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속,  편안합니다 외 4편   /   안성덕



세검정으로 읽었네

쉰 고개를 넘으니 영락없이 당달봉사네

비데의 세정을 세검정으로 읽는 아침

거사를 끝낸 사내들이

피 묻은 칼을 씻었다는 자하문 밖

세검정에서 구린 항문을 씻네

물줄기를 리듬으로 할까

마사지로 맞출까,  고민을 하네

부엌의 무딘 칼날도 한 번 못 세워 주면서

그저 밑이나 씻고 있네

허나 바꾸어 생각하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성도 싶네, 글쎄

엄동에 똥도 안 묻힌 손은 왜 씻어?

경마 잡히듯 따끈따끈 달궈진 변기를 타고 앉아

똥끝 타던 어제를 깨끗이 비우네 구린

똥구멍을 씻네, 괄약근 옴찔거리며

지그시 눈을 감는 이 맛이야……

아무나 알려구 아암

속,  편안합니다





   뻥을 치다



두리번거리던 김 중사

참호 속에 수류탄 한 방을 까 넣는다

펑,  강냉이 파편이 어지럽게 튀고

포연이 낭자하다

팔팔개소주집 흑염소영감 움찔

빈 입을 오물거린다

그의 자동화기가 불을 뿜는다

베트콩 잡던 얘기는 이미 다 아는 레퍼토리

그가 잡은 베트콩이 족히 일백은 넘는다는 걸

시장통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부비추랩에 오른쪽 다리를 날리기 전

그의 용감무쌍을


어슬렁거리던 검둥개가 저만치 물러선다

귀에 딱지가 앉은 그 뻔한 뻥치는 소리를

큼큼거리던 하릴없는 오후가

한 움큼 주전부리한다


두 눈 부릅뜨고 정글을 누볐다는 그

한눈 팔지 않고 튀밥을 튀긴다

고엽제에 비늘도 빠져버린 이무기 한 마리

삼례 오일장에서 뻥을 친다

잔당을 섬멸한다 펑 펑,

개소주집 안마당에 수국 벙근다


 

 



   뽕짝 메들리



  자귀 꽃잎이 대책 없이 붉던 밤이었어 뽕짝리듬에 몇 순배 마이크가 돌아가던 지하노래방 겨우 시다 딱지를 뗀 통박기 나의 노래는 가문 인천강처럼 금세 바닥을 드러내었지만 수소달이 소매달이 언니들의 레파토리는 풀려도풀려도 끝이 없는 실꾸리 같았어 메들리로 풀어지는 카우스달이 허리이본 언니들의 레파토리는 한도 끝도 없었더랬어 머리에 얹은 실밥이 희끗희끗 그대로 세월이 되어버린 언니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실패도 없는 노래꾸리를 자꾸만, 자꾸만 풀어내었어 점 하나에 울고 웃으며 남이 된 님이 보고 싶어 솔기도 없는 목청을 돋웠어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 뽕짝 메들리가 하루에도 열두 시간씩 미싱 소리보다 크게 라디오 볼륨을 올리기 때문이라고는 차마 생각지도 못한 채 늦도록 끝나지 않는 야유회가 지겨웠어 걸신들린 언니들의 노래보단 눅눅한 곰팡내가 정말 지겨웠단 말야





  태양초 말리기



길가에 샐비어 붉다

천장 격자무늬 속에 담배연기만 뿜어넣던 휴일 오후

관촌 오일장 세물 생고추 사러 갔다


고추장도 담가야 하고 김장도 해야 하고

매운 아내 등쌀에 달고 맵고 실한

태양초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사나흘 쨍하게 말려야 하는데

희나리가 나면 어쩐다,

말복에 보일러를 돌리고 얇게 펴 널었다


안방에 갇혀 찜질방이 따로 없다

후끈 아내 몸이 달아오르고

밤이 깊도록 맨몸뚱이 훔쳐보던 놈들

때깔 더욱 곱다


화냥년 같은 칸나 붉던 날

물기 걷힌 옥상에서 꼬들꼬들 말라 간다

아내 얼굴 잘 마른 태양초 같다

올 겨울 맛있게 맵겠다



  

 


   저승사자를 따라가다

 


 

  산신령님 이름이 뭐죠,  부음을 접하고 달려간 산악회원의 상가 영안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우린 닉넴으로 통했으니까요. 누군가 핸폰으로 산신령님의 실명을 알아냈죠. 갹출한 부의금을 넣고 막 돌아서려는데 접수처 청년 방명록에 서명을 부탁하더라고요. 김만수, 평소대로 써넣으려다 가만 생각해 보니 글쎄 상주가 우릴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요. 그래요. 고심 끝에 솔낭구, 뒤이어 고갤 끄덕이던 산꼭대기님도 닉넴을 써넣습디다.  접수처 청년 표정 참 묘해지더구만요. 일행이 선녀와 나무꾼, 이라고 계속 써넣자, 딱 뭐 씹은 얼굴을 하더라니까요. 민망하긴 우리도 매한가지였지요. 화톳불이 그렇게 화끈거리는 줄 미처 몰랐다니까요. 쥐구멍에 그냥 대가리 콱 처박고 싶은데 일행 중 하나가 자꾸만 머뭇거립니다. 누군가 거듭 채근을 해대고, 마지못해 개미만한 글씨로 에헤라디아, 라고 써넣는 순간 마지막 남은 회원 글쎄 총알처럼 뛰쳐나갑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저승사자님 같이 가요.

  쪽팔려 딱 죽고 싶더라고요.



*


  안성덕 약력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가톨릭문우회 회원.

현재 전주 한국전력 근무.


*

 

 


 

< 심사평 >




   시 읽기의 즐거움  /  김종해



 《시인세계》 이번 신인작품 공모엔 온라인 응모가 62명, 메일과 우편 응모가 81명, 총 143명이 투고했으며 작품 편수로는 1800여 편으로 많은 응모작이 투고되었다. 김중식 시인의 마지막 예심 명단에 오른 사람은 그 가운데 19명이었다.(별도의 명단 참고) 예심을 거쳐 마지막 최종심까지 남은 사람과 작품은 강민주의 「꽃을 바라보는 법」(외 9편), 한성희의 「링거플러그」(외 11편), 최성익의 「금」(외 8편), 유성애의 「조용한 가족」(외 9편), 안성덕의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이다.


   다섯 사람 모두 예비시인으로서의 가능성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 당선작은 단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뽑지만, 《시인세계》 신인상 공모 당선작은 '다섯 편 모두 당선작'의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세 편의 뛰어난 작품이 있다 하더라도 나머지 작품의 편차가 심할 경우 탈락하지 않을 수 없다.

  최성익의 「금」과 유성애의 「장미의 자살」이 선자들 사이에서 좋은 시로 논의되었다. 또 강민주의 「꽃을 바라보는 법」과 한성희의 「링거플러그」가 당선권에서 논의되었으나 '다섯 편의 당선작'을 뽑을 경우, 그것에 미흡했다는 평가였다.

선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강민주의 「꽃을 바라보는 법」과 「나침반」, 「전갈좌」 등의 작품이 오랫동안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당선 시인으로 뽑힌 안성덕의 시들은 평이함 속에 시의 재미와 즐거움이 들어 있다. 또 신인답지 않게 시의 화법 운용이 노련하다. 소외된 삶의 정서를 탄력 있는 서사로 희화화, 희극화함으로써 시의 활력과 재미를 배가시킨다. 누구나 간과하기 쉬운 삶의 틈새를 예리하게 잡아내어 시화하는 솜씨도 만만치 않다.

   "달궈진 변기를 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괄약근 옴찔거리며" 변을 보는 「속, 편안합니다」는 호젓한 웃음마저 유발시킨다. 시의 언어가 항상 함축적이거나 복합적인 긴장관계에 있지 않고, 의도적으로 자기 품격을 낮추거나 해체시켜 떠들어 보이는 것은 시 읽기의 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안성덕의 「저승사자를 따라가다」와 같은 시는 시의 희화화, 희극화의 재미를 보여준 작품이다. 상가 영안실에 문상하러 간 산악회 회원들의 닉네임 때문에 펼쳐지는 시의 개그쇼― 시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노련한 시의 화법이 즐겁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시인의 시의 영역을 주목하고 싶다.

 

 


*



  울림이 있고 웃음을 주는 시 / 강은교



   예심에서 본심으로 넘어온 작품들을 심사위원들이 돌려가며 열심히 읽은 결과 대부분의 작품들이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언어의 담금질들을 보여주곤 있었으나 그 이미지들이 작위적이어서 진정성이 문제가 되었으며 어떤 시들은 그 이미지가 너무 폭력적이기까지 하여 읽고 있는 심사위원의 눈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그 현란성은 오히려 시를 산만하게 하고 있었다. 아나모르포즈(anamorphose)를 지나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까. anamorphose는 사물의 피상적인 외양 너머에 숨겨져 있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현대시의 중요한 기법이 되긴 하나, 그것이 잘 실천될 경우에는 대상 너머에 숨어 있는 생각도 못한 '울림'이 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시들은 지나치게 그 기술을 사용한 결과 오히려 작위성과 산만성을 드러내기만 할 뿐 시적 울림이 없었다. 그 옛날의 시론, '이규보의 신의론(新意論)'이 새삼 생각날 정도였다.


  그러한 시의 숲길을 거쳐 최종으로 남은 작품은 「금」외 8편, 「꽃을 바라보는 법」외 9편, 「링거 플러그」외 11편, 「조용한 가족」외 9편,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들을 보다 심도 깊게 토의하며 재삼, 재사 돌려가며 읽었다. 그 결과 이 중 「금」외 8편, 「링거 플러그」외 11편의 시들은, 그 중 몇 편은 그 언어를 다루는 솜씨, 그리하여 '울림'을 마련하는 솜씨 등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으나 대체로 그 시적 수준이 고르지 않아 대상으로 뽑기에는 적당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꽃을 바라보는 법」외 10편은 그 시적 구성이 만만치는 않았으나 언어와 필연성과의 관계, 울림과 시적 메시지와의 관계, 성찰성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시인의 시편들은 「조용한 가족」외 9편,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이었다. 이 중 그 알레고리성이 뛰어나며 여운 내지는 울림이 있고, 전편의 시적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게까지 만드는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을 대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그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문운을 바란다. 그러나 나머지 네 시인도 언젠가는 문단에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정진하시기를 빈다.

 

 


*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시 / 이숭원



  예선에 통과되어 올라온 19명의 응모작 중 최종적으로 5명의 작품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를 하였다. 그 작품들은 일정한 수준 이상을 유지하면서 다른 개성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우열을 논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종 당선작을 추천하기 위한 내 나름의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인다운 신선함이 있어야 할 것, 손끝의 재주로 만들어진 작품보다는 삶의 체취가 담긴 작품일 것, 응모작 중 5편 이상이 고른 수준을 보일 것 등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삼고 작품을 정독하였다.


  최성익의 작품은 간결한 심상과 새로운 감각이 돋보여서 「금」,「별」등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긴장이 풀어져 시어의 집중력이 유지되지 않았다. 유성애의 작품은 대상을 보는 시선이 날카로우면서도 절제의 미학이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시어의 리듬을 살리려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몇 편 작품의 상투적인 결말이 못내 아쉬웠다. 강민주의 작품은 독특한 관능적 감각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양한 심상과 기법은 야전을 많이 치른 노련한 병사의 기량을 떠올리게 했다. 그 능란함이 오히려 의도된 미학 같다는 느낌이 들어 당선작으로 미는 것을 머뭇거리게 했다. 한성희의 작품은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 점착력 있는 시어 구사, 다양한 형식 등 좋은 덕목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링거 플러그'. '유빙', '안식각' 등 낯선 어휘의 제목들이 체험보다는 관념으로 시를 제작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안성덕의 작품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 한눈에 구별되는 차별성을 보인다. 응모작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웃음 속에 삶의 애환을 담아내는 활달한 어법이 인상적이다. 심각한 포즈의 시만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를 대하니 시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시어와 형식의 탐구에 집중하면 더 좋은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안성덕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심사위원 모두가 아무 이견 없이 일치를 보인 것도 기쁜 일이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며 시의 길에 들어선 모든 투고자들에게도 좋은 결실이 있기를 빈다.

 

 

728x90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 이애경

수혈



붉은 햇빛이 피는 봄날, 가시밭길에 쓰러져있는 엄말 끌어당겨요 축 늘어져 딸려오는 엄마, 꽃 지듯 몸이 지고 있어요 몸 군데군데 코가 빠지고 실밥이 너덜거려요 작은 바람에도 팔랑, 뒤집히는 엄마를 고르게 펴요 뜨개질도 재봉질도 할 줄 모르는 나는

하는 수 없어요 늘 하던 대로 수선 집에 맡겨야죠 어떡하나요, 구멍 난 몸에 덧댈 조각이 없어요 내가 가진 건 성긴 슬픔이거나 젖은 마음 뿐,

하는 수 없어요 젖은 마음이나마 오려 구멍 난 엄말 메워야겠어요 물빛 엄마를 물들여야 겠어요.

어떠세요 엄마, 제 마음 잘 스며드나요?


--------------------------------------------------------------------------------------------

양파



환한 알몸,
양파에게도 부끄럼이 있다는 것 나 껍질을 벗기다 알았네
한겹 옷을 벗기자 놀란 양파 살갗을 움츠리네
저 자연스런 본능은 가장 깊은 곳에 여성의 생식기를 숨겨둔 때문이라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맥박소리
쿵쿵 심장 뛰는, 씨눈이 길 여는 소리
환청, 그래 환청이라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잘라버린 뿌리 설마 그것이 파란 씨눈의 젖줄이었을 줄 나 까맣게 몰랐네

알몸 드러난 순간
맵게 노려보는 눈빛, 독기를 품었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독이는데
아 글쎄,
꽃처럼 활짝 제 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저를, 중심을 다 내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만 아찔, 두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이네


------------------------------------------------------------------------------------------------

그녀의 재봉틀



두두두, 밤늦도록 말을 타고 달려요 안장 위의 그녀, 휘날리는 말갈기를 보드랍게 쓰다듬죠 네 평짜리 마구간엔 모래 같은 보푸라기 날리구요 붉디붉은 그녀의 눈 말발굽소릴 따라다녀요 얼마나 달렸을까요 잠시 고삐를 늦추어요 지친 말이 털썩, 모래바람 위로 주저앉아요 가쁜 숨 내려놓고 괜찮다, 괜찮다고 서로를 위로해요 숨을 고른 말이 먼저 히힝, 무릎 일으켜요 달리는 말발굽 아래 꽃송이 피어나고 초록 이파리를 심는 그녀, 부지런히 고삐를 당겨요 힘껏 페달을 밟아요 하나의 꽃밭이 완성될 때마다 어둠이 부풀고 허기가 부풀어요 꽃을 피우는 푹신한 이불 한 채, 이쯤에서 잠시 꿈길을 걸었나? 고삐 놓친 손끝에서 꽃비린내 번지고 말 한 마리 쏜살같이 달아나요 헛디딘 말발굽 아래 피다 만 꽃 한 송이 누워있어요 충혈 된 전등, 졸음 가득 된 눈이 뚝뚝, 빛을 흘려요


----------------------------------------------------------------------------------------------

봄은 웃음이 붉다




봄 닿는 곳마다 웃음이 핀다

한 홉 웃음에 뒤란 산수유꽃 피우고 한 됫박 웃음에 거리의 벚꽃 피우고 한 말의 웃음에 온 산 진달래꽃 피우고, 피우고

겨우내 마른 몸에
물이 돈다

긁적긁적, 내 몸이 가렵다


---------------------------------------------------------------------------------------------

선인장




새끼들 옆구리에 달고
一家를 이룬 선인장
얼마 전
탯줄 자르듯 몸에서
새끼들 떼어냈다

자 이제부터는 목마름도
스스로 견딜 줄 알아야 한단다
작은 화분으로 옮기는
순간,
솜털 같은 가시를 세워
몸 밖을 바짝 경계한다

나를 내보냈던 문
잡고 있는 손을 그만 놓으란다
다섯이나 매달려 뼈마디마저 헐렁해진
몸, 이제 닫을 시간이라고
노쇠한 그림자
열렸다,
닫혔다,
숨이 가쁘다

떼어낸 새끼들 내려다보는 어미 선인장
핑, 젖이 돈다
젖몸살을 앓는다



--------------
이애경 전남 영암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6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
2007년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

심사평


'남성적인 힘'과 '서정성'

김종해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예비시인은 모두 열 사람이었다. 이분들은 '시인'의 이름을 얻기 위해 모두 열 편이 넘는 힘들인 옹모작을 각기 투고했다. 나름대로 평이함을 뛰어넘는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작품 한 편 한 편의 미세한 언어 쓰임새와, 감성과 함량의 눈금을 꼼꼼히 따지는 선자의 눈에는 작은 허점마저도 간과될 수 없었다.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선자의 주목을 받은 사람은 최란주의 땡볕법정 외 9편, 박승류의 햇살검객 외 9편, 이건의 씨앗론 외 11편,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햇살검객은 표현은 예리하나 생활 속에서 상처받을 수 있는 화자의 여러 검법 나열이 조어造語에 가까웠고, 씨앗론은 꽃사과에 대한 사색적 탐색은 신선하나 산문적인 어투가 응축력을 잃고 있어 탈락했다.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의 뇌쇄적인 와인잔의 표현, 땡볕법정의 '사랑'에 대한 시로서의 법률적 판례, 네모난 거울의 고소인과 피고인의 양면을 보는 화자의 시각은 독특했다. 그러나 함께 투고한 10편 모두 이 같은 시적인 응축과 긴장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경합한 작품은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과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두 사람이 내보인 시풍詩風은 판이했다. 이애경의 시풍은 따뜻하고 섬세한 서정시의 아름다움이 각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행간마다 감성이 살아 있고, 삶과 존재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피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수혈과 같은 작품은 생명의 절실성과 내통하는 '마음속의 수혈'을 볼 수 있다.
김산의 시풍은 활달한 남성적인 힘과 우주적인 상상력을 깨닫게 한다. 가공의 시의 공간을 화자의 현실로 연결시켜 가는 능력도 만만치 않다. 광릉, 우드스탁 같은 시는, 축제의 가상공간 속에 실제로 초대받은 젊은이처럼 열광하는 울림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시를 놓고 선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며 숙고했다. 그런 연후 이애경, 김산 두 사람의 당선을 결정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기대한다.


---------------------------------------------------------------------------

서로 다른 시세계의 균형과 조화

신달자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심사는 늦어지고 있었다. 심사 마무리에 가서 본심에 든 원고 모두를 다시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심사는 난항에 들고 있었다. 당선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도 감돌았다.
우선 다섯 편의 작품을 거론하기로 했다. 이건의 씨앗론,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 박승류의 햇살검객,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이었다. 다시 혼돈에 들었다. 이건과 최란주의 작품도 시적 자질이 눈길을 끌었지만 오랜 설왕설래 끝에 박승류, 김산, 이애경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세 작품은 다시 심사위원들의 공론에서 갈등의 파도를 탔다. 박승류는 구두, 햇살검객 같은 작품으로 나이만한 삶의 경험을 통해 잘 가라앉은 사유를 독특한 터치로 생동감있게 그려놓았으나 왠지 공허하고 잡히는 것이 없다는 평이었다.
김산은 모든 작품이 펄펄 나는 듯한 상상력 솟구치는 젊은 근육질의 언어들이 알싸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는 해도 왠지 이거다 싶은 뭉쳐진 사유의 전달의지가 허약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애경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의 재봉틀, 수혈, 양파 정도의 작품은 냉철하면서 진지하고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작의 묘미와 섬세한 서정의 절박성이 보였지만 다른 작품들이 가벼운 소품이었으며 신인으로서 우려되는 저장된 사유자산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심사는 김산, 이애경 두 사람을 뽑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시인세계>의 상금문제를 극복하면서까지 두 사람을 주기로 결심한 것은 두 사람의 시세계가 사뭇 다르면서 두 사람의 시가 보완상응하는 균형을 갖는 것으로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어보자는 합의 때문이다. 그 균형은 이 시대의 시단에 지극히 필요한 양극의 조화라는 중요한 영양제를 각기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음을 알린다.
어렵게 등단한 두 신인의 시가 기대를 넘어서서 문명의 횡포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의지가 되는 시의 깃발 역할을 성실히 해 주기를 빈다.


-------------------------------------------------------------------------

도전적이고 젊은, 시적 가능성

정효구 (평론가)


오늘날, 우리 시단의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의 비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크다. 너무 많은 것은 전혀 없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다多' 가 '강强'은 아니다. 다변이 달변일 수도 없으며, 달변이 가슴을 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진화를 믿고 싶은 마음은 신인의 등장을 기다릴 때마다 설렌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10명의 응모작은 높은 기대 탓인지 그렇게 흡족하지만은 않았다. 시란 곰삭은 '진언眞言' 이어야 한다는 자각, 언어는 침묵에 가까울수록 힘이 있다는 인식, 유사한 상상력과 이미지는 타인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등이 더욱 깊숙이 응모자들에게 각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 있었다. 극기와 자기다움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더 오랫동안 생각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산, 이애경, 박승류의 시는 관심을 끌며 몇 차례 논의를 계속하게 하였다. 김산의 시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활달함과 왕성한 생명력, 이애경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섬세한 서정적 관찰력과 화법의 독특함, 박승류의 시가 지니고 있는 고단한 생체험과 그것의 애틋한 승화과정이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김산의 시는 좀더 강력하게 수렴하는 응집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 이애경의 시는 시창작의 수원水源이 보다 충일해야 하겠다는 마음, 박승류의 시는 그 전개과정이 좀 더 유연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전해지는 강한 시적 가능성은 그들 가운데 한두 사람을 당선자로 선정하자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하였다. 세 사람을 놓고 고민하다가 시 속의 도전적이고 젊은 기운이 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두 사람, 김산과 이애경을 최종적인 당선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번에 아쉽게 제외된 박승류의 시는 물론, 경쾌한 언어구사력을 지닌 최란주의 시, 주변을 보듬어 안는 성실성이 뛰어난 이건의 시도 앞날을 기대할 만하다. 당선자 두 사람은 물론 이들 모두가 정진하여 '참시인'의 길을 가기 바란다.

출처 : 살아가면서
글쓴이 : 魔怠子 원글보기
메모 :

 

 

 

제9회 시인세계 당선작

 

 

 

 김산 시인

 

197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2006년 <웹진 문장> 연간 최우수 작품상

2007년 제9회 <시인세계> 신인상

시산맥, 시월 동인


-----------------------------------------------------------------------

 

        

 

 

날아라 손오공 / 김산

 

 별이 내게로 왔다 이 별에 내리기 전 나는 잠시 여자의 몸속에서 살았다 이제 나보다 큰 별이 나를 잉태하고 있었으므로, 쿤* 별을 여의주로 물고,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거리가 팔만대장경이다 나는 팔만 사천 자를 날아서 왔다

 

 비와 바람과 구름에 새겨진 한 자 한 자는 내 주름살로 그대로 판각되었다 나는 천공을 어지럽히던 모든 활자들을 주름감옥에 가두었다 비로소, 나를 옥죄던 번뇌와 근심들은 잠잠해질 것이므로, 이제 목판처럼 나는 단단해질 것이다

 

 이 별의 사람들은 부적을 든 삼장법사처럼 순하고 깊은 눈으로 나를 본다 어느 날, 아이들이 노인들을 낳고 또 다른 낯선 별과 조우했을 때 아이들은 내가 만든 감옥의 열쇠를 하나씩 열어 볼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진지하게 내가 왔던 별을 생각하리라

 

 고로, 황포한 나의 활자들이 수천의 분신으로 날아오를 때 차마 일어서지 못한 내 육신을 생각한다 이 별이 내게 왔을 때, 내가 나를 가두었을 때, 그리하여, 내가 이 별을 괴로워하며 몸부림칠 때를 생각한다 가만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 페이지씩 경전이 넘어간다 나는, 온몸이 주름인, 세로로 받아 쓰인, 미륵이다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몸으로 런던올림픽 육상 5개 부문에서 우승을 하여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 여성'이라 불린 육상선수이다.

 

 

 

 

 

 

광릉, 우드스탁 / 김산


치키치키, 빗방울이 16비트 리듬으로
살아나는 광릉수목원에 가본 적 있나요
수십 만의 히피나무들이 부동자세로
입석 매진된 한밤의 우드스탁 말이예요
레게머리 촘촘한 수다쟁이 가문비나무와
짚내복을 사철 입고 사는 늙은 측백나무 사이
우르르쾅, 천둥 싸이키가 번쩍거리고
다국적 수목원 안에 쏟아지는 박수 소리
고막을 찢으며 축제는 시작되지요
굵어진 빗방울이 시름시름 앓고 있던
뽕나무 그루터기를 흠씬 두들기고 가는 밤
비자도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입국한
고무나무도 언제 새끼를 쳤는지 말랑말랑한
혀를 내밀고 빗방울을 받아먹고 있네요
때론 아무것도 흔들지 못한 빗방울들도 있어요
맨땅에 헤딩을 하고 어디에도 스미지 못하고
웅덩이에 모여 울고 있는 음악들을 나무들은
뿌리를 뻗어 싹싹 혀로 핥아주기도 해요
지상의 모든 음악들이 생생불식 꿈틀거리는
수십만의 히피나무들이 밤새 기립박수를 치는
광릉수목원 즐거운 우드스탁으로 놀러 오실래요
지난 가을부터 자작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아
나, 당신만을 기다리는 올 나간 테디베어예요

 

 

 

                      


  미용실 / 김산

 

엘프족을 닮은 여자가 있다
이름 모를 행성과 충돌하고
흩어진 가계를 수습하기 위해
가위 하나만 달랑 손에 쥐고
지구별로 야반도주한 여자
건조한 내 머리에 물을 뿌리며
숙련된 손길로 싹둑싹둑
한 달간의 근심을 가지 치는 여자
웃자란 생각들을 좌우로 보며
마침맞게 중심을 잡아주는 여자
이따금 새순으로 피어난 꽃말들이
그믐처럼 그윽하게 입가에 스미는 여자
언젠가 여자는 나를 쓸어담고
그녀가 왔던 행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레이스가 달린 은하수 돗자리를 깔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 모아
내가 지금 잠시 무릎에 손을 얹고
그녀의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머언 작은 별 이야길 해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내 머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서 우주의 먼지들을 
구석구석 헹구고 있다

 

 

 

 

 

 

쿡쿡 특강1 / 김산

 

-계란말이

 

사각 프라이팬 속에 식용유를 에두른다
팁 하나. 낙타, 고래, 거미 기름은
21세기 요리법이므로 주의를 요함
프라이팬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주어를 감싸고 있는 목적어와 서술어를
예각의 단단한 귀퉁이에 대고 맞부딪친다
덩어리진 관념을 적확한 그릇에 넣고
잘게 쪼개고 부수어 하나가 되게 한다
가끔, 두 개의 심볼이 퐁당 빠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부글부글 날것들이 거품을 물때까지
액자 식으로 끼워놓고 충분히 휘핑할 것
팁 둘. 한 스푼 소의 모유를 넣어주는 것도 무방함
포유류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은 조류들에겐
적당한 낯설음도 신선한 충격이니까
이제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언어들로
지글지글 프라이팬 위에서 묘사를 해보자
문득,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대
청량리産 김의 모포 한 장 따뜻하게 입혀주고 싶겠지만
아서라! 결국 이빨 새에 끼면 뱉어버릴 그대
주제가 찢어지지 않게 손목에 힘을 빼고
언어를 뒹굴리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숙련이 되면 스냅을 이용해 부하된 언어들을
공중부양 시킬 수도 있지만 너무 멀리 던져
돌아오지 못한 날개들도 있음을 명심할 것
넓은 사기그릇에 갈무리된 계란말이를 담고서
자, 시식! 삐약삐약 언어의 뼈가
잘근잘근 씹힐 것이다 오도독, 오도독,


 

 

 

 

 

 

김병득 氏의 양복점 이름은, 럭키 / 김산

 

일천구백오십팔 년 럭키양복점 김병득
아버지의 잿빛 양복 이름이다
오지랖 넓은 김병득 씨氏 덕에
김병득을 입고 등록금만 낸 대학을 자퇴하고
김병득을 입고 군산 색시집을 들락거리고
김병득과 함께 '선창' 불렀던 아버지
성性도 바뀌지 않는 병득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십 대를 안창 깊이 숨어 살며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십 년 연하의 대하리 촌년을 만날 때도
창경원까지 따라와 어깨에 힘을 실어준 김병득
김병득은 아버지 대신 주례사를 듣고
3등급 호텔 첫날밤까지 따라와 벽걸이 위에서
그 짓을 보며 킬킬, 거렸으리
그 덕에 내 형의 눈이 시침질처럼 찢어진 지도 모르는,
나와 내 누이의 출생을 김병득은 얼마나 궁금해 했을까

 

환갑이 지난 아버지는 다려도 잘 펴지지 않는
김병득의 칼라를 세우고 보푸라기를 털어주곤 했다
문상 갈 때도 김병득은 희끗해진 아버지보다
앞장서서 덜덜덜 재봉 걸음을 걷곤 했다
겨울 언덕을 오르며 뇌졸로 쓰러진 아버지보다
먼저 쓰러진 것은 김병득이었다
아버지가 입었던 것이 김병득이 아니라
김병득이 항상 아버지를 보듬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나이 서른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다섯 식구를 다 키운,
김병득 氏의 양복점 이름은, 럭키

 

 


<당선 소감>

 

멈추지 않는 폐활량으로 나아갈 것

 

 시인세계만 여섯 번째 도전이었다. 그리고 당선 소식을 들었다. 5전 6기로 시인세계, 라는 단단한 집을 얻어 감격스럽다. 어떤 이는 기대도 안 하고 처음 낸 것이 당선됐다, 는 복권 같은

 

이야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의 문재文才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낙심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다시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면서 한 해만, 한 해만, 하면서 연례행사처럼 응모 했던 것 같다. 갓 서른을 넘긴 애송이 문청으로서 감히 詩作은 지구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꾸준히 오래 쓸 수 있는 아둔함이야말로 새로운 자기만의 一家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라고 본다. 지금도 언어와 싸우느라 새벽을 비트는 세상의 모든 문청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폭주기관차처럼 멈추지 않는 폐활량으로 나만의 집을 완성해 갈 것이다.

 

 감사해야 할 분이 너무나 많다. 선選하면서 여러 번 망설이셨을 심사위원 선생님들! 시인세계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좋은 시로 오래도록 보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시詩가 뭔지 모르지만, 한 편의 완벽한 서정시처럼 살고 계신 부모님.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불효한 죄, 터럭 만큼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신 문정영, 이영식, 박남희, 서상권 시인님께 감사드리고 날카로운 혜안으로 나의 스타일리스트를 자청한 이동호, 임재정, 서안나 시인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그리고 동거동락하며 나를 이끌어 준 시산맥, 시월, 글밭 식구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낙방할 때마다 말없이 술친구가 되어준 바다사나이 경모야! 결혼 미리 축하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수녀님 친절한 은하 씨氏와 이 고통스런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겨우, 詩作이다. 오늘만큼은 이 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밤이다.


 
 
심사평
 

'남성적인 힘'과 '서정성'

 

김종해 시인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예비시인은 모두 열 사람이었다. 이분들은 '시인'의 이름을 얻기 위해 모두 열 편이 넘는 힘들인 옹모작을 각기 투고했다. 나름대로 평이함을 뛰어넘는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작품 한 편 한 편의 미세한 언어 쓰임새와, 감성과 함량의 눈금을 꼼꼼히 따지는 선자의 눈에는 작은 허점마저도 간과될 수 없었다.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서 선자의 주목을 받은 사람은 최란주의 땡볕법정 외 9편, 박승류의 햇살검객 외 9편, 이건의 씨앗론 외 11편,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햇살검객은 표현은 예리하나 생활 속에서 상처받을 수 있는 화자의 여러 검법 나열이 조어造語에 가까웠고, 씨앗론은 꽃사과에 대한 사색적 탐색은 신선하나 산문적인 어투가 응축력을 잃고 있어 탈락했다.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의 뇌쇄적인 와인잔의 표현, 땡볕법정의 '사랑'에 대한 시로서의 법률적 판례, 네모난 거울의 고소인과 피고인의 양면을 보는 화자의 시각은 독특했다. 그러나 함께 투고한 10편 모두 이 같은 시적인 응축과 긴장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경합한 작품은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외 11편과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 외 9편이었다. 두 사람이 내보인 시풍詩風은 판이했다. 이애경의 시풍은 따뜻하고 섬세한 서정시의 아름다움이 각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행간마다 감성이 살아 있고, 삶과 존재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피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수혈과 같은 작품은 생명의 절실성과 내통하는 '마음속의 수혈'을 볼 수 있다.

 김산의 시풍은 활달한 남성적인 힘과 우주적인 상상력을 깨닫게 한다. 가공의 시의 공간을 화자의 현실로 연결시켜 가는 능력도 만만치 않다. 광릉, 우드스탁 같은 시는, 축제의 가상공간 속에 실제로 초대받은 젊은이처럼 열광하는 울림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시를 놓고 선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며 숙고했다. 그런 연후 이애경, 김산 두 사람의 당선을 결정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기대한다.

 

서로 다른 시세계의 균형과 조화

 

 신달자 시인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심사는 늦어지고 있었다. 심사 마무리에 가서 본심에 든 원고 모두를 다시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심사는 난항에 들고 있었다. 당선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도 감돌았다.

 우선 다섯 편의 작품을 거론하기로 했다. 이건의 씨앗론, 최란주의 카페 라캄파넬라, 박승류의 햇살검객, 김산의 날아라 손오공, 이애경의 그녀의 재봉틀이었다. 다시 혼돈에 들었다. 이건과 최란주의 작품도 시적 자질이 눈길을 끌었지만 오랜 설왕설래 끝에 박승류, 김산, 이애경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세 작품은 다시 심사위원들의 공론에서 갈등의 파도를 탔다. 박승류는 구두, 햇살검객 같은 작품으로 나이만한 삶의 경험을 통해 잘 가라앉은 사유를 독특한 터치로 생동감있게 그려놓았으나 왠지 공허하고 잡히는 것이 없다는 평이었다.

 김산은 모든 작품이 펄펄 나는 듯한 상상력 솟구치는 젊은 근육질의 언어들이 알싸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는 해도 왠지 이거다 싶은 뭉쳐진 사유의 전달의지가 허약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애경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의 재봉틀, 수혈, 양파 정도의 작품은 냉철하면서 진지하고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작의 묘미와 섬세한 서정의 절박성이 보였지만 다른 작품들이 가벼운 소품이었으며 신인으로서 우려되는 저장된 사유자산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심사는 김산, 이애경 두 사람을 뽑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시인세계>의 상금문제를 극복하면서까지 두 사람을 주기로 결심한 것은 두 사람의 시세계가 사뭇 다르면서 두 사람의 시가 보완상응하는 균형을 갖는 것으로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어보자는 합의 때문이다. 그 균형은 이 시대의 시단에 지극히 필요한 양극의 조화라는 중요한 영양제를 각기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음을 알린다.

 어렵게 등단한 두 신인의 시가 기대를 넘어서서 문명의 횡포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의지가 되는 시의 깃발 역할을 성실히 해 주기를 빈다.

 

도전적이고 젊은, 시적 가능성

 

 정효구 (평론가)


오늘날, 우리 시단의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의 비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크다. 너무 많은 것은 전혀 없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다多' 가 '강强'은 아니다. 다변이 달변일 수도 없으며, 달변이 가슴을 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진화를 믿고 싶은 마음은 신인의 등장을 기다릴 때마다 설렌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10명의 응모작은 높은 기대 탓인지 그렇게 흡족하지만은 않았다. 시란 곰삭은 '진언眞言' 이어야 한다는 자각, 언어는 침묵에 가까울수록 힘이 있다는 인식, 유사한 상상력과 이미지는 타인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등이 더욱 깊숙이 응모자들에게 각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 있었다. 극기와 자기다움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더 오랫동안 생각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산, 이애경, 박승류의 시는 관심을 끌며 몇 차례 논의를 계속하게 하였다. 김산의 시가 보여주는 거침없는 활달함과 왕성한 생명력, 이애경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섬세한 서정적 관찰력과 화법의 독특함, 박승류의 시가 지니고 있는 고단한 생체험과 그것의 애틋한 승화과정이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김산의 시는 좀더 강력하게 수렴하는 응집력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 이애경의 시는 시창작의 수원水源이 보다 충일해야 하겠다는 마음, 박승류의 시는 그 전개과정이 좀 더 유연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전해지는 강한 시적 가능성은 그들 가운데 한두 사람을 당선자로 선정하자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하였다. 세 사람을 놓고 고민하다가 시 속의 도전적이고 젊은 기운이 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두 사람, 김산과 이애경을 최종적인 당선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번에 아쉽게 제외된 박승류의 시는 물론, 경쾌한 언어구사력을 지닌 최란주의 시, 주변을 보듬어 안는 성실성이 뛰어난 이건의 시도 앞날을 기대할 만하다. 당선자 두 사람은 물론 이들 모두가 정진하여 '참시인'의 길을 가기 바란다.

 

 

 

728x90

 

 

어린 송아지가 온다 외 4편


                               서 효 인

   
    1. 약간 장애인 괜찮음 어리고
       순종적인 여자 있음
 
     2. 880만원 현지에 회사가 있어
        믿을 수 있고 저렴함

 

바다를 건너 어린 송아지가 왔다
메콩 강의 짙은 흐름을 기억하는 눈이
고향색 하늘을 보고 구름처럼 흔들렸다
강물에 흔들리는 수상가옥의 낮잠을 밀어내는
고속도로의 좁은 평야가 계속되고 있었다
송아지의 부드러운 육질을 바라보는 남자의
농협 하나로 마트산 치열이 바스락거렸다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다
맹획을 잡고 놓아주던 누구처럼
불을 지르고 처녀를 낚던 우리처럼
점잖게 사진을 찍고 절을 올리고서
어린 암소 한 마리 잡아
워이야 이년아 우리말을 가르치는데
문득 엉덩이가 뜨겁다  

 


광기의 재개발

백 원만 하던 너, 아직도 여기 있구나
모교 앞, 문방구는 이름이 바뀌고
주인 여자도 졸업식마냥 늙었는데
오래된 오락기의 먼지 되어 앉아 있구나
백 원만 하던 너, 아직도 웃는구나
장마처럼 침을 흘리며 사뿐히 웃는데
모교 앞, 재개발된 젊은이가 너를 본다

백 원만 하는 너
몰라보는구나 나를
국민체조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콧물로 흘리던 교문에서
미친년이라고 아무리 놀려도 백 원만 백 원만 했다 넌
기억나니 넌, 고등학교 오빠들이 아랫도리에 손을 찌르며
오락하듯 백 원을 넣고 흔들 때도 장마처럼 침을 흘렸다 넌

백 원만 하던 너, 아직도 여기에
몇 떼의 구름이 지나가도록 섰구나
촌지처럼 교실은 시끄러운데
아직도 웃는구나 동전은 소리 내며 웃는데
너는 소리도 없이 진짜로 누가 미쳤냐고
백 원만 백 원만 하며 묻고 있구나

 

피자가게 아가씨는 누구를 닮았는가



우리는 사실
몇 개의 자본이 쫀득쫀득 엉킨
피자를 먹으려 했을 뿐이다
저기 유리가면을 쓴 여자 온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춰 삐걱삐걱
유리 가면은 웃고 있다
일단 우리는
여자의 옆통수를 떼어 먹는다
어두육미의 전통적 지혜를 발휘하야,
쪽진 앞 머리칼 몇 가닥 아닥아닥
그리고 우리는
여자의 눈을 빨아 먹는다
지배인과 샐러드 바의 눈치를 보던 눈은
심한 운동과 경련으로 부어 보들보들
이윽고 우리는
여자의 코를 집어 먹는다
하루 종일 지긋지긋 쫓아오는
생리통 같은 치즈냄새로 무장된 코
노란 소스의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
이어서 우리는
여자의 가슴을 핥아먹는다.
환희의 순간은 마지막 조각에 있다
단정한 유니폼을 확 잡는다 단추가 투두두둑
상큼한 연어 속살에 생과일 소스가 유두에서 탱글탱글
이제 여자는 발가락만 남아 꼼샥꼼샥
비참하게 남겨진 피자의 빵 쪼가리처럼
쭈그려 앉아 가면을 벗는다
거기에 토핑되는 얼굴
낯이 익다


형을 자르는 가위의 소리 들었네

형이 죽는 건 다행이야
형이 죽는 건 당연하지
형이 죽는 건 말씀이지
두 개의 영혼을 가진 내가
형을 빨아먹으며 자란 내가
더럽고 누추하고 섹시하게
형 몫으로 살아가고 있어
형의 심장은 잘게 썰려
물수제비 타고 날아가
달의 뒷면에 박히는데
대못처럼 박힌 내 영혼
언제나 데려가시려는지
두 개의 영혼을 가진 내가
형을 씹어 먹으며 자란 내가
무로 존재하던 그 시간에
죽어버린 형의 병원 시트에
마취액처럼 흐르던 자궁들
나는 보았네 가위의 소리
형이 죽고야 나는 안심
형이 죽고야 나는 히죽
형이 죽고야 나는 나는
나는 갈테야 못처럼 박히러
보름하고 열흘 세를 놓은
내 자리 내놓으시고
어서 꺼져주시길
나는 나는 바랐네


다카포, 고독한 여행을 떠나다



다카포(da capo)
그를 찾지 말 것
영원한 장마비 속에서 그는
마꼰도*로 여행을 떠났다

 성경처럼 비가 오더니 황소머리와 돼지꼬리가 흙탕물 속에서 뒹굴고
차라리 방주를 타고 도망가는 노아처럼 간택받고 싶어라 별똥별처럼 거
대한 폭포를 떨어지는 방주를 타고 인류의 마지막 사망자가 되고 싶어
라 그러나 마지막은 다 카포,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연주하라는 뜻으
로 다 갚고, 포커 하우스에서 마지막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의 앞니라는
뜻으로 다 울고, 식인개미에게 끌려 나가는 신생아의 몽고반점처럼 시
작과 끝은 근친상간 장마에는 소고기맛 비가 와서 장조림처럼 묻히는
사람과 살림과 삶들이 뒤엉켜 슬픈 덮밥이 되고 덮밥을 먹는 700 상자들
이 수많은 방주를 타고 일광욕을 즐기는 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연주
를 하려는 빗줄기들이 하수구에 모여 종량제 봉투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갔다. 황소머리와 돼지꼬리가 영원한 빗속
에서 한 몸이 되어 실룩실룩, 흙탕물 장조림들을 치고 지나가더라는 것
을.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의 고독』에서 배경이 되는 공간.

 

□ 당선소감

사람의 시를 쓰겠다


 우습게도 전화를 받기 전날 밤, 나는 뱀 꿈을 꾸었다. 사악한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한 손에 쥐고서 그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취하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나의 꿈은 항상 짧은 기억의 편린이라서 그 장면 하나밖에 기억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이라도 사야 하는 건가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나에게로 왔다. 그 뱀은 언어라는 독을 가지고 나를 쏘아보고 있다. ‘시’라는 백사白蛇를 찾아 문학의 산을 헤매던 허섭한 땅꾼이었던 나에게 길조처럼 찾아든 한 마리 독사. 나는 녀석을 쥐고 있다. 뱀을 쥐었다는 승리감도 잠시 이제 다시 내 손을 빠져나가려는 냉온동물의 차가운 체온에서, 나는 오히려 나의 피가 뜨거워짐을 느낀다.
너는 준비되어 있는가. 뱀이 나에게 물어온다.
젊음에 그을린 얼굴로 알 수 없는 길을 떠돌아다녔다. 시를 찾아가는 여로에서 아직 나는 넘어지기 바쁘다. 그 길에서 언어라는 친구를 만나 함께 놀기도 하고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나에게 언어는 세상의 언어이고 사람의 언어이다. 사람의 시를 쓰겠다는 작고도 큰 다짐을 하면서 언어를 대한다. 언어의 손을 잡고 교만하지 않게 그러나 과감하게 시를 향해 나를 던지려고 한다. 내 몸이 던져지는 그곳에서 시여, 나를 반갑게 받잡아주기를.

어딘지 모르고 더듬거리던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인세계》에 감사드린다.
내 시의 원천이신 할머니와 아직 보여드릴 것이 많은 부모님도 촌스럽게나마 언급하고 싶다. 적잖은 시들을 술잔 대신 마주치던 시창작연구회 비나리 식구들, 김동근 선생님, 못나고 잘난 친구들, 가짜로 가득했던 나를 진짜 나로 바꾸어 준 나의 라임 난초蘭草에게 마음을 전한다. 나와 눈 마주쳤던 모든 사람과 사물을 담아 이제 다시 ‘시작’하겠다.  

 



□ 심사평

주제 의식이 살아 있다

                                김 종 해 | 시인

  제8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응모작은 우편, 이메일 응모가 107명, 온라인 응모가 102명 합해서 모두 209명― 지난번보다 응모 숫자가 늘었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넘어온 숫자는 14명이며, 이 가운데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우편 응모작 송상의 「성금요일 13번 국도」(외 9편)와 온라인 응모작 김산의 「광 마우스」(외 10편), 이현의 「국제여관」(외 9편), 서효인의 「어린 송아지가 온다」(외 10편) 이상 네 사람이었다.
이 네 사람 가운데 우편 응모작으로는 송상 한 사람만 남았고 나머지 김산, 이현, 서효인 세 사람은 온라인 응모작으로 투고해서 온라인 투고의 강세를 보여준 것도 신세대 투고 방법의 특이한 점으로 지적되었다.
신인작품을 읽을 때마다 심사위원이 찾는 것은 매끄럽게 잘 짜여진 모범 답안지가 아니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제 목소리가 담긴 화법이 있는지,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는 개성과 컬러가 언어와 행간 속에 담겨 있는지를 본다.

송상의 「성금요일 13번 국도」는 잘 짜여진,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자기 삶이 담긴 목소리와 화법을 담아내는 것이 부족해 보였다.
김산의 「광마우스」와 「더듬거리는 교회」는 가능성이 엿보이는 작품. 그러나 투고된 타 작품들이 이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현의 「국제여관」(외 9편)과 서효인의 「어린 송아지가 온다」(외 10편)를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놓고 뜸을 들였다. 심사장소를 바꿔가며 논의를 거듭했다. 당선작이 될 수 있는 5편을 각각 가려놓고, 이들 작품에 대한 성취도와 결점을 낱낱이 짚어 갔다.

이현의 경우, 언어 표현의 밀도와 적확성이 떨어지는 흠을 보였고, 서효인의 경우도 대동소이. 그러나 주제의식이 살아 있고, 제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 서효인의 「어린 송아지가 온다」는 우리 농촌 사회가 맞닥뜨린 현실, 약소 민족과의 결혼의 연민과 갈등을 시로 그려내고 있다.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송아지. 그러나 그녀는 동남아에서 온 어린 신부이다.
시인의 연민과 우수가 시로서 사회성을 담아내고 있다. 「광기의 재개발」과 같은 작품에서도 막힘이 없는 역발상逆發想의 페이소스를 보여준다.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서효인을 당선시인으로 뽑았다.

 

독창적인 발성법을 갖고 있는가

                            김 혜 순 | 시인

 예심에서 선택된 14명의 시를 읽었다. 그 중에서 4명의 시를 골라 토론했다. 언젠가는 새로웠겠지만 지금은 너무도 우리 눈에 익숙한 표현들이 되어버린 구절들과 발상들이 들어찬 시들, 욕망의 분출이 배설에 그치고 만 시들, 산문시라기보다는 산문 그 자체인 문장들, 응모된 모든 작품이 마치 자기복제된 것처럼 똑같은 언술 방법을 반복하는 시들을 먼저 제외했다.

송상의 시들은 문장이 매끄럽고, 시에 그려진 세계는 선명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감상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들이 눈에 띄었고, 피상적인 진술들도 가끔 보였다.

김산의 시들은 리듬이 살아 있고, 시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이 있었다. 시에 씌어진 현란한 형용사들, 명사들, 대화들, 혹은 비유의 문장들이 작은 유머와 함께 달려갔지만, 그러나 시 한 편을 다 읽고 나면 그려진 시 세계가 그리 새롭게 구축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현이 응모한 시들의 화자는 자신의 치열한 내면의 소용돌이를 목격하고 있는 시선, 심상의 세계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시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울러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생성해낸 자신만의 언어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숨가쁘게 쏟아져 나온 이미지들이 엉켜버려서 그것들이 밖으로 분출되는 대신에 다시 시적 자아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생경하거나 소통 불가능한 장면들이 자꾸만 시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서효인이 응모한 시들 중에서는 시적 화자의 시선이 타자들 혹은 외부세계를 향한 시들이 좋았다.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풍속적인 흥취와 함께 유머를 이끌어내는 시들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서효인의 시들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의 경험을 시적으로 진술하는 좋은 덕목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현과 서효인의 시들을 놓고 토론한 후 서효인의 시적인 언어 절약, 자신을 벗어나 타자로 열리는 시선들, 자신의 경험을 자신만의 시적인 공간으로 형상화하는 상상력의 구축이 있는 시들, 자신만의 비유적 언술 등이 갖춰진 시들을 높이 사 당선작으로 선했다.  

 

사물과 언어와 자신에 대한 성실성

                   
         이 남 호 | 문학평론가

 

 세계와 언어 사이의 틈새가 최소화된 시, 아니면 언어 자체가 사물이 된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는 세계를 명징하게 간접 체험시켜주고, 후자는 감각적 세계의 지평을 넓혀준다. 어느 쪽이건 상투성으로서는 획득하기 어렵다. 의식과 언어의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각고의 노력이 시인들에게 요구된다.

최종적으로 네 분의 응모작들을 두고 진지한 논의와 검토가 있었다. 송상, 김산, 이현, 서효인의 작품들은 상당한 습작과 열정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상 씨의 작품들은 멋진 제목들이 많았고, 그것만으로도 언어감각을 신뢰할 수 있었지만, 그 의식과 언어에서 새로움과 에너지가 부족한 듯했다. 김산 씨의 작품들도 흥미로운 구절들을 꽤 많이 보여주었고 감각적인 언어들도 있었지만, 역시 개성적인 의식과 언어를 보여준다고 보기 어렵다.

이현 씨의 언어는 컬러플하고 감각적이어서 첫눈에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뭔가 있어 보인다. 실력과 개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읽노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구절이나 비문들이 자주 발견된다. 엄격성과 정확성이 바탕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장점을 살려내기 쉽지 않다. 이현 씨를 두고 오래 망설였지만, 이 점 때문에 수상은 서효인 씨에게로 돌아갔다.

서효인 씨는 아직 자기 세계나 언어가 분명히 확립되지 못하고 서툰 느낌이 있는 대로 사물과 언어와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보여준다. 자기가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욕심보다는 자기가 아는 세계를 잘 드러내려는 태도가 좋다. 이런 성실성으로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의식과 언어의 세계를 펼쳐주길 기대한다.

* 온라인, 오프라인 본심에 오른 1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혜원, 강아테, 김일하, 이현승, 이은숙, 조현숙, 정준영, 이영숙,

  김덕만, 권동지, 서효인, 이현, 송상, 김산.

//

 

728x90

2006년 봄호 제7회 시인세계 신인상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


                               이 갑 노


 

찻잔을 앞에 두고 녹차를 우려내듯 앉아있다
오래된 기와집엔 글씨가 살고 있지
물거울에 잠긴 소나무 물구나무선 그림자
지상의 높은 우듬지가 밑바닥에서 새를 키우고 있어
시원한 물소리는 맨살을 뚫고 흐르는데
연못에 고인 물은 목이 말라 낙수에 입을 여네
담장 안 늙은 배롱나무 줄기로 쓴 저 글씨가 우암체?
기가 돌아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격자문 열어두고 산빛마저 속속들이 우려내면
심연 속 푸른 숲이 푸시시 깨어난다
우암이 옛날 조선 적 사람인 줄 알았더니
퇴색한 정원에서 이웃들과 살고 있다
다음에 고택을 방문할 때는 빈집이라도 반드시
헛기침이라도 해야 한다
물 위에 지은 집은 길 위에 몸 같은 거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뼛속까지 열어 보이던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
만약에 불이라도 난다면 사리 몇 개쯤 남고
맺은 인연 탁해진 심정에 흰 수련꽃으로 피겠다
멀리 배웅하는 인기척…

귀가길, 걸립乞粒한 차 한 잔이 온몸을 데운다.






떨 켜


 

은행나무 물고기 산란하듯 잎 털어낸다
떨어지는 잎들 울고불고하지만
나무 몸 부르르 떨어 노란 잎들 뭉텅 털어낸다
집 알아보러 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무와 함께 서 있다
겨울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
나무는 아직 닫지 않은 문틈을 통해 나를 불러들인다
몸속은 등화 관제하는 집처럼 캄캄하다
완벽한 성이며 요새다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구멍 막는 일
곰처럼 겨울잠 채비를 한다
방금 전 추워서 샤크존에 들렀다
그곳은 아직 가을이 살고 있다
나무들도 몹시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초대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심장이 있어 좋다고
따뜻한 난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겨울은 나무에게도 추운 계절이다
산골에서 문풍지 하나로 겨울 나던 우리 식구들
생나무가 우리를 지켜준 은인
아궁이에서 타닥 소리 내거나 입에 거품 물기도 했다
아내가 밝은 얼굴로 어둠을 건너온다.

내 가지마다 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
이제 힘겨워 털어낼 때가 된 것 같다
겨울이 다가왔다
나도 나무처럼 몸 부르르 떨어본다
아내와 나 나무의 도움 받아 밤새 구멍 막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지 못해
각별히 신경 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라고
은행나무 내 어깨 감싼다.

 

 

눈길, 늪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고
처마 밑 풍경은 속삭여 주었지
밤새 입에서 시작된 강은 꾸룩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새벽에 일어나 보니 첫눈이 내렸어
나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네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 희미하게 찍혀 있네
야구르트 리어커처럼 작은 수레를 끌고 간 발자국
일렬로 길게 난 자전거와 사람의 발자국
나는 새 길을 가다가도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
눈이 녹고
길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얼음조각으로 박혀 있어
나는 신발 무늬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네
밤사이 하늘이 내게 내려와서 늪으로 변한 길을 덮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갈켜 주었어
새들이 날아가며 한번 입력된 길은
유전자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아
늪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여행길이 죄다 입력되어 나중에 갈 수 있게
바람의 발자국은 눈 위에 무늬처럼 남아
눈길을 지워버렸어
눈길은 밖으로 이어졌어, 늪으로

 


 

골다공증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너무 뚱뚱해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들은 뼛속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거나 척박한
공기 중에서는 공기주머니에 있는 공기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중풍에다 골다공증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새가 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새가 되려는지 등은 활처럼 굽어지고
다리는 북어처럼 마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새처럼 뼛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공기 주머니가 이제 생기려는지
뼛속에서 바람이 일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도 합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백로들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나 봅니다.
몸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팔월 한낮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아, 하늘에 있는 새들은 지상에서 숨겨온 동전 한 닢도 너무
무거울 거야.

 

이사移徙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늘정원 대문에
풍경을 거는 일이다
이사할 새 집에는 먼저 이사 온 자작나무들이
마루를 깔고 있다
방문은 조막손을 내밀어 잘 지내보자며
악수를 청해온다
시베리아 추위를 녹이며 모여 있던 벌목꾼들이 보드카 냄새에 취한다
의사들은 말한다
암도 애인이나 부인처럼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
토굴 같은 수납장과 붙박이장을 열어 본다
집은 부엌 안방 건넌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아내는 구석구석 앉은 먼지의 궁뎅이를 떠민다
여럿의 영혼이 드나들 것이다
주인 영혼은 안방에 못을 박고
세든 영혼은 건넌방에 액자를 건다
청파동 적산가옥부터 몇 번째인가 벗어놓은 집들이
아내는 솥단지 속에 요강을 넣어 안방에 들여놓고
오늘부터 이사를 왔노라고
성주신과 조왕신, 측신에게 고한다.
밖으로 나오자 딸랑거리며 닫히는 문
꺼내 놓았던 가구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들어가
나의 내장이 된다.


 

 

□ 당선소감

바람의 길을 따라 달려보고 싶다

 

이 갑 노

 

195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2002년 스포츠 서울, 월간 현대시 제정 제2회 한국인터넷문학상 시 부문 선정.
빈터 현대시문학 월간문학저널 회원.
현재 화승물산 대표


 마라톤을 하면서 안 가본 길이 없을 정도다. 동네는 물론 달릴만한 곳이면 차를 세우고 무조건 달린다. 그러면서 시가 늘었다. 내가 쓰는 시는 단지 받아쓰기였다. 강을 따라 달리고 산길을 따라 달렸다. 비가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오직 시를 완주해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며칠 전 갑하산 산자락을 오르다가 춘란을 만났다. 어머니 기일을 앞두고 있어 나는 몇 시간 동안 난을 업고 산행을 계속했다. 튼튼한 다리와 믿음직한 어깨로 생전에 마음껏 업어주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나는 난을 화분이 아닌 심장에 옮겨 심었다.
 난은 꽃은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한을 견디고 피우는 향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하에서 건너오는 메시지일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이제까지는 스토리와 이미지의 압축으로만 믿고 달려왔다. 지금까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랐다면 지금부터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볼 것이다. 길이나 언덕을 달렸다면 앞으로는 산에 올라 바람의 길을 달려볼 것이다. 실체는 없지만 소리를 내고 등도 떠밀어 줄지 아는 바람, 나무뿌리나 벼랑에 집을 짓고 사는 바람, 시작도 하기 전에 흥분된다. 바람을 잡으러 간다.
 어두운 밤길이나 새벽길을 달린다. 추운 날씨에도 몸은 땀으로 젖는다. 축축하다는 느낌보다는 상쾌함으로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 처음 벼랑에 선 매처럼 힘차게 날갯짓을 해본다. 하늘에 길을 낸 자유라는 것은 우주를 꿰뚫었을 때 가능할 것이야…….
 부끄러운 글에 용기를 주신 김종해 오탁번 정호승 김상미 시인님 그리고 《시인세계》에 감사합니다. 현대시문학 대전지회 이원우 부지회장 고행숙 배용주 외 회원님들 지회장으로 먼저 영광을 얻어 죄송하구요. 그리고 빈터 회원과 동인들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지만 윤성택 시인님의 수고에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곁에 있는 아내 박효순, 유럽을 배낭여행 중인 나의 분신 휘세, 분당에서 새내기 사원으로 근무하는 현정이 모두 감사합니다. 큰형 이찬노 시인님 김종학 시조시인님 감사합니다.
 군자우아지약 이불우적지강, 좋은 시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 파이팅…….



□ 심사평

시의 화법이 매끄러웠다

                                김 종 해 | 시인

  예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넘어온 응모작은 모두 11명이며, 이 가운데 끝까지 거론된 작품은 현호의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외 9편), 배두순의 「황태」(외 9편), 김수정의 「수제비와 친구」(외 9편), 이갑노의 「물 위에 지은 집」(외 9편)이다. 이들 가운데 단일작품 1편만을 당선작으로 뽑을 때는 배두순의 「황태」가 가장 유력했지만, 함께 응모한 나머지 9편의 작품들 수준이 들쭉날쭉으로 일정치 않았고, 언어의 긴장감이 풀어져 있어 아깝게 탈락했다. 김수정의 「수제비와 친구」도 심사위원의 눈을 붙들어맸지만, 나머지 응모작의 수준이 느슨했다. 현호의 「거꾸로 선 쉼표…」는 언어에 대한 실험성과 전위의식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아직 설익은 것이 흠이 되었다.
 배두순의 「황태」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이갑노의 「물 위에 지은 집」(외 9편)은 신인으로서 요구되는 내것, 독특한 개성과 자기 목소리는 담아내지 못했지만,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안정되어 있고, 시를 풀어가는 언어 운용과 화법이 매끄러웠다. 「물 위에 지은 집」에서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와 같은 예리한 청각적 표현은 이 새로운 시인의 특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함께 응모한 「골다공증」 같은 작품은 화자가 엮어가는 시적 우화가 재미있다. 뚱뚱한 ‘우리 어머니’와 하늘을 가볍게 나는 ‘새’의 이야기, 그 속에 이 시인이 간직하고 있는 슬픈 사모곡과 사랑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시에서 산문과 시의 경계를 주의해야 할 필요를 지적하고 싶다.
 ‘새로운 시인’으로 탄생하는 이갑노 시인의 전도를 축원한다.

 

천성에서 나오는 시의 묘미

                            오 탁 번 | 시인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으로 당선된 이갑노 씨의 작품은 사람의 가슴을 따듯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다. 알맞게 다스려진 비유의 끈도 살갑지만 그 구조를 풀어내는 어조의 낙낙함이 좀 서러운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망각의 갈피 속에 숨어 있던 추억을 나직나직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인상적이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이러한 기묘한 낌새를 이를테면 시적 천분이라고 하는 것일까. 손끝으로 조작해낸 단순한 기교는 빛 바랠 수도 있지만 이처럼 천성에서 나오는 시의 묘미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언제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법이지만 이 눈물이 바로 시의 금강석이라는 점을 아직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세파에 좌지우지 좌고우면하지 말기 바란다. ‘먼지의 궁뎅이’를 눈여겨보고 ‘배롱나무 줄기’에서 ‘우암체’를 훔치는 밝은 눈이야말로 시인이 꼭 지녀야 할 덕목이다.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작품 가운데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현호)과 「황태」(배두순), 「수제비와 친구」(김수정)는 다 나름대로의 특장을 지니고 있지만 신기한 상상력에 지나치게 기울어졌거나 반대로 단순하고 낯익은 비유에 머물고 있는 징후가 쉽게 드러났다. 참신하되 시의 위의威儀를 파괴하지 않는 진정한 시의 방법이 무엇인지 확연히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사람이 아니고 시의 귀신쯤 될까나. 법고창신 온고지신의 낡은 옛말이 새삼 새삼스러워지는 까닭을 잘 헤아리기 바란다.
 입춘 추위에 제법 귀가 시린 날, 새롭게 태어나는 시인을 위하여 몇 자 글로 축복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늙은 시인 오 아무개의 감계로도 삼는다.

밝고 따뜻한 눈빛

                   
         정 호 승 | 시인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거꾸로 선 쉼표가 가리키는 것은」 외 9편 (현호), 「황태」 외 9편(배두순), 「수제비와 친구」 외 9편(김수정), 「물 위에 지은 집」 외 9편(이갑노) 등 4명의 작품이었다. 이들 중 이갑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갑노 씨의 작품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의 결점이 더 두드러진 탓도 없지 않았다.
 현호 씨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모험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는지 모호하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 의미가 연결된다기보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절된다.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 탓이다. 다시 한번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배두순 씨는 끝까지 당선자와 겨루었으나 투고작 전체의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 「황태」도 육화된 깊이를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습작한 노력이 돋보인다고 해서 선뜻 당선작으로 내세우기에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김수정 씨의 시에는 아픔이 있었다. 삶의 비의를 엿보는 눈길도 있었다. 그러나 김수정 씨 또한 그러한 면이 한두 작품에 그친다는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당선자 이갑노 씨는 전체적으로 고른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적 완성도도 높다. 삶을 통찰하는 눈이 예리했으며, 그 통찰의 꽃으로서 시를 꽃피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허황된 상상력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미더웠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그 현실 속에 사는 인간의 고통에서 시를 발견하는 눈빛이 참 밝고 따뜻했다. 그는 “나무들도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의 앞날을 기대하는 마음만 클 뿐이다.
출처 : 유목민들
글쓴이 : 마쯔 원글보기
메모 :
728x90

 

눈 위에 쓴 가족

                               한 우 진 /제 5회 신인상당선작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겨울 유서遺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
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
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
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
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
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
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
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
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 《부록》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가구를 바꾸며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가구에 들러붙어 있는 기름때를 닦는다.
가구하고 내통해 본 지도 오래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욕망은 트고 꿈은 자주 삐걱거린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아내의 문 열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갈망은 굽은 빨래판처럼 뒤뚱거린다
일요일마다 나는 빨래판 위에 빨래처럼 누워도 보는 것인데
아내는 오자誤字투성이 내 몸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인데,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냄새와 시너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네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

 

 

 

 

출처 : 정원 산방
글쓴이 : 정원 원글보기
메모 :
728x90


오쇠리 나팔꽃


추운 밤 달빛이 서둘러 스위칠 넣는다
길 넘어 중앙다방에서 오는 인기척인가
하얗게 기억을 놓아버린 연탄재를 밟고
웅얼웅얼 카네기나이트 전단지가 지나간다
황마담은 담장마다 피는 나팔꽃이었다
이 남자 저 사내 늙수그레한 등덜미마다
넝쿨어깨를 걸어 골목을 꽃피우던 여자
막다른 집을 끝으로
아이들 울음소리 끊어질 무렵
그녀의 넝쿨도 걷히고 말았다
포크레인 지게차가 잡풀 무성한 오쇠리 집들
은밀한 부분을 더듬을 때면
심심한 사내 몇 쯤을 끄떡없다고
붉은 얼굴에 분칠하던 그녀
마른 풀씨 같은 내 여자도 봄이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자궁을 들어낸
늙은 동네의 뱃속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

고강동의 태양


푸르고 붉은 지붕들 태양연립 은하슈퍼
바람 돌아가는 모퉁이 금성여관 턱밑에는
노인이 꽝꽝 못 박아 걸어둔 전구가 있다
560번지 사람들은 그 아래서
부고장이나 밀린 고지서 등을 읽는다
바람 속에 한숨 넣어주며
비행기들이 낮게 나는 하늘 한 쪽
새들과 같은 방을 쓰는 노인을 보고 개가 짖는다
저 울음을 따라 흘러가고 오던 빛들
그을린 얼굴의 해가 천정으로 숨어들면
잠시 벗어놓은 어깨의 푸른 멍울이
별 대신 뜨는 이 곳, 02호
지하방에 서식하는 내가 어둠을 퍼올릴 때도
전구는 얼어붙은 길을 풀어내고 있었다
떠나 있던 새들이 빈 방으로 모여든다
일성전기 전깃줄에 감긴 사십 년 시간을 지나
복지회관 쪽방에 남은 박노인 눈 속의
일렁거리는 불빛, 그 등 앞세우고 노인은
70년 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뒤를 따랐다
손에 든 부고장에는 지상에 없는 주소가 적혀 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사람들은 달은 두고, 금성여관
턱 밑에 달랑거리는 전구를 바라본다

------------------------------------------------

가방


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 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낡은 여행가방, 서른과 스물
끝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마흔에도
옆구리에 단정히 붙어 있었다
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저녁
정거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추억들이
어둠과 부딪히며 소스라치곤 했다 가방 속
손거울로 과거를 비추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방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린 날 거리에는 입 벌린
눈 번뜩이는 무수한 가방들이 보인다
그럴 때면, 늑골 속
단단하게 굳어진 길 하나가 만져진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시 가방으로 들어간다
곧 문이 닫히고
그를 둘러싼 촘촘한 길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머리맡에 잠든 수없이
눈물로 채우고 엎지른 적이 있는 가방
어안이 벙벙해진, 말 잃은 가방이 늘어간다

----------------------------------------------

월곶에서


유선을 타고 바닷물이 흐를 때가 있다
끊어진 물길 가득 돌아오는 배들
간혹 월곶 소금창고에 수배전단지가 붙는다
추억의 세간을 달그락거리는 수상한 바람은
소금포대를 이고 집으로 가는 처녀의
배를 부풀렸다 벽보의 주문대로 애인을 갈아치운
창고지기 사내는 제 욕정의 크기만큼
바다의 허벅지를 떼어내 피를 말렸다
짓눌린 벽보의 얼굴이 창고로 숨어들자
홍안의 파도가, 둥근 무덤으로 남은
방파제를 두드린다 문득
캄캄한 유두에 혀를 대면 쏴아
바다의 비린 육질이 길을 뚫고 월곶
붉은 땅을 한 바퀴 돌아간다
내 오랜 연인은 서해의 후손이다
폐경 이후에 다시 수문을 열고, 바다는
바람으로 쓰레질한 진액을 말린다
온몸 가득 흰 소금꽃이 필 때까지

----------------------------------------------

사다리


사다리를 타는 한 여자가
허공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간혹 마당으로 별이 떨어진다
세상의 의미는 늘 위에 있고
사다리가 아니면 여자는
아래쪽에 붙박여 있어야 했으므로
심한 절름발이였던 여자 아래선
용접공이 그녀의 추락한 언어에
불꽃을 주사하고 있다 한순간
빛이 꺼지고 어둠 속 사다리가 흔들린다
두어 칸 더 오르기 위해
한 쪽 발을 떼어내자 기우뚱
짧아진 마음 쪽으로 하루가 기운다
용접공이 다리를 땜질한다
다시 사다리에 오른 여자
눈을 감는다
용접공의 손을 빠져나온 별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
유미애 /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졸업. 1997년 광주여대 여성문학상 우수상. 2004년 제4회《시인세계》신인상 당선. '시산맥' 동인. 현재 계간 《시인시각》편집장.

출처 : 정석봉 시인의 블로그
글쓴이 : 꼬마 파랑새 원글보기
메모 :
728x90

 


심사결과 발표 - 당선작 없음


심사위원 유종호(문학평론가), 김종해(시인)

 

한국 현대시의 내일을 이끌어갈 신인을 뽑기 위한 신인작품 공모작에 대한 심사가 공모 마감일부터 예심을 거쳐, 2월 3일 《시인세계》 회의실에서 최종심을 가졌다.
이번으로 세번째가 되는 《시인세계》 신인 공모는 그간 우편과 E-메일로 접수받았지만 이번 심사에서부터는 인터넷 홈페이지(seein.co.kr)에 온라인 신인 공모 게시판을 개설하여 인터넷 글쓰기에 익숙한 온라인 세대의 응모작품도 함께 받았다. 이번 공모에 응모한 사람은 총 108명이며 전체 응모작품은 1,120편이었다.
온라인 응모 작품은 580편(57명)이었고, 우편과 E-메일로 접수한 작품은 540편(51명)이었다. 이중 예심을 통과한 16명(온라인 4명, 우편과 E-메일 12명)의 작품에 대해 1차 심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최종심에는 4명의 응모자가 남게 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인간 욕망에 대한 재미있는 관찰이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가려진 삶의 진실에 대한 기록, 관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 사물화한 시, 농촌 풍경을 관념이 아닌 일상생활을 통해 여유롭게 그려낸 시, 하나의 문화체험을 은유화하여 새로운 비전을 열어 보이는 시,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개인의 내면 풍경을 집요하게 포착해낸 시 등 다양한 창작 방법과 개성적인 시각들이 풍성하였다. 하지만 세계와 사회보다는 자아나 개인 쪽에 무게 중심이 놓여진 이번 응모작들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거대담론의 추상에서 벗어난 일상의 구체적인 감각들이 간혹 사변화되어 상상의 폭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예심을 통과한 16명의 명단(가나다순)은 아래와 같다.

김영수, 「재미없는 자미」 외 13편
문학주, 「수국」 외 20편

박시윤, 「은행나무 바람을 모아」 외 9편
배재형, 「매트릭스에서 배달된 편지」 외 17편
강욱, 「장미여관」 외 9편
서정, 「유리 닦는 사내」 외 9편
안승범, 「다시 나무에게」 외 13편
이근창, 「나비」 외 18편
이도희, 「썩는 것에 대하여」 외 9편
이만옥, 「꽃샘잎샘」 외 9편
정원숙, 「검은 방의 트라이앵글」 외 10편
지주현, 「동박사랑」 외 10편
최영철, 「토우」 외 9편
황명희, 「돌멩이」외 9편
황춘기, 「그날 밤」 외 15편
현택훈, 「집으로 가는 길」 외 9편

이 중 최종심까지 오른 응모자는 김영수, 서정, 이도희, 황춘기 등 4명이었다. 최종심은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와 《시인세계》 편집위원인 김종해 시인이 심사를 하였다.

 

심사평*아쉬운 점들

 

유 종 호 | 문학평론가

마지막까지 검토된 16명의 응모자들이 모두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많은 수련을 쌓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작품이 고르지 못하고 들쭉날쭉이 심한 데다가 억지스러운 작위성도 더러 보인다. 단단한 기량과 개성적인 언어구사에 근거한 참신하고 도전적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아 아쉬운 대로 당선작은 내지 않기로 하였다. 김영수의 작품 중에서 「재미없는 자미」 「배차계 정씨」 등은 그 나름의 실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삶의 이모저모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시적 긴장이 모자라고 방만하다는 것이 미흡한 점이라 생각한다.
이도희의 연작들은 많은 수련 과정을 거쳤음을 드러내준다. 언어의 절제도 있고 일상사의 관찰에서 나온 서사 충동도 보인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이 간혹 보여서 아쉽다. 옥에 티처럼 끼어 있는 판에 박힌 수사를 대담하게 버려야 할 것이다.
서정의 작품에선 풋풋한 감성이 엿보인다. 말의 절제도 터득하고 있다. 그럼에도 얼마쯤 맥빠지는 비유가 걸림돌이 되어 있다. 재치도 범박하면 취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황춘기의 작품들은 일관성이 있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질박質朴한 시골 삶의 정경이 구수한 정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반근대反近代의 시편들은 균질감이 있는 대신에 박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개선하면 독자적인 개성으로 발전하리라 기대된다. 이상 여러분들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정진 있기를 바란다.

시의 새로운 지형도를 기대한다

 

김 종 해 | 시인

 

제3회 《시인세계》 신인작품공모에는 인터넷 온라인 공모가 추가되어 양적으로도 투고작품이 배가되었고, 예심을 보는 품이 더 들었다. 수준 편차도 들쭉날쭉이어서 그쪽에서 결심으로 넘어온 네 사람의 응모자 가운데 서정의 「유리 닦는 사내」(외 9편)가 최종심까지 남았다.
우편과 이메일 등으로 투고해서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두 사람 가운데 선자에게 넘어온 황춘기의 「언제나 봄날 봄바람같이」(외 15편), 김영수의 「배차계 정씨」(외 13편), 이도희의 연작시 「썩는 것에 대하여」(10편) 등 세 사람이 최종심까지 겨루었다. 이 네 사람의 투고자는 모두 기량면에서나 시적 자질 혹은 함량면에서 제 나름대로의 수준을 갖추고 있으나, 시인으로서의 독특한 자기 개성과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시인 한 사람이 더 늘었다'는 개념을 뛰어넘어 '자생력을 갖춘 촉망받는 새로운 시인' 한 사람이 그려낼 우리 시단의 새로운 지형도를 선자들은 염두에 두었다. 이러한 심사기준과 엄정한 잣대 때문에 최종심까지 남은 네 사람의 응모자는 '시인'이 되기 위한 문턱을 마지막에 넘어서지 못했다. '아쉽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농촌시, 전원시의 서정적 가능성을 보인 황춘기의 「언제나 봄날 봄바람같이」, 언어 조형능력이 탁월한 서정의 「유리 닦는 사내」가 특히 아쉽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도희의 연작시 「썩는 것에 대하여」와 김영수의 「배차계 정씨」 등도 당선권에 들 정도의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과의 편차가 커 선자로서 우려되었다. 아쉽지만, 시인이 되기 위한 가혹한 자기 채찍질과 연마가 더 있기를 바란다.

 

 

 

728x90




      나들목 외 4편

                        장 인 수

 

나들목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샛길로 빠지고 싶은 유혹은 너무 크다
대전행을 잊고 그만 일죽 나들목으로 휭! 빨려들어가
홀린 듯 칠장사로 가고 있었다
칠장사 거의 다 가서 길 오른편
단지 빨간 함석 지붕으로 오르는 능소화 넝쿨 때문에
남의 집을 훔쳐보았다
주인도 없이 외양간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목에 걸린 종소리 땡그랑 울리며
암소의 엉덩이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콧등에는 왕방울 땀송이가 소복소복
잠시 후 쿵!
송아지가 지상에 첫도장을 찍었다

 

 

돼지머리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가마솥이 마당에서 끓고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이놈 삶은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고 있다
소주 한 잔 벌컥 들이켜며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캬! 죽을 때는 요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접시마다 귀도 웃고 코도 웃고 눈도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껄껄껄 돼지 웃음을 먹고 있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산다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너무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포도알은 아내의 손가락에 매달리고
어느새 넝쿨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덮는다
아내의 봉긋한 가슴은 시큼한 포도가 된다
자궁 속에는 아직 덜 익은
청포도가 자라고 있다

 

탄 천

신도시 분당 사람들이 나와서 뛰고 걷는다
건강을 위해 분주하게 뛰거나 걷는다
애완견들도 열심히 뛴다
불야성을 이루며 자정이 넘도록 분주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 보기 힘들다
자갈밭에 서 있는 해오라기만
골똘히 강을 잊고 사색에 잠긴 표정이다
세상을 뜬 듯 부동자세인
해오라기 너만이
마음과 영혼에 군살이 없으리라

 

공 범

 

순찰차가 아파트를 순회하고 있다
응급차가 조용히 머물다가
시신을 거두어 갔다
주민들은 동요하지도 않았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수사관은
주민 몇 명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등록증이 여섯 조각 나 있었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수사해야죠
세상 모든 곳이 범죄 현장입니다
흉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낙엽 떨어지듯 그렇게 추락한 걸까요
아닙니다 누군가 밀었습니다
주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기자 왔나요? 보도 안 되죠?
반장 아줌마는 냉정하게 물었다
모두들 소문을 막기로 했다

 

당선소감

꼭 해보고 싶던 소원 한 가지

장인수
1968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에서 나고 자람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충남 당진군 호서고등학교, 서울 강남구 일원동 중산고등학교 교사
2001년 한국교원문학상 수상(교총 주관)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재학중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이매촌 진흥아파트 809동 303호

문학 수업을 하면서 꼭 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을 직접 만나 그분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 소리내어 마셔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면 술자리에서 그런 큰 시인과 대판 인생 얘기를 주고받았다는 둥, 어깨동무를 해봤다는 둥 허세를 떨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문학을 좀더 폼나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로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인가! 황동규, 김종해, 김승희 이런 큰 시인들이 내 작품을 읽고 신인상 당선작으로 뽑아 주시다니!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내가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내 나이 30대 중반, 혹 늦깎이는 아닐까. 그래서 감수성이 무디어진 것은 아닐까. 자괴감이 앞선다. 과연 내가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늘 배우는 자세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해 본다. 늘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로 시를 쓰고 싶다.
기존의 시들이 산, 강, 바다 등을 많이 노래했다. 그러나 넓은 들판을 노래한 시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나의 아버지는 들판에서 평생을 사셨다. 나 또한 들판을 뻔질나게 쏘다녔다. 땅을 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들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산에는 정상이 있지만 들판에는 정상이 없다. 들판은 시작도 끝도 없다. 단지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 들판을 통과하는 몸짓만 있을 뿐이다. 들판에는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길이 있을 것 같다. 그런 자세로 시인의 길을 가고 싶다.
다시 한 번 심사위원들과 《시인세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학창시절 저에게 시심詩心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오탁번, 이남호, 정진규, 유성호 은사님, 내 습작시를 여러 번 지도해 준 젊은 시인 윤성택님께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앞날의 시인들

        황 동 규 | 시인

‘빗장 걸린 입 하나 쓸쓸히 서 있다’(「폐문」 제1행)처럼 김재운의 시는 때로 놀라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의 모든 시행마다 메타포나 의인화 표현이 들어 있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다 강조되는 음악처럼 지나친 수사학적 비유 장치는 시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게다가 「산복도로」 「제3부두 근처」 「폐문」 「빈집」 등 제목이 보여주듯이 회색 일변도의 색채도 긴장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언어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얼마 안 가 독특한 시인 하나가 새로 탄생할 것 같다.
장혜승의 작품은 소재를 다루는 재주도 정열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전태련의 작품에는 맑음이 있으나 필요없는 감상이 비집고 들어와 시를 평범하게 만들곤 한다. 이 두 사람 모두 앞날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장인수는 언어를 다루는 노련한 솜씨와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묶어 보낸 작품 11편 어디에도 군살이 없다. 그러나 호흡이 좀 짧아 시를 모두 소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게 만든다. 길이가 짧다는 뜻이 아니다. 4행시에 긴 호흡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포도를 임신한 여자」 「돼지머리」 「나들목」에서처럼 ‘신선한’ 생각의 얼개가 마음을 끌고 놓지 않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호흡에 대해 걱정했으나 쉽게 숨쉬는 법을 바꾸려 말고 지금 현재 자기가 획득한 것을 계속 밀고 나가기 바란다. 끈질김이 길을 새로 뚫을 것이다. 타자들이 부산히 걷고 뛰고 있을 때 “세상을 뜬 듯 부동자세인/해오라기 너만이/마음과 영혼에 군살이 없으리라”(「탄천」 마지막 3행).

간결하고 경쾌한 시의 보법

         김 종 해 | 시인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 사람의 작품 가운데 전태련의 「별」(외 14편), 장혜승의 「십자수 뜨다」(외 9편), 김재운의 「산복도로」(외 10편), 장인수의 「나들목」(외 10편)을 주목하여 읽었다. 신인으로서의 당당함과 당돌함, 기성시인의 화법이 아닌 새로운 엇박자의 자기화법, 자기만 만들어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컬러, 이런 것을 기대하고 최종심에 남은 네 사람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각자 일정한 수준치와 함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단계의 평이함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시 형식을 빌린 ‘시 같은 시’보다, 좀더 낯선 시, 시의 몸속에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시’, ‘생동하는 시’를 쓰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같은 선자의 생각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신인이 장인수의 「돼지머리」(외 10편)였다. 장인수의 작품들은 모두 화법이 독특하고, 쉽고, 간결하고, 경쾌하다. 주제가 뚜렷하고 주제를 표현하는 사물과 존재 이미지의 복사기법이 노련하다. 하나의 사물, 삶의 미세한 부분을 적시해내는 듯하면서도 삶과 존재의 가장 중요한 여러 부분을 부담없이 환기시킨다. 시를 읽는 즐거움과 재미를 깨닫게 한다.
동네 어른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다면, 그래서 시인이 시를 썼다면 죽음에 대한 추모와 망자에 대한 애도가 우선이겠지만 이 신인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어서 소주와 함께 돼지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집의 슬픈 분위기는 그림자처럼 이 시의 뒷전에서 페이소스로 남아 있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도 시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는 시, 환상과 신비가 담겨 있는 시, ‘포도’라는 어줍지 않은 작은 자연 속에서 끌어낸 또다른 상상력이 시로 그려져 있다.
새로운 시인 장인수의 등장을 축하하며, 그의 색다른 시의 보법에 기대를 건다.

은유의 힘과 변용의 싱싱함

          김 승 희 | 시인

예심을 통과해 넘어온 시들을 읽으며 심사자는 아주 잘 차려진 조촐한 밥상들을 연상했다. 조촐한 밥상이란 유능한 요리사가 이모저모 잘 설계한, 맛과 안정감과 칼로리의 균형감각을 갖춘 밥상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逆으로 말해본다면 신인다운 역량과 패기가 분출되지 않고 머뭇대는, 덜 터진, 뜨거운 ‘마그마의 부족 현상’을 가진 평이한 밥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좀더 강렬한 무엇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전기가 좀 강하게 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인 응모작들을 읽는 버릇이 있다. 현실에 대한 오만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 자기만의 목소리, 전압이 높은 위험한 비유, 새로운 철학을 배경에 깔고 낯설게 튕겨져 나오는 언어의 힘― 이런 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인에게 그러한 미학적 위험과 용기의 과잉을 원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대 이름은 ‘신인新人’이니까.
신인들은 좀더 독특하고 위험해질 필요가 있다. 독특한 언어, 위험한 정신, 첨예한 갈등, 독특한 충돌― 이런 것들을 양 날개에 적재하고 위험하게 좀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어디로 뛰어드느냐고? 체험 속으로, 언어 속으로, 언어 속의 음악 속으로, 현실을 보는 시각의 개성 속으로 좀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즉 백 번의 안타보다는 한 번의 홈런을 갈구하는 그런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범속한 감동을 백 번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체험에 대해 쓰더라도 체험의 그라운드를 아슬아슬 넘어가는 심미적 쾌감의 언어가 터져야 한다. 심미적 쾌감이라 해도 그것은 지성과 감성에 함께 맞닿아 있어야만 생겨날 수 있는 혼합의 울림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의 시인은 감성과 더불어 탄탄한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시각에서 나는 장인수의 「포도를 임신한 여자」, 「공범」, 「나들목」, 「탄천」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소품적이라는 지적도 있었으나 그 소품성이 포괄하는 영역이 결코 소품적이지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여 당선작으로 오르게 되었다. 특히 「공범」에서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생리를 직시하는 시각이 날카롭고 탄탄하다. 현대인의 생리를 일방적인 도덕적 비판으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은연함으로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어때, 당신도 그렇지 않아?”라고 끌어들이는 공감의 묘미를 가진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도 작지만 상상력과 은유의 힘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아내는 시인의 상상력과 은유에 의해 몸의 외부와 내부에 포도를 장착한 ‘포도 여인’으로 변형된다. 현실의 순식간적인 변용이 싱싱하다.
「나들목」에서 암소의 분만을 “잠시 후 쿵!/송아지가 지상에 첫 도장을 찍었다”라고 표현한 대목도 이 시인의 은유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소품적인 듯 보이지만 은유적 역량에 의해 함의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장인수의 재능이 아닌가 생각한다. 축하를 보내며 자신의 개성과 더불어 대성하길 바란다.

 

 

 

728x90

 

 

 

 

 

 

 꽃게를 손질하며 외 4편

                             한 미 영

톱밥을 밀치고
산 꽃게 두 마리 찬물 속에 담근다
대보름날 불 깡통 돌리는 아이처럼
후두두 거칠게 팔다리를 휘둘러댄다
하릴없이 그동안 남의 살을 먹고 산
내 몸 속이 덩달아 크게 흔들거린다
수갑 같은 집게발이 철컥 하고 엄지손가락을


문다 고무장갑 속까지 무섭게 파고든다
누구나 목숨 앞에선 이렇게 악착을 떠는가
들고 있던 묵직한 부엌 가위로 이마를 힘껏
내리친다 그놈은 그제서야 집게발을
스르르 풀더니 얼른 몸을 둥그렇게 만다
툭툭 건드려봐도 웅크린 몸뚱이에 움직임이 없다
단단한 등껍질로 그가 가슴에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휘둥그레진 까만 눈알 두 개와
딱 마주친 내 눈
죽음을 예감한 그의 눈이 나를 먹는다

그가 완강하게 감싸안았던
으깨져 튀어나온
너무도 투명한 속살

네 속이 오늘 내 무덤 속이다


    사는 게 쉬운 일인가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우리들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이 점차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게 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찰져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서울, 새봄

 

새로 살 아파트 외벽은 지어진 년수보다 더 낡았다
빈집에 들어서자말자 제일 먼저
거실 네 구석에 사기접시를 놓고 약쑥을 피운다
타들어가는 약쑥은 벌건 제 눈물처럼
독한 연기들을 퍽퍽 게워 낸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독한 쑥내는 구석구석 숨죽인
불길한 운세를 몰아내 준다는데
늙으신 어머니 더 낮게 숨죽인 채
무병장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열심히 비비신다
연기 한 입 베어 문 채 풀기 남은 벽을 기대고 앉아
한평생 저 약쑥처럼 타들어갔을 생을
그 검고 환한 속을 바라본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함부로 저 속내를 가로지르진 못하리라
서른아홉, 불혹의 문 밖에서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생의 빈집을 열어본다
후미진 구석이 많을 내 몸 속에
쑥을 피우면 자욱히 잦아들 고통들

매운내 피울 어린 쑥풀 몇이
집 밖 낡은 담벼락 아래
채 뜨지도 못한 눈을 하고서 앉아 있다
빨래를 말리며

 

아파트 구석과 구석들을
죄다 뒤져서 벗어던진 고단함이나
때 낀 외로움 몇 가지를 모아서
빨래를 하네
언젠가 당신이 슬쩍
벗어 주고 떠난 물빛 꿈 하나
장롱 속에서 한 해 한 해 힘들게 버티던
빛 바랜 그 꿈도 꺼내어
선명하고 더욱 희게 옥시크린
한 컵 탄 물에 얼른 담그네
아득하기만 한 당신의 곰삭은 입 냄새가
가루비누 속에 부글거리고 풀리면
생활의 틈새마다 가뭇가뭇 낀 때까지
싹싹 비벼서 빠네
찬물에 설렁설렁 헹구어
걷어붙인 팔목이 시큰거려도
더는 비틀어 쥐어짤 수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쥐어짜네
살껍질 같은 아픔 몇 벌
살 속 같은 외로움 몇 벌
종일 짜랑짜랑한 햇살 한 줄에
널어두었지

눅눅했던 하루가
하루의 피곤과 우울이
감기몸살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뽀송뽀송하게 마르네
말라 가는 빨래 사이로
땟국물 빠진 원래의 마음들이
다시 희게 펴져 빛나네

 

 

명태덕장에서

 

진부령 고갯마루에서 명태덕장을 만났다
중심을 비운 건조대에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
경구 속 소녀의 모습을 한 명태들이
말라비틀어진 모가지를 허공에 매달고 있다
몸피를 잃어가면서도
고단한 낮은 목숨 쪽으로 몸을 바짝 틀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마른 몸 가까이 고개를 숙인다
다른 이름으로 제 몸을 수줍게 하늘 가득
널어 말리고 있는 이 죽음들에게서
차라리 삶의 진한 비린내를 맡는다
내 안의 많은 상념들을 한 두름씩 그곳에 걸어본다
진부령 길은 한없이 아래로 뻗어 있고
다시 내려가는 저 아래 세상에
몇 궤씩 걸린 등짝들을 무심히 지켜보는
저 마른 명태들

 


 

 

당선소감

꿈, 서설이 내렸다

한미영
1964년 경북 안동 출생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 강남구 일원본동 샘터현대아파트 108동 1103호

전화가 왔다.
꿈 생각이 났고 서설이 내렸다.
등성이를 힘겹게 올라가 서설이 곱게 덮인 언덕에서
막 무언가를 시작하려다 깨어나 버린, 못내 아쉬운……

설 전날 새벽,
눈이 풀풀 내려 덮이는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미처 떠지지 않는 눈에다 와이퍼를 비벼대며
‘세 시간 아니 휴게소 들르는 시간까지 넉넉잡아 네 시간
그래 네 시간만 참는 거야.’
중얼거림이 사람 속에서 땅 위로 뚝뚝 떨어져 나오면서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뒷목덜미에서부터 서서히 통증이 시작되었다.
멈출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인터체인지는 이미 곁을 지나친 뒤였고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있었다.
9시간을 고속도로 위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고향은 아직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통증을 현자처럼 견디며 길을 가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끝에 고향집 같은 시가 기다릴 거라 믿는다.
내 믿음에 커다란 답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내 시와 삶의 굵은 테두리이신 홍신선 선생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이제 시작이다.

 

 

제1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시

        불임 외 4편

김 금 숙

나는 이제 익어가기로 했네
익어가서 달을 낳아버리기로 했네
비바람 휘몰아치는 어둠
그 자궁 속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꿈을 수천 번 넘게 꾸었네
너무 오래 싸늘히 식은
무른 밥그릇을 품고 있었네
노을 위에다 끓이는 밥의 허망함을 놓아주기로 했네
두 번 다시는 추락하지 않을
피눈물로 범벅된 탯줄을 부여잡고
있는 힘 다해 한 잎 한 잎 익어가네
제문처럼 빳빳하기만 한
내 눈물덩이들도 씨방 속으로 들어가
단단한 한 톨 씨앗으로 여물 준비를 하네
어둠의 탯줄은
거미줄만 어지러운 내 자궁을
한 잎 꽃처럼 세상 밖으로 밀어내네
그래, 고통은 잘 익은 다음에 밀어내는 것이지

 

꽃잎처럼 밀어내는 것이지

한 여자가 잘 익은 달을 낳고 있네

 

 

 

자갈치시장

 

새벽 자갈치는 납작하다
납작한 바다
납작한 배
납작한 욕지거리
납작해진 사람들이
납작해져서 부피가 사라진
수평선을 쓰윽 뽑아내어
밤새 잡은
순교자들을 줄줄이 엮어 올린다
꼼짝없이 갇힌
바다들이 수상한 몸짓과 손짓에 의해
소문도 없이
하나 둘 납작해져서 사라진다
얇게 저며진 비린내까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텅 빈 바다는 몸을 뒤척여
잘 익은 태양을 자궁 안으로 밀어 넣고
다시 부풀어오르는 세상 때로
변신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그 숲에 가면

 

하주배기 어귀 솟대 밑을 지나 그 숲에 가면
십일월의 설핏한 저녁 어스름이 보인다
건장한 사내 혼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게 보인다
내일은 마른 잎 하나 꼭 그 자리에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떨어지리라
집달리처럼 불어대는 바람
비듬처럼 떨어지는 백양나무 이파리
허옇게 입술이 부르튼 채 입적한 들풀

사람들이 한바탕 색종이처럼 몰려왔다가 가는 게 보인다
흰색의 국화를 볼모로 묶고 있는 까만 리본
새까만 도둑고양이 한 마리 유유히 지나가고
문득 등을 구부린 비가 꼬르륵 꼬르륵 내리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무덤들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분주하게 눈을 뜨는 게 보인다
오오, 그 오랜 내 정체불명의 목마름이
무장해제를 당한 군인처럼 힘없이 돌아서는 게 보인다
순리대로 살거라 하던 어매도 아배도
한 장의 단풍으로 날아갔음이 이제사 보인다

새 봉분 하나 봉선화 꽃망울처럼 봉긋이 열린 게 보인다

저 순한 젖무덤 속에서
몇백 년 뒤에는 발 고운 한줌의 흙이 나오리라
유두빛깔의
오오 나도 유두빛깔의 흙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겨울 판화

 

보름달이 홀로 가슴을 드러내며 목이 메일 때
나도 헐벗은 몸을 드러내고 술을 마신다
마실수록 헐벗은 몸은 부풀어올라 동그랗게
보름달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고
수억의 보름달이 떠도는 하늘은 너무도
조용하여 아무도 내가 자꾸자꾸 보름달을 만들어
하늘로 쏘아 올리는지 알지 못하고
내 속의 물기란 물기는 모두 하늘에 띄워 놓고
마른풀로 누워 그 떠도는 영혼들을 보누나

 

 

 

십자수

 

나는 지금 골고다로 간다
한발 한발 징검다리를 딛고 간다
말이 징검다리지
그 절망의 네모칸을 헛디디면
곧바로 상어밥이 되고 말지
그 짓을 왜 하냐고?
재미있으니까 사는 한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느닷없이 누가 입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내장을 훑어내서 순식간에 곳간이 텅 빈다
이까짓 절망쯤이야 홱 잡아채서
바늘귀에다 꿴다 하얀 네모칸들이
눈을 뜨고 올려다본다
착하기만 한 것은 죄지 분명 죄지
바늘을 희망의 정수리에다 푹 꽂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젖은 몸 어느 구석인가가 또 한번 더 젖는다
흐린 눈으로 십자수의 길을 내려다본다
길은 십자가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바늘은 내 가슴팍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당선소감

좋은 시로 보답

김금숙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안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중
경북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657-3

처음엔 마음이 한정 없이 두근거리다가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나절부터는 막막해지기 시작했지요. 백야 같은 저 막막한 마음의 끝에서 뭔가가 걸어나오겠지 하고 말이지요.
살다 보니 기다리는 데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건지 뭐 지겹다거나 속이 상한다거나 하는 일은 드문 편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다락방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나를 불러내서 들여다보기로 했지요. 오랫동안 햇살과 담쌓고 살아와 핏기 없는 얼굴에 마른버짐까지 피어나서 어디 나서기가 민망스럽지요. 게다가 피 토하고 죽은 동백꽃처럼 함박눈 휘날리는 곡조로 어설픈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막막하던 마음 느닷없이 동백꽃 지듯 고개를 꺾고 입을 다뭅니다.
또다시 막막한 저 흰 겨울벌판이 깔리고 어둠도 이젠 제법 깊어가고 있지요. 눈을 떠도 감아도, 어쩌다 깊은 잠이라도 드는 새벽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산다는 것의 막막함을 배경으로 끝도 없이 강 되어 흐르는 눈물이 내 노래이지요.
살아 남기 위해서 깊은 밤 홀로 부르는 내 노래의 여린 손목을 놓지 않고 감히 시의 길을 가겠습니다. 늘 어설픈 세상살이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단짝 친구 성구에게 이 기쁨을 바칩니다.
아직은 모자람 투성이의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제가 제 자신을 다 바쳐 좋은 시를 쓰겠다는 다짐 외에는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 이제 정말 이 약속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진실과 삶의 무게

         신 경 림 | 시인

김금숙의 시들은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어서일 터이다. 억지로 시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솜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가령 「자갈치 시장」이나 「십자수」 같은 시를 보면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얼마나 자연스럽고 맛깔스럽게 시를 만드는 솜씨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읽기에 따라 내용이 싱겁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한데 이것도 그의 시의 장점으로 기능한다. 싱거운 것 같은 속에 번득이는 삶의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신인들이 항용 저지르기 쉬운 관념을 위한 관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이미 그 단계를 멀리 벗어나 있다는 증좌이리라.
한미영의 시들은 삶의 무게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연륜이 묻어 있는 시들이다. 요즘 신인들의 시가 대체로 손끝 재주에만 매달려 식상하게 하는데, 그의 시는 사뭇 다르다. 손끝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사물을 보는 시각이 범상하지가 않다. 예컨대 「꽃게를 손질하며」에서 “으깨져 튀어나온/ 너무도 투명한 속살”을 보며 “내 무덤 속”을 연상하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시는 좀더 다듬어졌으면 싶지만, 그 점이 결정적인 흠이 되지 않는 것은 팔팔하게 살아 있는 말들 때문이리라.
편집진 쪽에서는 한 사람을 당선으로 해주기를 원했지만 위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탈락시키기가 아깝다는 것이 심사위원의 일치된 의견이어서, 두 사람을 모두 당선으로 뽑았다.

 

예리함과 섬세함

       김 종 해 | 시인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사람은 열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 끝까지 심사위원의 눈을 붙든 사람은 김경신, 한태희, 김금숙, 한미영이다. 김경신의 「가을날엔 누구나…」는 아름답고 투명한 시이긴 하지만, 다른 투고작품과의 편차가 심해서, 그리고 한태희는 시의 개성적 화법이 독특하지만 관념과 지식을 극복하지 못해서 아깝게 탈락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금숙과 한미영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당선자를 뽑아야 하는 심사내규를 심사위원들은 숙지하고 있었지만, 심사내규에 구애받지 않고 두 사람을 모두 당선자로 뽑는 데 동의했다.
한미영의 시들은 삶의 ‘일상’과 ‘가사’를 대면하는 여성 화자의 시각이 예리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쉽고 평이한 일상의 소재를 경이적인 존재로 재편해 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별것 아닌 「꽃게를 손질하며」 엮어내는 존재의 양극이나, 냉장실의 밀가루 반죽 속에서 빚어내는 삶의 조화가 재미있기까지 하다.
김금숙의 시들은, 시로 말하는 화법이 노련하다. 시 「불임」은 화자가 여성이며, 섬세하고 내밀한 여성의 몸을 통해 잉태와 출산의 새로운 신화를 시로 만들어 보여준다.
“있는 힘 다해 한 잎 한 잎 익어”서 “잘 익은 달을 낳고 있는” 비밀스러운 내적 신화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성의 민감함이나 섬세함,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기량이 뛰어나다.
두 사람의 신인의 탄생을 저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써서 좋은 시인으로 정진하기를 바랄 뿐이다.

여성시의 새로운 사실주의

      황 현 산 | 문학평론가

기성시단에서도, 신인 등용에서도 여성 시인들의 약진은 괄목할 만하다. 이는 우리의 시가 나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오랫동안 천역을 맡아왔고, 여러 의미에서 생명과 삶의 관리를 그 몸으로 지탱해 왔다. 이 여성적 사실성이 우리 시에 새로운 사실주의를 열고 있다.
두 당선자, 김금숙과 한미영이 모두 여성이다. 김금숙의 시는 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과 세상만물이 맺는 비밀스런 관계를 엿본다. 한미영은 가사의 자잘한 국면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높은 서정의 계기를 창출해낸다. 김금숙의 사색은 진지하고 처연하며, 한미영의 언어는 명암의 대조가 선명하다. 심사위원들은 어느 쪽도 버릴 수 없어, 《시인세계》 편집진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모두 당선자로 밀었다.
심사위원들은 한태희와 김경신의 작품에도 주목했다. 한태희의 시는 관념적인데 그 관념들을 운동하는 삶이 아니라 정지된 알레고리로 채우고 있다. 김경신은 언어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항상 결구가 상투적인 낙관주의로 끝난다.
두 당선자의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등단을 축하하며, 응모자들의 정진을 빈다. 이제부터 시작이며 또 다시 시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