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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사회》제9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_ 박성준

 

돼지표 본드 (외3편)

 

   박성준

 

 

 

유리잔에 깨진 손잡이를 붙이다가
본드의 빵빵하게 부른 배를 만진다
벌러덩 뒤집힌 코를 잘 막아두지 않아
폭식성에 찌든 누런 군침들이 본드 입구에 말라붙어 있다
짧은 다리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길
돼지가 무거운 발을 내딛고 있는 걸까
누런 고무 화합물이 살 굽는 냄새로
목 비튼 지문을 간직하고 떨어져 나간다
돼지의 걸음 뒤로 유리잔과 손잡이는
서로 잊었던 시간을 지운다, 감정도 없는
축축한 살을 꼭 껴안고 있다
식탐이 말라붙은 환각 속에서
짧은 목으로 돼지가 먼 하늘을 되뇌어본다
머리 위에서부터 망명한 저 바람은
알프스 동굴까지 외치*―외치! 굳은 몸을 부르며
살찐 미라의 주검 직전 표정을 돼지에게 문질러놓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 잃어버린 웃음들이 흘러나온다
물렁물렁한 살 안쪽을 쭉 쥐어짤 때마다
식육점 갈고리에 두고 온 몸이 달그락거리고
흔들리는 오후 한때가 본드 주둥이 끝에서 굳어가고 있다
저 차갑고 허전한 육체
얼마나 맛있게 굳어갈 주검의 준비 과정인지
돼지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꺼이 틈이 된다
유리잔과 손잡이 사이 얼어붙은 강줄기가
웃다 멈춘 순간의 눈꺼풀만큼이나 단단하다


* 외치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이 찐 미라.

 

 

 

결혼 홈쇼핑

 

 

   주문한 남편을 생각합니다 새벽이 무서워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 들이며 홈쇼핑을 켜지요 몸속에 물관들이 단단히 차오르고 새 남편의 그림자가 잉크처럼 번집니다 세 시간을 잤을 뿐인데 꿈속에서 삼 년을 산 것 같은, 헛것들과 허튼 꿈만 꾸고 놀다 갑자기 밀린 빨래가 생각난 듯, 엉킨 몸들 사이에서 제 몸 찾아 건조대로 가지요

 

     몸에 집게 자국만 깊게 남아도
     잃어버린 것들을 참아내야 할 시간

 

   방들이 헬륨 풍선처럼 떠오르고 있는데 누가 갈비뼈 아래로 꾹꾹 초인종을 누르나요? 어젯밤 새 남편들의 가슴 근육을 누르던 중매쟁이 쇼호스트처럼 띵동― 띵동― 내부로 흐르는 작은 떨림, 수화기를 들자마자 결혼 행진곡을 듣습니다 가라앉은 폭죽 냄새를 휘저으며 금방, 울 것 같다고 온몸 떨지요

 

   구입한 남편 이력이 전국 방방곡곡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전송되면 전화 한 통의 짧은 연애,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그렇게 지불한 시간은 반품도 안 된다지요 사용해보시고 선택하란 말 다 거짓말이야 남편이 쾅쾅쾅 자꾸 문을 두드리는데 두려워, 꽃을 참을 수 없어 활짝 홈쇼핑을 켭니다

 

   문밖에서 새 남편이 패키지로 데려온 작은 손, 딸아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요 자동 주문 전화가 보내준 남편인데요

 

   현관문을 잡고 망설입니다 몸이 열리기도 전에 배달될 남편만 생각하던 새벽 이렇게 꽃물 든 몸속에 집을 짓지요 주문한 절반의 생을 잡지 못해 웃으며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표정, 시들기로 작정한 꽃처럼 휩니다

 

 

 

 

샴!

 

 

 

   계단이 날마다 옷을 벗어요 꿈틀거리던 척추가 이제 아프지 않죠 계단 중앙을 뚫고 깊어지는 가로등이 구불거리는 등짝에 주홍색 스타킹을 입힐 때마다 벗었다 내팽개치는 다리들 낭자한 빛의 의족들이 골반을 잊는 중이죠

 

   밤은 시퍼렇게 환한데 이 길 걷다가 나만 뜨거워져서 죄다 취소하고 싶은 벽이랍니다 모든 움직임은 뼈를 그리워한 주제가처럼 흘러내리고 모양을 좀체 바꾸지 않던 등짝도 뻐근해져 당신은

 

   감각을 주워다 더 멀리 밀어버리고 있는데 나는 왜 자꾸 당신 척추에 가라앉고 있나요 지독한 길들이 흉부를 꿰매고 또 헐렁한 계단을 꿰매고 태어나기도 전에 포개어진 주홍빛 그늘이 겹칠 때를 찾아

 

   검은 강 흐르지요 모두 거울이 깔린 계단이랍니다 당신과 내가 갈라지면서 할퀴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당신을 딛는 순간 나는 당신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흩어진 허공의 주인들은 여기서 웅성거리는데 여보세요 어디 계세요 내 척추를 찾아도 허전한 이 느낌은

 

   손톱처럼 잘려나간 숨소리가 미리 파놓은 무덤으로 가 눕고 계단이 맨살로 밤을 견뎌요 까닭 없이 나를 버린 통증이 한 번 더 내 빈 곳을 생각하고 있어요

 
* 샴 : 샴쌍둥이.

 

 

 

 

아비 디스크 조각모음記

 

 

   아비의 허리가 덜 바른 시멘트처럼 무너졌을 때 LCD 모니터가 꺼지는 날이었어요 가루로 날리던 굳은 척수가 봄꽃보다 먼저 핀 선산에서, 쓰러진 목소리들이 피어오르는 그런 날이었지요 사뿐히 흐르던 바람이 징검돌처럼 아이콘 몇 개 방바닥에 띄울 때 나, 몰래 가보았지요 그 능선 아래로, 열병 난 컴퓨터가 조각난 아비 허리를 끼워 맞추고 있더랍니다

 

   꼬리뼈부터 간지럽게 아지랑이 피어오르며 분해되는 조각들 몇몇은 휴지통으로 몇몇은 아비가 바르다 만 시멘트 벽으로 풀풀 봄볕 좋아 날리는 마음, 제집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던 소목은 휜 못처럼 척추를 잃어버려 집 안에서도 물렁물렁해졌다던데 그 물렁한 눈빛 속에 들어가 보면 아비만 척추를 잃은 것이 아니더랍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것들이 저마다 곧게 서서 서로가 중심이라 싸우는 꼴이 여간 사나워

 

     저 저 공장 굴뚝 좀 봐라
     불빛을 제 혈관으로 흘려보내는 입간판들 곧게 선 것은 어떻고

 

   하여도, 장지 날 축대 하나 세울 여력 없는 가계는 참 물렁물렁 부드럽고 포근했지요 상여 차가 지붕에 사이렌을 달고 급히 당도한 곳, 정리를 마친 디스크 조각들이 처음 제자리를 찾는 그 빈 곳, 이제 속도를 내고 가시겠군요 내 아비! 날아간 몇 조각이 모니터 속 허공을 채우고 빈자리는 감은 눈꺼풀 속처럼 어두웠던지라 벽을 지고 들어가시는 연체동물, 나는 보지도 못했지요 초기화된 바람이 아비 눈자위에 흰 구름을 불러 모으고 있어요

 

 



박성준 / 1986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 졸업.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재학 중.

 

 


심사평

 
  올해 응모된 시 중 먼저 주목된 것은 정수연의 「숙련공」외, 서동빈의 「연가곡 마리오네트」외, 박도준의 「긍정의 힘」외, 서지석의 「맛있는 홍대, 베이커리」외, 김상혁의 「사랑의 기술」외, 박성하의 「고래잠」외, 박성준의 「돼지표 본드」외 등의 작품이었다. 이 중 최근 시의 경향에 근접해 있어 고유의 개성이 미만하다고 여겨진 경우와, 작품의 편차가 커서 시를 완결 짓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판단된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 정수연, 박성하, 박성준의 시편이었다.


  정수연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있고 일상의 단편들 속에서 시적 모티프를 착안해내어 평범한 삶의 현실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발랄함과 유연함이 돋보였지만, 화법과 어조가 기성의 시인을 연상시킨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우리'라는 복수대명사의 반복적 사용이 특히 그러한 인상을 주었는데, 시적 화자로 '우리'가 제시된 이유와 맥락이 시 내부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심사자들이 당선작을 쉽게 결정하지 못할 만큼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것은 박성하와 박성준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안정된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이 중 한 사람을 택해야 하는 일이 즐거운 고민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박성하의 시는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린 연금술적 기술과 정돈된 탁마(琢磨)가 수려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빚어내어 순도 높은 서정성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박성준의 시는 다채로운 어조를 바탕으로 사물의 이면을 투시하는 시선과 포착된 대상의 특질을 다양한 각도에서 부각시킬 줄 아는 구성력이 시의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오랜 논의와 숙고 끝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택한 것은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더 돋보인다고 여겨진 박성준의 작품이다. 박성하의 경우, 파편적인 언어의 진행을 서정성 가득한 이미지로 끌고 가는 힘이 빼어났지만 시종일관 지속되는 단조로운 톤이 당선작으로 뽑기엔 미흡한 측면으로 여겨졌다. 박성준의 몇몇 시편은 각각의 사물이 언어의 표층에서 작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대상을 허투루 보지 않는 진지함과 숙고의 태도가, 그리고 시를 언어의 정교한 구성물로 만들 줄 아는 정밀함이 최근 시에 드물었던 시적 기량으로 여겨져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투고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모두의 앞길에 문운이 깃들길 기원한다.

 

                                                                     _ 《문학과사회》편집동인 | 김동식, 김태환, 박혜경, 우찬제, 이광호, 최성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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