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외 4편 / 서상규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검게 때 낀 옷을 비막(飛膜)으로 접고
막대그래프로 다리를 세워 발자국들이 지나는
지하도 바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생이 뒤집힌 빈 주머니로
허기가 일상이 되어
쥐의 몸통으로 엎드려있다
햇살이 고양이털무늬로 발톱을 숨긴
바깥세상을 피해 그림자의 동굴 속에서
마른 쥐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있다
손금에 절망의 궤적이 음각된
굴레를 드러내놓고 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는
그가 꿈속에서 날개를 펼친다
철길에 뻗은 회귀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새파란 정맥을 일구며
유년시절을 향해 날아간다
밤하늘이 따스하게 품은 달빛으로
앙상한 흉곽 가득 양력을 부풀려 닿은 간이역
어둠의 발음으로 쉰 목젖을 감싸며
사투리가 정겹게 흘러나온다
어머니가 청색으로 물든 눈물을 닦아주며
어린 왕자의 귀한 혈통인 양
젖 냄새가 흥건한 가슴으로 안아 준다
태반 속 아기처럼 낮게 엎드린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술패랭이꽃
구겨진 지폐처럼 파도가 인다
세월의 바람에 접힌 구김살이
서러운 곡절로 실려온다
아픔을 견디다보면 추억이 되듯
상처의 무늿결을 곱게 펼쳐
한 떨기 꽃을 피운 술패랭이,
보랏빛 그늘을 드리운 얼굴에
술기운이 붉게 번져있다
쌍꺼풀수술로 초승달 눈을
보름달로 열어놓았지만
세상이 그믐달로 더 어두워졌다고
지난 시절의 흉터를 휘갑친다
구차한 목숨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돈 멀미에 휘돌리며
홀씨로 날려 섬까지 팔려왔지만
장보고 같은 남정네가 없었겠느냐
속눈썹 한 짝을 뭍에 떨군
인연의 그리운 한때를
꽃술에서 자아낸 무명실로
이불홑청을 시치듯 박아나간다
명치에 말린 응어리를 더듬으며
한 땀 한 땀 풀어놓는 첫사랑에
홍자색 낯빛을 수줍게 물들이며
분내를 폴폴 퍼트린다
사내의 거친 근육으로 일렁이던
파도가 욕망에 부푼 수작을 그치고
죄지은 듯 잔잔해진다
꽃향기에서 이는 파동이
가파른 어깨에 나비의 우화를 깨운다
몽환에 휩싸인 날갯짓으로
술패랭이 꽃품에 간곡하게 안긴다
그녀의 섬이 포근하다
마의태자
검은 상복처럼 입성에 때 낀
태자가 왕조의 노을빛에
긴 그리메를 늘인 채 걷고 있다
성골의 후예임을 드러내는
불거진 광대뼈와 첨성단 위에 뜬
북극성처럼 형형한 눈빛
은행나무가 단풍든 금관을 씌워주며
알알이 익은 눈물방울을 떨군다
천년 사직을 일으키소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땅바닥에 그림자를 엎드려 통곡하는
가로수들이 한 발 한 걸음마다
곱게 물든 낙엽을 깔아준다
군왕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도에
가슴 속에서 성덕대왕신종이 울립니다
만 백성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어찌 하늘을 우러를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깊이 숙인 걸음에 옥쇄가 찍힌다
왕조를 하직할 게 아니라
왕권을 부흥시키겠다는 결의가
발자국에 돋을무늬로 되살아난다
머리 푼 바람이 태자의 큰 뜻을 읽고
서라벌로 파발마를 달린다
햇무리를 두른 환두대도의 칼날을
어둠이 칼집 속에 고이 품는다
밤하늘에서 폭포가 용틀임하듯 쏟아지는
황금달빛의 물보라가
선왕들의 별자리를 새겨놓는다
혈맥이 뜨겁게 파동치는 지문으로
역대 왕의 이름을 짚으며
노숙자사내가 금강산골짜기 같은
서울역 지하도의 유배지에 든다
오이꽃
느낌표로 자란 오이 끝에
바짝 마른 꽃잎이 붙어있다
일생의 굴레를 두른
꽃자리에 어머니가 보인다
넝쿨로 뻗어 올라간 비탈에
밭 한 뙈기를 일군다
잎새의 호미질로 김을 매는
광합성에 땀방울이 돋아나
거름으로 발효되듯 뚝뚝 떨어진다
밭이랑이 뼛속 저리게 뻗은
지친 몸으로 노을을 끌고 와
초저녁별로 밥을 짓는다
달빛 분화구 같은 허기로
식구들이 밥 한 그릇을 비울 때
멀건 숭늉으로 끼니를 때운다
자식들의 열매꼭지가 자랄수록
목숨을 세우는 삶이 등을 짓누른다
강파른 세월의 궤적으로
마른 살에 주름이 늘어난다
관절이 닳은 무릎의 통증에
아무도 몰래 잠을 설치며
낮달같이 고된 일에 매달린다
변성기의 굵은 목청으로 여문
자식들이 푸른 화살을
세상 밖으로 쏘아 올린다
정수리의 백회혈(百會穴)에 뜬
어머니 별자리에서 번지는
오이꽃향기가 몸속 구석구석을
충만한 기운으로 밝힌다
푸른 논을 보다
막 떠오른 햇살로 촘촘히 짠
밀짚모자를 쓴 지리산이
섬진강의 물빛 흰 고무신을 신고
논두렁에 난 물꼬를 본다
지난밤 별빛의 꽃가루받이에
벼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배흘림줄기에서 입덧하듯
알슨 이슬이 청청 매달려있다
햇발에 돋아난 삽날로 고랑을 쳐
수로에 피돌기 기운을 채운다
잎사귀 푸르른 혈청과
물비늘의 백혈구가 무논에 일렁인다
오뉴월 볕이 거름빛으로 발효되어
굵은 땀방울로 맺힌다
지리산이 이맛전을 닦기 위해
모자를 벗은 선한 눈매가
황금이삭의 알곡을 닮아있다
간곡하게 풍년을 기원하며
산모같이 뱃구레를 부풀리는 논배미
뿌리 끝 태동이 잎줄기로 뻗친다
살여울을 일구며 돌아온 은어의
수박 향 비린내가 물살에 실려와
대궁 속 물관을 휘감아 오른다
하루의 충만한 노동으로
햇무리에서 노을이 풀린다
해거름에 꼴을 한 짐 진 아버지
고샅까지 마중 나온 아이의
작은 동산 그림자를 앞세워
천왕봉이 사립문을 들어선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면서,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응모자수는 많건 적건 올해부터 한국문학방송은 일체 밝히지 않을 방침이다. 그것은 양적(量的) 우월감 과시 또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2009년에는 10명이 본선에 올랐지만 심사위원들의 부담이 컸을 뿐만 아니라, 평가의 난맥상이 다소 감지되기도 했다. 하여, 이번에는 본선 상정 대상자를 크게 압축하였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두한 시인(《현대시학》등단, 문학박사), 박남주 시인(《현대문학》등단), 이송희 시인(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전 중앙대 강사) 등 초, 중진을 가리지 않고 선발·위촉된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신중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초진급 위원은 보다 신선한 감각, 중진급 위원은 보다 폭넓고 깊이있는 관조 등으로 심사에 임하므로써 전체적으로 보다 객관적인 심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이번에도 크게 고민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계속 이어갈 것이다.
당선은 되지 못했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다시 꼭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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