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계속 웃어라 외 4편 / 임승유
계속 웃어라
팬티를 뒤집어 입고 출근한 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이 한 말이다
귤처럼 노란 웃음을 까서 뒤집으면 하얗게 들킬 것 같아
오늘은 애인이 없는 게 참 다행이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예쁜 팬티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팬티 같은 건 수북하게 쌓아놓고 오늘은 꽃무늬 내일은 표범무늬 어제는 나비를 거느리고 다녔다 결심을 유보하느라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식물처럼
내가 딴생각에 빠지면
손목이 가느다란 것들은 믿을 수가 엇어 공장장은 중얼거린다
나에겐 아직 애인이 없고
공장장과 함께 밥을 먹는다
팬티 속을 만지면 울어본 적 없는 울음 설명할 수 없는 오후
번지듯 피어나는 꽃잎을 물고 나비는 날아가버리고
그걸 알아봐준다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고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걸까
애인은 어떤 식으로 생기는 걸까
주유소의 형식
나는 네모의 형식
팔다리를 접어 울음을 가두고 길가에 앉아 있다
누군가 지나가다 툭, 친다 해도 괜찮아
그건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점
사람들이 가벼워진 연료통을 끌고와 줄을 섰다
견고한 내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싱싱한 울음을 채운 사람들이
끌고 온 길을 접으며 달려 나갔다
말하자면 나는 바깥에서부터 흩어지고 있었는데
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울음이 빠져나오고 있다
멀리 보냈던 울음들이 활활 타오르며 옆구리에 달라붙고 있다
내부를 향해 몰려드는 바깥들
우린 언젠가 같은 종류의 울음을 나눠 가진 적이 있고
출렁이는 울음을 만지작거리며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렸다
갈 데까지 가서
울음은 바닥이 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때 우리는
길가에 웅크려 앉은 자세
우산
사탕을 녹여 먹고
글라디올러스
아스파라거스
발음을 하는 동안에도 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고
단추를 만지작거리지
단추는 구멍이 한 개
단추는 구멍이 두 개
구멍이 네 개일 대는 외로움도 어려워져
오늘의 날시에 안감을 대면
앞다투어 아이들이 뛰어 오고
뛰어오면서 녹는다
키스처럼
신발을 어디서 벗었는지 기억하지 않기로 하자
망고를 먹으면
망고의 기억을 갖게 되지
서로의 기억속에 이빨을 박고
서로의 이빨을 빛나게 닦아주면서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이터를 살 때마다
어딘가에 두고 온 내가 생각났다
나는 화요일마다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을 감쪽같이 감아버리고
에스컬레이터의 내면에는 서랍이 얼마나 마낳을까
나는 목요일의 술자리에서 속삭였지
싱고늄 종아리가 하얗게 얼고 있는 걸
본적이 있냐고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싶은 적이 없었냐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일어나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들
그 기분들을 다 써먹지도 못했는데
누군가는 결정적으로 신문을 장식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과 함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
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
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 세우려면
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
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
입술이 끌어 모으는 결심은 너무 늦거나 빨라
화요일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마다
칸칸마다 서랍을 열고
잘 있었니?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고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저기 대문을 잠가줘요
말랑하고 빨갛고 냄새가 나고 손으로 문대면 으깨지는 산딸기의 성장이 두려워 산딸기를 씹어 먹었다 내 이빨과 혀가 나의 성장에 관여했다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않고 웃었다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들어올 때는 불을 끄고
방문을 반쯤 열어줘
어디서나 짙푸른 멍처럼 풀들이 자라나고
잇몸이 가려우면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아버지만 뜯어 먹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니
성장이 징그러워요
입을 작게 벌리고도 훌륭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메뚜기도 괜찮고 개구리도 괜찮고 방아깨비는 좀더 우아하지
쇠죽솥 가득 우아하게 저녁을 삶고 있는 엄마
나는 잘 크고 있다
아버지의 입안에서 맴돌던 냄새가
내 입안에서 맡아진다
자꾸만 내 이빨이 무시무시해진다
당선자 프로필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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