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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마술
복도 끝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

 


열아홉은 괄호가 포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 바닥에 빨간 울음이 흥건합니다 누군가 날카로운 어젯밤을 소화시키지 못했나 봅니다
둘, 여기서부터 가족들의 방은 멉니다 커다란 구름이 말라가는 거실입니다
셋, 시계의 뒤편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을 봅시다 아빠는 오후 아홉 시처럼 생겼습니다
넷, 우리들은 우리들로 남아야 하기에 아직은 식탁에 앉아 실마리를 꼭꼭 씹어 삼킬 뿐입니다

 

벽 너머에서 엄마는 푸르스름 야위어가고 아빠는 배를 까고 누워 노랗게 불어갑니다 시침으로 꿰맨 교복 치마는 나의 알리바이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챘나요? 엄마 아빠가 시계 속으로 분주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혀가 고부라진 아이 입안 가득한 째깍 소리를 녹여 먹으며 내일의 과목을 생각합니다

 

구름이 눈썹을 찡그리는 날부터
나의 이름이 느리게 증발할 때까지

 

증거가 되지 못한 물방울들은 곧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아직 쓸 만한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아빠는 질문을 씹어 먹습니다 어떻게 하면 흘러내리는 심증을 촛농처럼 굳힐 수 있나요? 시간의 부스러기가 천장에서 쏟아집니다 미제로 남은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마음껏 부서질 수 있는

 

빨간 울음이 바싹 마르는 아침, 귓속에서 알람이 울립니다
아흔아홉번째 이명입니다

 

딱딱한 무지개가 완성되면 깨끗한 얼굴로 학교에 갑니다 오전 일곱 시는 무엇이든 시들게 만들 수 있고 그러나 오후 네 시에는 조금 웃어보아도 괜찮은 것 아홉시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꿈치에 쌍무지개를 그려보기도 합니다만 우리들은 조금도 겹쳐지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 챘나요? 촉촉한 물방울들이 문 틈새로 탈출합니다 언제 어디서 다른 색깔의 울음이 발견될지 모릅니다

 

무지개가 시간을 읽기 시작할 나이부터
열아홉이 어른들을 타고 멀리 날아갈 때까지

 

 

 

 

 

요절한 여름에게

 


편백나무가 날아오르는 시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첫 번째 돌에 표시해둔 나를 지나쳐
마치 갈림길에서 힌트라도 쓸 것처럼
척척함과 약속은 잘 어울려
더듬더듬 목구멍 들춰 어둠을 만지듯이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이에 묻어주었지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날개 터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어쩐지
뾰족한 부리는 당신의 피상
나는 오늘 도도한 레몬처럼 거절했고

 

편백나무의 날숨은 뿌리를 놓치는 것
배 속이 잠시 투명해지는 그런 것
내가 따뜻한 흙을 퍼먹는 동안에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새끼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어제로 통하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그러나 모르는 발바닥처럼
하늘을 지나치게 올려다보며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커밍아웃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취한 바람이 호기롭게 골목을 휘돌아 나갈 때
나뭇잎이 되고 싶어 아무 데서나 바스러지는
우리가 서로를 꺼안을 때 흔들리는 그늘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낮설어지면
얼음 땡,
크레파스 냄새 나는 빨주노초 아이들
웃음먼지를 풍기며 뛰어나가고

 

배 속에선 만질 수 없는 부피들이 자란다
누가 우리를 웅크리게 하는 걸까
웃지 않는 병원에 가야겠어
문 닫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관에 하루 정도 재울까
창문이 많은 복도에서 자꾸만 더러워질까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뱀의 날씨

 


할머니는 그날 오후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삼촌의 파자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얼룩은 아들로, 아들은 엄마로 볏겨내는 거라면서
척척한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얼룩은 그늘에서 말려야 하나요?

 

삼촌은 허물을 벗고 삼촌들로 불어납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슬슬 똬리를 트는
독신주의 채식주의 완전무결 무신론자 삼촌들
입속에 불혹이 자라 말을 잊은 삼촌들
특기는 식탁 밑에서 기절하기
마흔답게 혓바닥 날름거리기 또는
잠자는 할머니를 죽은 쥐로 착각하기

 

얼룩은 그늘에서 더 축축해지나요?

 

집 안 가득 비눗물이 차오릅니다
방 세 칸이 조금은 말끔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얼룩의 무늬가 바뀌는 시간일 텐데요
할머니가 좀처럼 탈수되지 않습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된 집을 내려다봅니다
누가 옥상에 삼촌을 널어놨습니다

 

깊어진 그늘의 손을 잡아봅니다
나를 벗을 준비는 이제 되었습니다

 

 

 

 

 

 

 

 

 


심사 경위

 

올해 신인문학상에서는 심사 방식상의 작은 변화를 꾀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좀더 다양한 문학적 입장과 취향을 심사에 반영하고 나아가 문학과사회 신인상이 견지하려는 문학적 모험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시 부문에서는 최하연, 이제니 시인, 소설 부문에서는 백민석, 한유주 소설가와 함께 투고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편집동인들(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은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패기 넘치는 신예들을 탐색하고자 노력했다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이상했다. 6인용 책상 위에 가득 놓은 투고작들을 하나하나 책상 아래 종이 상자로 옮기는 일은 쉽지도, 자랑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시를 계량화하는 노동이라니, 나는 비로소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사에 참여한 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시는 나에게 목적이었을까, 수단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다.(이하 심사평 생략)_최하연(시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예심 내내 다소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응모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읽는다 해도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편들, 그야말로 잘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써나갔는가, 자기만의 언어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손을 들어줄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이하 생략)_이제니(시인)

 

▲총507명이 응모한 올해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양적으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소위 ‘서정시’라고 광범위하게 지칭되는 전통적인 계열의 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년의 심사평에서도 유사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촉발된 다양한 시적 실험의 파장과 영향이 어느새 안정적인 방식으로 시 창작의 현장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 관계나 모방이라는 단순한 말로 충분히 아우를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인 이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 대한 통념의 파괴가 역설적으로 시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통념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낯선 감각으로 능란하게 기록하는 응모작들이 많았지만, 응모자들이 구가하고 있는 자유가 시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생략하고 포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이 매개되지 않은 날 선 언어들을 장황하게 전시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며, 낯설고 특이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합하면 곧바로 시적인 문장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아니한 태도 역시 자주 목격되었던 것이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강은재, 강혜빈, 김민지, 남다솜, 박경주, 박영, 박하원, 백선율, 베이지, 서호준, 신수형, 양은경, 엄기수, 오경은, 이동호, 이희형, 정송라, 정화연)의 작품들을 좀더 단호가고 꼼꼼하게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인데,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솔아(⌜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에 대하여⌟외 9편), 베이지(⌜컷⌟외 13편) 백선율(⌜암전⌟외9편), 정화연(⌜유원지⌟외 9편), 강혜빈(⌜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9편)의 작품들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베이지는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기성의 의미를 파산시키고 새로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문 하려는 의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험적인 의지가 시의 언어를 작위적으로 포박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솔아는 시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조성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으며 시적 긴장이 일어서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시적인 정황과 순간을 연출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시의 전체적인 구조를 희생시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백선율은 겉으로는 단아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현실과 꿈의 결계를 청신한 감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응모한 시편들만으로는 그이 시가 지닌 스펙트럼의 넒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전반적으로 시들의 색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정화연과 강헤빈의 시였는데, 두 응모자의 작품들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색채가 서로 달랐다. 우선 정화연의 ⌜유원지⌟외 9편에서는 응모자 자신의 체험이 시로서 강력하게 육화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한 폭력과 고통을 소재로 자신의 일상과 육체를 낯설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겸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반면 강혜빈의 ⌜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 9편은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산개해나가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독자를 유혹하듯,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시들 사이에는 다소 편차가 있었으나 시적 진술들이 조성하는 리듬감도 매력적이었으며, 여기에 아이 화자 특유의 자유로운 화법이 더해져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와 같은 감각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오랜 습작을 통해 단련된 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숙성을 거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장점을 더욱 만개시키는 창조의 원천이라는 생각 끝에 강혜빈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응원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_『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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