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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희망정밀 / 김준태

 

쇳밥이 고봉으로 솟아 허기를 깁던

밀링머신 절벽을 깎아내리는 소리가 삐거덕하다

멈춘다

사내의 등허리를 감아 도르르 말리는 기름얼룩이

번지르르하다

무거운 골목이 침윤하는 하오를

헐거운 빗물의 끈으로 동여매고 있다

골목 뒤란 핀 주저흔

꽃등심 만개한 꽃이 비리다

여인의 눈가에 번지는 묽은 추억 너머로

헛배 부른 저녁이 우두둑 뽑혀나간다

자물통 굳게 닫은 희망정밀

허공의 결박을 푼 빈 몸이 공장을 돌린다

악문 입으로 골목을 밀고 가는 여인의 손아귀에

전송을 멈춘 문자가 깜박거린다

사내의 생이 덜컹덜컹 읽힌다 옆구리를 베어낸 붉은 저녁

경첩에 매달린 환영이 불면을 닦아낸다

컴컴한 절벽이 켜켜이 쌓이는 무릎 아래

동그랗게 깎던 희망이 수북하다

 

 

 

[금상] 커피를 내리며/ 淡友 

나는 황인의 주술사
원두 속에 웅크린 원주민을 불러낸다
그 몸에 간직한 검은 바람 강렬한 햇살
한 스픈 두 모금 석 잔만 주문을 건다
커다란 눈동자는 수심 깊어지고
출렁이는 두려움에 제단이 덜걱거린다
'라하 케결정 을간순 이 여피 은검'
그 몸을 빠져 나온 사막이 깔리고
모래 언덕을 넘어 오는 영혼이 거름 종이를 건널 때
절정으로 치닫는 주문, 한 방울만 이 씨씨만 세 컵만
사막의 샘이 제단을 적신다

정갈한 찻잔에 받치는 가장 경건한 시간
원주민의 별 같은 이빨이 딸깍딸깍 찻잔을 깨운다
문명이 익을 때부터 조금씩 반짝이던 소리
식인의 기억이 노을처럼 은밀히
정글을 뚫고 바다를 건너 빌딩 숲을 지나
전라의 영혼을 나른다
'검은 피여 이 순간을 정결케 하라'
오래 그을린 구수한 갈색 피부가
입술에 닿는 순간 혀를 찌르는 전율
나는 도시 속의 눈알 큰 원주민이 된다
독 화살을 메고 쏘아서 적중할
상아색 하트를 쫓는다.          


[은상] 풍경 전사轉寫 / 가문비

횡단보도 파란불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신호 걸린 택시기사 낙엽 몇 장을 넘기며 일당을 센다
타닥타닥 넘어가는 하루 그 앞을 구부정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지나간다
가까스로 건넌 홍해의 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침마다 클로즈업되는 꿈들로
생활정보지함은 언제나 비어있다 밑 빠진 독으로
구름 낀 하늘로 휩쓸리다 만 전단지 한 장
도시풍을 좇아 단소매를 펄럭인다
썬팅한 창밖으로 역방향 차들이 노출된 필름처럼 겹친다
포플러에 가린 주꾸미 닭발 산낙지 밋밋한 철자들 사이로
파지 실은 손수레가 다가왔다 멀어진다
소나기는 흔적 없이 지워졌다
바닥난 자장면 그릇에 얼굴을 묻은 채 밖을 넌즛한다
서로 마주친 건너편이 민모습을 들이댄다
곱빼기 먹은 입술을 닦으며
잔돈으로 오백 원짜리 학동전을 건네받은 석양
평면의 계절이 도장밥을 묻히고 있다
요철 없는 부리의 문양이 자꾸 온몸을 찍는다

 

 


[동상] 플로레타리아의 창 / 백경

네가 없는 동안에 나는 걷는다 플로레타리아
나는 빙글빙글 목적없이 항해했다
유리컵에 소주는 비어있고
꿈에서 본 잃어버린 너의 첫 구절은 미련없다 돌아오지 않는다
벌써 6월의 나뭇잎이 몇 개나 마르다니
안절부절 왔다갔다 하다가
계단을 내려가 소주를 산다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나는 너를 잊기 위해
낮에 술을 마셨다 세상에나
누가 내 꿈 속에다 너를 써 놓았나 플로레타리아
너의 방문에 내 머리는 헝크러진 그물처럼 복잡하다
배 밑에 난 굴껍질을 떼어내듯 거칠어진
얼굴에 수염 속 여드름을 짜내고
나는 대낮의 백향기를 마시며 너를 다시 생각한다
잃어버린 첫 구절에 상관없이 저 건너
이층의 창유리처럼, 배 밑에 난 어탐의 유리눈처럼 매끄럽게
너를 다시 항해하려고 한다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창가엔 새로 사다놓은 저 풀잎 화분
내 좋아하던 저 풀잎의 이름이 뭐였더라 로즈마리향이라고
꽂혀있던 저 향기식물의 이름이 뭐였더라
플로레타리아
검은 나뭇잎 새떼가 유리창 속 바람에 한참이나 흔들린다
서로 마주친 검은 눈, 서로 못 본 체 지나는 검은 새들
내 거울에 비정규직을 누르며 군림하는 정규직
플로레타리아 위에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건너편 학원선생님의 목소리보다도 더 크게 외치는
창밖에 네시 이십분의 우렁찬 새 소리
밤이 오면 아이가 간지럼을 타는 듯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웃음이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나의 플로레타리아
너의 플로레타리아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녹빛 나뭇잎에 스민 샛노란 빛과 사각사각 부딪히는 소리가
플로레타리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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