 생동감, 상투성과의 싸움 등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자기 체험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그것을 섬세한 언어의 풍경으로 바꿔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두 사람의 시적 독창성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우선 김서주 씨.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천진한 눈으로 훑고 발랄하게 뒤집으며 심미적 이성으로 제 구성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의식을 가사상태로 만드는 일상의 자명성들을 뒤엎는 상상의 유희들이 돋보인다.「오후 저편에서 태풍이 밀려올 때」「비에 농담」 등이 그렇다. “연인과 나는 서로의 주머니에서 하루치의 골목을 꺼내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있었는데요”(「기린씨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부터 우리는 머리 위에 태양이 떠오르는 나쁜 꿈을 꿀 것이다”(「그럴듯한 종말」), “당신의 목소리는 당신이 갖고 있는 등의 체온을 닮았어”(「네가 이곳에서 보게 될 것들」)와 같은 구절들에서도 상투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사유와 상상력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이수진 씨.「꽃에 대한 단상」「그림자」를 좋게 읽었다. 18세 소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은유의 전압(電壓)이 높고 세련되었다. “악마라고 발음하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밤들의 몸들이 팽팽해졌다/그림자를 빌어 부릅뜬 태양을 채찍질했다/그늘마다 발굽이 생겼다”(「그림자」)와 같은 구절을 보라. “나는 의자를 버렸는데 거기 앉았던 것들은 도무지 버려지지가 않아/매일 밤 부서진 자신의 신전에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앉은뱅이 남자가 있지만, 의자에게는 썩은 발목도 자라나고 무럭무럭 구름도 피어나지/(중략)/구름을 구름이 타고 놀고 태양에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흑점들의 발자국/예를들면 식탁과 식탁의 섬세한 틈/구름과 태양까지의 거리/머나먼 별과 방금 막 발현된 핏방울”(「의자」)나, “소년 속에서는 다른 소녀와 다른 여자와 다른 소년이 싹텄다/상한 우유팩을 살피는 섬세한 감정으로 나비를 접었다”(「꽃에 대한 단상」)와 같은 구절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상상력은 오성(悟性)과 무관하게 사물의 핵심을 찌른다. 이게 직관의 힘이다.
「이것은 어느 날의 코메디」외 10편을 투고한 최라라 씨가 당선자로 결정되었다. 심사위원이 세 명이고, 세 명의 뜻이 엇갈릴 때 절충과 타협의 화학작용으로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하는 법. 나는 망설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당선에 동의했다. 최라라 씨의 시는 능숙하다. 이 능숙함이 함정일 수도 있다. 모든 능숙함은 잉여를 낳는다. 재능의 능숙함은 약간의 모자람과 여백을 참지 못한다. 납득할 수 없는 불가해성, 결론의 유보를 용납하지도 않는다. 시는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차라리 ‘존재’의 불가해한 심오성이다. 그 심오성에 가 닿으려면 깊은 교호 작용이 있기 전까지는 대상을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의심이 없는 믿음은 광신이 되고, 회의하지 않는 지식은 재앙이 되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대개 좋은 시인들은 자기의 재능을 의심하고, 자기의 신념을 회의한다. 최라라의 시들은 그의 시구와 같이 “빈틈없이 안정적”(「나는 나를 충전한다」)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게 반드시 좋은 것일까? 좋은 시인은 결핍과 불안정성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견디며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약의 내적 질료로 쓴다. 시의 세계에서 ‘잉여’는 악덕이고 질병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의 코메디」나 「비를 맞는 자세」나 「어디선가 본 듯한 딸기잼」들의 시적 수준은 앞의 김서주 씨나 이수진 씨의 가장 좋은 시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체험의 하중(荷重)을 받아내는 사유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다만 최라라 씨가 어느 지점에서 쉽게 상투성과 손잡는 게 안타깝다. 상투성에 기대는 것은 게으른 탓이다. 더 큰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해, 작은 완성들을 부끄러워하고, 크고 작은 실패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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