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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지 / 가문비

  내게 남은 일이란 야윈 문살에 기대어 나를 봉합하는 일

  이슬 내린 새벽과 노을 진 저녁 사이로 은은한 가을을 물들이는 일 인적 끊긴 마당을 향해 묵독하는 일 댓돌 아래 모란을 뚝뚝 떨어트리는 일 침 묻은 손가락을 감추며 정색하듯 시치미 떼던 때 있었지

  수절한 과수의 서러운 일생처럼 부르르 폐가의 문풍지가 운다. 낡은 원고지 여백의 문살마다 육필로 써 내린 문장이 흐릿하다 녹슨 경첩이 낯선 발자국에 삐걱 봉문을 열면 버려진 사발 속으로 도란대는 수저소리 물컹 씹히는 행간들
  
  한 컷의 형상이 별을 띄우고 달빛을 떠먹는다. 사르륵 옷깃을 벗는 꽃그림자, 뽀얀 살결이 풀어헤친 모세혈관들 청청하다 못해 깊다 밤이 쓰러져가는 시간 내내 폐가의 기억은 문 속에 갇혀있고 바람조차 잠긴 문고리를 벗을 수 없다

  한번이라도 문을 발라 본 사람은 안다 멀어지는 것들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더듬어 읽는다는 걸 풀 먹인 창호지일수록 투명하여 한 송이 국화로도 온방을 물들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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