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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오후 / 임지은

 

둘둘 말아놓은 오후는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꺼내려 할수록 더 깊숙이 처박힌다

개가 인형을 물고 뜯는다는 것은

산책이 필요하다는 신호

나는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계에서 꺼낸 숫자를 개에게 던져준다

그러자 한 시이면서 세 시인

게으르면서 일곱 시인 개가 다가와 얼굴을 핥는다

개의 혀는 무섭도록 따뜻하고 돌기가 있다

차가운 음료에 맺힌 오후가

개의 콧잔등을 적신다

 

먼지를 뒤집어쓴 개는

손바닥만 한 햇빛을 베고 잠이 든다

나는 숫자가 다 떨어진 시계를 쳐다본다

언제 발끝에 오후가 물들었는지 지워지지 않는다

비누처럼 미끄러운 것이 필요하다

 

한시야, 세 시야, 얼어붙은 일곱 시야

아무리 불러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검은 개만이 일어나 눈앞에 놓인 오후를 삼켜버린다

오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 나 있다

으르렁 소리를 낸다

순식간에 문밖으로 달아난다

 

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낸다

일 년이 넘도록 개는 돌아오지 않고

낮은 문턱이 있는 방바닥을 쓸어본다

읽을 수 없는 숫자처럼 생긴 털들이 잔뜩 묻어난다

 

나는 털을 뭉쳐 조금 늦은 한 시를 만든다

신발이 벗겨진 세 시를 만든다

옆면이 구겨진 일곱 시를 만든다

처음 보는 시간들로 시계를 가득 채운다

오후가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늘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이 든다

꿈속으로 검은 개가 찾아온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뜨거운 오줌을 싼다

발끝이 하얗게 물들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죽음처럼 축축한 것을 입에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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