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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쇠리 나팔꽃


추운 밤 달빛이 서둘러 스위칠 넣는다
길 넘어 중앙다방에서 오는 인기척인가
하얗게 기억을 놓아버린 연탄재를 밟고
웅얼웅얼 카네기나이트 전단지가 지나간다
황마담은 담장마다 피는 나팔꽃이었다
이 남자 저 사내 늙수그레한 등덜미마다
넝쿨어깨를 걸어 골목을 꽃피우던 여자
막다른 집을 끝으로
아이들 울음소리 끊어질 무렵
그녀의 넝쿨도 걷히고 말았다
포크레인 지게차가 잡풀 무성한 오쇠리 집들
은밀한 부분을 더듬을 때면
심심한 사내 몇 쯤을 끄떡없다고
붉은 얼굴에 분칠하던 그녀
마른 풀씨 같은 내 여자도 봄이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자궁을 들어낸
늙은 동네의 뱃속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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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동의 태양


푸르고 붉은 지붕들 태양연립 은하슈퍼
바람 돌아가는 모퉁이 금성여관 턱밑에는
노인이 꽝꽝 못 박아 걸어둔 전구가 있다
560번지 사람들은 그 아래서
부고장이나 밀린 고지서 등을 읽는다
바람 속에 한숨 넣어주며
비행기들이 낮게 나는 하늘 한 쪽
새들과 같은 방을 쓰는 노인을 보고 개가 짖는다
저 울음을 따라 흘러가고 오던 빛들
그을린 얼굴의 해가 천정으로 숨어들면
잠시 벗어놓은 어깨의 푸른 멍울이
별 대신 뜨는 이 곳, 02호
지하방에 서식하는 내가 어둠을 퍼올릴 때도
전구는 얼어붙은 길을 풀어내고 있었다
떠나 있던 새들이 빈 방으로 모여든다
일성전기 전깃줄에 감긴 사십 년 시간을 지나
복지회관 쪽방에 남은 박노인 눈 속의
일렁거리는 불빛, 그 등 앞세우고 노인은
70년 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이 뒤를 따랐다
손에 든 부고장에는 지상에 없는 주소가 적혀 있다
누군가 그리우면
사람들은 달은 두고, 금성여관
턱 밑에 달랑거리는 전구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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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 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낡은 여행가방, 서른과 스물
끝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마흔에도
옆구리에 단정히 붙어 있었다
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저녁
정거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추억들이
어둠과 부딪히며 소스라치곤 했다 가방 속
손거울로 과거를 비추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방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린 날 거리에는 입 벌린
눈 번뜩이는 무수한 가방들이 보인다
그럴 때면, 늑골 속
단단하게 굳어진 길 하나가 만져진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시 가방으로 들어간다
곧 문이 닫히고
그를 둘러싼 촘촘한 길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머리맡에 잠든 수없이
눈물로 채우고 엎지른 적이 있는 가방
어안이 벙벙해진, 말 잃은 가방이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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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에서


유선을 타고 바닷물이 흐를 때가 있다
끊어진 물길 가득 돌아오는 배들
간혹 월곶 소금창고에 수배전단지가 붙는다
추억의 세간을 달그락거리는 수상한 바람은
소금포대를 이고 집으로 가는 처녀의
배를 부풀렸다 벽보의 주문대로 애인을 갈아치운
창고지기 사내는 제 욕정의 크기만큼
바다의 허벅지를 떼어내 피를 말렸다
짓눌린 벽보의 얼굴이 창고로 숨어들자
홍안의 파도가, 둥근 무덤으로 남은
방파제를 두드린다 문득
캄캄한 유두에 혀를 대면 쏴아
바다의 비린 육질이 길을 뚫고 월곶
붉은 땅을 한 바퀴 돌아간다
내 오랜 연인은 서해의 후손이다
폐경 이후에 다시 수문을 열고, 바다는
바람으로 쓰레질한 진액을 말린다
온몸 가득 흰 소금꽃이 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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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사다리를 타는 한 여자가
허공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간혹 마당으로 별이 떨어진다
세상의 의미는 늘 위에 있고
사다리가 아니면 여자는
아래쪽에 붙박여 있어야 했으므로
심한 절름발이였던 여자 아래선
용접공이 그녀의 추락한 언어에
불꽃을 주사하고 있다 한순간
빛이 꺼지고 어둠 속 사다리가 흔들린다
두어 칸 더 오르기 위해
한 쪽 발을 떼어내자 기우뚱
짧아진 마음 쪽으로 하루가 기운다
용접공이 다리를 땜질한다
다시 사다리에 오른 여자
눈을 감는다
용접공의 손을 빠져나온 별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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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애 /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졸업. 1997년 광주여대 여성문학상 우수상. 2004년 제4회《시인세계》신인상 당선. '시산맥' 동인. 현재 계간 《시인시각》편집장.

출처 : 정석봉 시인의 블로그
글쓴이 : 꼬마 파랑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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