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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 외 4편 / 이경숙

 

그 해부터 마을에선 해 기르기가 유행하였다

해가 잔뜩 달리면

투명한 유리 글라스에 진득한 주스를 가득 뽑아 마실 거예요,

둥글게 생긴 소녀는 바짝 마른 혓바닥으로 해를 굴렸다

겨울이면 해는 물을 뒤집어썼다

녹는점에서 어는점으로

얼음은 속으로 열기를 가두는 법을 알았다

 

해에선 조금 쓴 맛이 났다

하얀 종이에 해를 곱게 싸 내어놓는다면

저녁엔 마른 생선 한 조각을 간사한

혀 밑으로 숨길 수 있다

 

말라가던 주홍빛 껍질과 다르게

뒷집의 해는 꽤 무럭 자랐다

숨구멍으로 단맛이 베어나는 것도 같아

그는 어느 선데이 비료를 뿌리의 똥구멍으로

찔러 넣어주었다

해가 잔뜩 웅크린 날

 

해의 부스러기를 핥을 때면 새하얀

눈물이 떨어졌다

노모는 차광막 붉은 모자를 눌러쓰곤

지문이 지워진 손가락으로 검을 땅을 파내고

그녀가 흘린 땀방울은 쉽게 부유했다

가난 대신 쏟아지던 땀에는 소금 한 줌이 자란다

 

해는 촘촘히 태어나는데 빛은

쉽게 태어나는 법이 없다

해 기르기가 유행하는 날이면

나는 쓴맛이 나는 해를 꿈처럼 와그작,

베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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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의 흔적

 

 

초록의 잎사귀로 잠 못 이룬 별빛이 내려앉았다

소리 없는 말발굽

달리던 날들이 늘어날 때마다

푸르게 새겨지던 유목의 흔적

탯줄이 잘린 후 남은 조직처럼

유목의 흔적은 몸 어디를 떠돌았다

탄생의 의미에 대해 말해주듯

늘어지던 어머니의 탯줄

탯줄로 이어지던 흔적들

아이는 모체의 흔적을 마시고 자란다

해가 지날수록 크게 번지던 흔적은 붉다가

파랬다 초록으로 변하곤 했다

어느 초원을 맨발로 달리고 싶은 날이면

빨간 보자기를 둘러매고 날아오른 어린 날

어쩌면 나는 별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세상과 입맞춤한 자리에는 엉덩이 어느 부근을 맴돌던 푸른

유목의 흔적이 떠돈다

낡아버린 흔적은 검은 꽃으로 피어나는 거란다,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 사이엔

지난날 숨겨졌던 흔적들이 피어나는데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던 나의

발끝은 아직 깨끗했다

발굽이 되지 못한 발끝

잘린 갈기를 기르면 움직일 거라던 시계바늘엔

아직 뿌연 먼지가 쌓여있다

자박, 제멋대로 자란 풀잎을 밟으며 달리고 싶어

나는 고삐를 풀고 단단한

땅을 발끝으로 밀어낸다

45억년 동안 새겨진 지구의 흔적들

자유를 찾아 헤매는 것들의 몸엔 유목의 흔적이 있고

이제야 발굽을 갈아 끼운 몸에선

유목의 흔적이 자란다

 

 

 

 

 

꿈으로 달리는 선박

 

 

나는 매일 잠을 엉성하게 베어 물었다

구름을 닮은 잠

잠은 폭신했고, 부드러웠고 아무런 맛도 없었다

 

꿈으로 항해하는 선박에서

매일 저녁을 표류했다

꿈은 언제나 신중해야 해,

결국 지키지 못한 약속은 하나씩 늘었다

 

의미 없는 기념일들과 시끄러운 정적

왁자하게 떠들던 영화

추억을 필름으로 정의한다면

열아홉 번째 필름은 돌려보지 말도록 해야 한다

꿈이 가장 많이 피어나던 날들 그러나,

아홉수 질긴 생이었으므로

 

꿈은 매일 타올랐다

어쩌면 타 버리는 걸지도 몰라

 

버려진 꿈은 저의 원동력이 되었어요,

 

유명한 100억불부자의 이야기

그는 그 꿈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만 숨겼다

 

선박은 꿈이 없어지면

천천히 추락하는 법

무너지던 이야기들과 어린 문장들

배가 낡아가는 동안에 나는

새로운 잠을 베어 물었다

구름을 닮은 잠에 대하여

 

밤은 길고 잠은 언제나 짧은 것이다

 

 

 

 

 

빨간 망토 소녀의 우화

 

 

음지에선 꽃이 자라지 못해요 나의 손끝은 언제나 그림자 뒤에 있고 내 손에선 꽃이 피어날 수 없어요 음푹 파인 손마디에선 눅눅한 잡초만 기어 올라오는데 쉿, 아무도 그림자는 자르지 않기로 해요

내일 아침엔 오동나무로 커다란 지게를 만들 거예요 할머니가 선물한 빨간 망토를 입고 할머니를 산산조각내기 위해 모두들 슬픔의 눈물을 흘리겠지만-사실은악어의눈물이라도- 나는 한쪽 입술을 한껏 끌어올려 웃어 주겠어요-가장진실된웃음과울음은반비례하다는걸모르는사람들그들에게주어지건할머니의조금여린몫시지만

그건배부를수없고사람들은벌써다음제물을탐색하고있어요이빨이나가거나주름이깊게패인낡은빛들-

 

겨울은 꽤나 오래 쌓이는 법 악어는 숨을 쉬려 고개를 삐죽 내밀다가 그대로 얼어붙어요 앞으로 나흘, 그의 가족은 입에 대해 웃다가 나흘이 지나면 울면서 그를 삼킬 거예요-이런것이바로악어의눈물과같은법칙이되는것입니다-

 

아버지는 몇 달 째 빈손으로 들이치고 어깨에 짊어진 노을은 자꾸만 무거워지는 중이예요

 

세 조각으로 나눈 버터 향 쿠키는 이틀을 먹을 양식 한 조각은 잘게 부수어 할머니의 등 뒤에 숨겨 놓아야 해요 줄어든 양식과 늘어나는 입 이건 언제나 물음표의 법칙 언젠가 버터 쿠키의 향을 들이쉰 곰과 같은 것이 할머니를 잘게 찢어낼 준비를 하고

 

사실 할머니가 준 건 하얀 망토지만 빨갛게 물들 거예요 곧

노을이 우리의 그림자를 덮을 예정이므로

 

등 뒤로 해가 저물어가네요 안녕, 나의 초대형 입, 그랜드-

마마?

 

 

 

 

 

흐린 청춘 사용법

 

 

열아홉 종이 한 장에 떠밀려 나는 서린 날 위로 발을 뻗었지

한순간에 떨어진 바닥을 맨발로 짚은 나에게

달은 자신의 허물을 벗어주었다

그날부터 반푼이가 된 나는 한 평

백오십센치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다행인건 키가 백사십을 웃돈다는 것

 

청춘들은 누구보다 값싸게 살아야 한다던

어느 부자의 말을 반찬삼아

얼어버린 밥덩이를 씹었지 십킬로

한 푸대로 한 해를 버티던 나에게

천장에 매달아놓을 조기는 사치였다

 

닳은 지문과 입구만 최신식이던 고싯방

읽히지 않는 지문 덕분에 난

선물 받은 휴대폰도 잊고 다시

지문을 지우러 나갔지

그래도 오늘은 천오백원 인생

어제의 딱 두 배의 값으로 살았다는 것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흐린 하늘과 옹골진 식당에서

삼백여 입들과 먹던

이천육백몇십원의 점심식사에 대해

 

밤은 잊힌 나에게 비웃음만 옅게 남기고 떠났다

잔뜩 비가 올 것만 같은 날

청춘은 천원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이다

 

 

 

 

[당선소감]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지만은 않습니다.

 

시인은 가장 낮은 곳을 맴도는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감정을 터뜨리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것이 시가 저에게 준 삶이자, 제가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의 단면을 본 이상 이제는 더욱 시를 향해 걸어 나가야겠지요.

 

이런 기회를 열어주신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담당자분들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울며 성장하겠습니다

 

 

[심사경위]

 

올해로 아홉 번째가 되는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다. 이번에는 과거(1회~8회)의 경우와는 달리 응모자격 제한(공모 요강)에 따른 순수 미등단자(문예지나 전국·지역 일간신문 등의 신춘문예, 현상공모전 등에서 당선 또는 수상한 사실 없는)로서, 210여 명이 응모했다.

 

1차 예심에서 50명이 선발되어 본심으로 상정됐고, 본심 1차에서 7명(작품수로는 35편. 1인 5편 응모)을 선정했다. 본심 2차에서는 각 작품별로 채점(점수)제 방식을 통해 최종적으로 1명이 당선자로 결정됐다.

본심은 채점과 집계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심사위원끼리도 누구인지 그리고 몇 명인지 알 수가 없도록 철저히 미공개 및 보안을 유지했다(심사위원의 소신과 자율성, 공정성 등 보장). 채점 착안 사항은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부합·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이었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본심은 하상만 시인, 서상규 시인, 우경주 시인, 김은자 시인(아래 사진, 무순)이 각각 맡았다.

 

- 심사위원 하상만, 서상규, 우경주, 김은자 시인

 

 

한국문학방송에서 시행한 2018년도(9)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이경숙(37) 씨가 당선됐다.

당선작은 <공해>, <유목의 흔적>, <꿈으로 달리는 선박>, <빨간 망토 소녀의 우화>, <흐린 청춘 사용법> 5편으로, 채점(점수)제 방식인 본선에서 다른 응모자들보다 상대적으로 고르게 높은 점수를 획득함으로써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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